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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애가 잘못된 게 엄마 때문이라고?!

㊳ 더 체스트넛 맨

 

이번 주 영화로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스트넛 맨’을 고른 것은 순전히 부산영화제때문이다. 영화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난 열흘간 신작들을 챙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당장 개봉하지 않을 영화제 출품작들을 소개해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여지책까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자랑하는 넷플릭스 작품 중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다. 일종의 덴드다. 덴마크 드라마. 이번 것은 6부작이다.

 

체스트넛은 밤이다. 가을철에 후두둑 떨어지는 밤송이의 그 밤. 왜 제목이 체스트넛 맨일까. 이 영화의 연쇄살인범이 사람들을 죽일 때마다 그 옆에 밤으로 만든 못난이 인형을 표식으로 놓고 가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얘기는 의외로 많다. 미국에는 쿠키를 이용한 진저맨이 유명하다. 아 캔디맨도 있다. 어린 시절 놀던 인형 만들기, 그 인형을 만들면서 불렀던 노래=동요를 살인 모티프로 자꾸 이용하는 이유는 다 그 당시 당했던 정신적, 육체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예컨대 노르웨이 작가 요 뇌스뵈의 인기 소설 ‘스노우 맨’의 연쇄살인범도 폭력적인 유부남과 사귀던 엄마가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일부러 얼음 물에 빠져 자살했기 때문이다. 경찰이었던 엄마의 불륜남은 물에 빠져 들어가 죽어가는 여자를 수수방관, 오히려 자살을 방조한다. 이 아이는 커서 아이를 유산하려 하거나, 유산했던 여인들만을 골라 살인을 저지른다. 남자에 대한 분노를 엉뚱하게 과거 자신의 엄마型 여인에게로 돌린 셈이다. 자신을 버린 것처럼 아이를 소홀하게 챙기는 여자들.

 

 

‘더 체스트넛 맨’을 보고 있으면 몇가지 단상이 든다. 일단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불리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철학이 다를 수 밖에 없겠다는 것이다. 너무 춥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리 많이 살지 않는다. 인구밀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고립돼 있고 소통이 잘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라는 단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자들 혹은 여자들이 아이를 때리고 학대하며 심지어 강간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쩌면 주변에 이를 감시할 사람들이 너무 없기 때문이다. 가정이라는 공간에 절대적 지배자가 실질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들은 사람들의 일상이 기본적으로 꽤나 음습할 수 밖에 없고 거기에 범죄심리가 많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공간적 조건을 지닐 수밖에 없다.

 

덴마크, 스웨덴 등 북구 지역은 과거 2차 대전을 전후 해, 나치에 부역한 역사가 많고 그 개인사, 가정사들이 꽤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것이 살인극 등 사회범죄로 이어질 때가 많다…기 보다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적지 않다는 것이다.

 

스티크 라르손의 ‘밀레니엄’이 바로 그랬다. 앞서 언급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는 더욱 더 그렇다. 요 네스뵈의 작품 속 해리 흘레는 별 해괴한 잔혹살인마를 좇아 늘 천신만고 끝에 녹초가 된다.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스노우 맨’ 얘기다.

 

 

‘더 체스트넛 맨’의 첫 장면은 1987년이다. 외딴 지역에 홀로 살아 가는 농가에서 끔찍한 살인이 발생한다. 아버지, 엄마 그리고 남매 중의 누군가가 도끼나 식칼로 난자 당했다. 아이 둘만 살아 남았는데 이 아이들의 방에서는 체스트넛 인형들이 많이 널려져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다. 이 사건은 미제로 남는다. 누가 농가의 부부를 도륙했으며 아이 마저 한명을 도끼로 때려 죽였을까. 이 집안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두 아이. 두 아이 모두 입양아이다.

 

덴마크 코펜하겐 언론은 연일 사회복지부 장관 로사 하르퉁(이반 도르네르)의 근황을 뉴스를 내보내는 중이다. 1년 전 그녀는 자신의 딸 크리스티네를 잃어 버렸다. 경찰은 유괴사건으로 보고 전력을 다해 추적했으나 결국은 아이를 찾지 못했다. 다만 크리스티네를 죽이고 유기했다고 자백한 정신이상자를 검거했을 뿐이다. 장관의 딸 아이 실종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된다. 크리스티네는 살해당한 것으로 정리된다.

 

로사 장관은 1년 휴직 기간을 거쳐 다시 업무에 복귀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일단 장관직을 사퇴했을 것이다. 북구 나라는 이걸 기다려 준다.) 로사의 장관직 복귀가 언론의 주요 관심사일 때 그에 준하는 사건이 하나 둘 씩 벌어지기 시작한다. 손목이 잘리거나 발목이 잘린 여인들의 시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모두들 아이들이 있는 엄마들이다. 아이들이 잠깐 놀이에 한눈을 판 사이에 엄마들은 마당 숲으로 끌려 들어 가거나 헛간으로 끌려가 살해 당한다. 두 눈은 도려냈고 어떤 여자는 손목, 어떤 여자는 발목을 잘라 내되 대개 여자가 살아 있을 때 절단을 함으로써 극심한 고통을 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 둘이 나선다. 베테랑 형사 나이아 툴린(다니차 추르치치)과 무슨 이유에서인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좌천돼 옮겨 온 유로 폴(유로 경찰)인 마크 해스(미켈 보 필스고르)가 그들이다. 이 둘은 시체 옆에서 체스트넛 인형이 늘 발견되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다. 문제는 이 체스트넛 인형에서 1년 전에 실종, 사망된 것으로 정리된 크리스티네의 지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형사 둘은 연쇄살인 사건이 로사 장관과 연관이 있음을 눈치채고 그녀의 주변을 캐기 시작한다.

 

 

로사 장관은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그녀의 과거는 무엇인가. 로사의 남편은 딸의 유괴사건과 전혀 무관한가. 혹시 이 둘 모두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부부의 육아는 정상적이었는가. 뭐니뭐니해도 크리스티네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아 있다면 왜 연락이 없는 것인가. 살해당하는 여성들의 연관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다들 애 엄마라는 점? 근데 그게 뭐? 그리고 왜 팔다리는 잘라 가는 가. 무슨 전리품인가. 가장 중요한 것. 체스트 넛 인형을 두고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얘기할 수는 없겠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이 영화에는 이른바 사회복지가 잘돼 있다는 북구 나라에서조차도 아이들 양육 문제를 놓고 페미니즘적 갈등이 적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살해된 엄마들은 아이 양육에 일부러 그랬든 어쩔 수 없었든 소홀했었던 여자들이다.

 

다들 직장이 있거나 너무 젊어서 애보다는 자신이 더 귀한 존재인 여자들이다. 이럴 때 애들은 방치되기 일쑤다. 로사 장관도 과중한 업무 때문에 남편과 방과 후의 애를 데리러 가는 문제가 엇갈렸다. 그때 애가 사라졌다. 사건을 좇는 툴린 형사도 허구헌날 쏟아지는 강력범죄에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기가 너무 어렵다. 툴린은 그래서, 지능범죄수사대로 옮기기를 희망한다.

 

 

‘더 체스트넛 맨’은 결국 여성 주체의 사회역사적 복원, 여성성의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기까지 기득권 남성 사회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려 한다. 여자들은 애부터 건사해야 한다는 것이 이 사건 범죄자의 주장처럼 느껴진다. 근데 그건 자신이 어릴 때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던 정신적 충격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결론 부분으로 치닫을 때는 역설적으로 진부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남녀평등이 잘 돼있다는 북구에서조차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구태의연한 논쟁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가 못하면 남자가 하면 된다. 가정과 육아는 남녀가 함께 하는 일이다. 이 문제가 덴마크에서 불거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사회의 시대정서도 퇴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다. 그것 역시 덴마크 사회가 위험 신호를 내보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 실상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니까. 이래저래 저들이나 우리들이나 기득권 층(그것이 자본가가 됐든 우파 정치인이 됐든 아니면 남자가 됐든)의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피력한다. 사회는 늘 싸움과 정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쇠벤 스바이스트루프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형)드라마로 만들었다. 두개 중 하나를 보거나 읽으면 된다. 둘 다까지는 필요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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