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출판사 교유서가는 오는 10일 오후 7시 인천시 강화뉴스 교육장에서 신간 ‘강화돈대’ 출간 기념 북토크를 개최한다. ‘강화돈대’는 세계 유일의 해상 방어시설인 돈대가 세워진 배경과 기원, 이에 얽힌 설화 등을 담은 책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이상엽이 2015년부터 강화도의 돈대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사진과 글을 모았다. 북토크에는 책의 저자인 이상엽 작가와 오동진 영화평론가가 참석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북토크 참여 관련 자세한 사항은 강화뉴스로 문의하면 된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모든 건 다 그놈의 퍼센티지(%) 때문이다. 시청률, 청취율, 지지율, 취업률, 자퇴율, 퇴사율, 할당률, 가입률, 방어율 등등 그저 ‘율율율’하는 세상 탓이다. 모든 걸 다 정량평가로만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성평가는 사라진지 오래됐는데 특히 교육분야가 그렇게 됐으며 그건 대략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며 영어 발음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부 장관 기자회견 때부터 수상한 분위기가 감지됐었다. 정량평가(定量平價)는 양을 중심으로 한다. 무조건 실적 위주다. 이에 비해 정성평가(定性平價)는 내용과 가치를 중시하는 평가다. 모든 게 다 정성적이어서도 안되지만 모든 게 다 정량적이어서도 안 된다. 특히 정량평가로만 기울어 있는 사회에서는 결과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모든 걸 다 수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정주리 감독의 의미 있고 인상적인 작품 ‘다음 소희’는 바로 그렇게 정량평가화된 사회가 자행하는, 그 안에서 기생하는 무한대의 관료주의가 빚어내는 비극과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한치의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긴장을 이어 나가게 한다.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치고 이야기의 직조(織造) 방식이 꽤 촘촘하다. 형식은 비상업적인데 내용 흐름은 상업적으로 짰다. 이 영화가 비상한 스타일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이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는데, 1부는 취업 준비생 소희(김시은)의 이야기 그리고 2부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이야기이다. 총 138분의 러닝 타임 동안 두 인물의 스토리는 거의 반반 씩을 차지한다. 소희의 얘기가 조금 더 길긴 하다. 두 인물은 딱 한 번 겹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잠깐 그런 생각이 스친다. 이게 상업영화였으면 배두나의 첫 장면을 영화의 맨 앞단에 배치한 후 형사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좇는 구조로 짰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빈번한 플래시 백으로 관객들을 혼란으로 모는 척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욱 높이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소희’는 마치 영화 두 편을 시간 순서대로 이어 붙이듯 찍고 편집했다. 그건 사건의 전개 뿐 아니라 그 원인과 근인 모두를, 그러니까 정량적이 아닌 정성적으로, 가능하면 자세히 보여 주고 앞일에 대한 책임을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다 명료하게 보여 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주리 감독이 상업영화적 방식과 그 장르적 특징을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런 이야기 구조를 밀어붙였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의 차별적 경쟁력이다. 영화는 종종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지만 또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다음 소희’는 전체 구성을 짜면서 내용의 강약과 리듬이 결정된 작품이다. 그 선택이 놀랍게 느껴진다. 소희는 상업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이다. 오프닝 장면은 소희가 한 허름한 연습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한창 춤을 추는 모습을 담았다. 음악은 묵음이다. 관객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대신 아이가 구르는 발소리, 바닥에 몸을 구르는 소리들만이 이어진다. 오로지 스스로에게 열중해 있는 소희의 모습이 담긴다. 땀을 뻘뻘 흘리고 스스로에게 만족해 연습을 끝낸 후에는 푸드 파이터 개인 유튜브를 하는 친구와 곱창을 구워 먹기도 한다. 식당에서 자신들을 비웃는 남자 둘에게 거침없이 시비를 걸고 몸싸움까지 할 정도로 소희는 다분히 욱하는 성격이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서 소개한 한 통신회사의 콜센터에 인턴으로 나가게 된다. 소희 인생의 지옥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소희에게 신신당부한다. 학교가 어렵게 일을 잡아 준 만큼 절대로 사고 치지 말라고. 네가 사고를 치거나 일을 조기에 그만 두면 학교의 취업률이 낮아지고 취업률이 낮아지면 다른 회사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는 데다 (“누가 우리 학교 애들을 데려가겠니?”) 교육부로부터의 재정 보조금 지원이 끊긴다고. 실제로 이 교사는 이후 소희에게 이렇게 고함을 지른다. “너 하나 때문에 취업률이 낮아지면 이 회사에서 다시 우리 학교에 인력 지원 요청하겠어? 너는 지금 후배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거야!” 콜센터의 지옥은 예상대로 진상 고객들부터 시작된다. 콜센터 직원들은 대체로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을 하는 사람들의 ‘짜증받이’가 된다. 욕을 듣기도 하고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다음 소희’는 우리 사회의 ‘갑질’에 대한 비판을 주요 테마로 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입률이나 방어율 같은, 그 비율과 그 비율이 자행하는 관료주의에 대해,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얘기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인턴사원 소희는 출근한 지 며칠이 안 돼 바로 이 퍼센티지의 노예로 전락한다. 고객 중의 한 명이 인터넷을 끊거나 다른 통신사로 ‘말을 갈아타거나’ 휴대폰 가입을 해지하거나 하면 난리가 난다. 그러면 콜센터에서는 이 사람을 두고 소위 ‘뺑뺑이’를 돌린다. 이리저리 담당자를 바꿔 가며 새로운 조건을 듣게 하고는 가입 취소를 취소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방어’이고 그게 쌓인 것이 방어율이다. 소희는 온갖 수모를 당하며 일을 배워 간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 줬던 팀장(박우영)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오히려 악바리로 방어율을 98% 선까지 끌어올린다. 우수사원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월급은 112만 원. 계약서에는 인센티브를 준다고 돼 있지만 다른 항목에는 ‘인턴인 경우에는 지급시기를 조정할 수 있다’로 돼 있다. 소희는 점점 절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 조직 내 모든 장들, 팀장과 지점장, 본사 직원 등을 비롯해 학교(교감, 장학관들)조차 수치를 올려야 한다며 하급 직원이자 아직 고등학교 학생인 소희를 압박한다. 소희는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중에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해결하려 애쓰는 여자 형사 유진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다. 경찰들조차 늘 막대그래프에 입각한 사건 해결율, 범인 검거율 같은 것에 매몰된 조직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 전체에 그래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학교 교무실 벽에도, 장학사 사무실에는 더욱더 크게, 콜센터 벽에는 하루하루의 개인 방어율과 그에 따른 지점별 성과 그래프 등. 영화 속에 난무하는 그래프의 이미지가 지금 한국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돼 있으며 또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 어떻게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실토한다. 영화는 점점 더 소희가 겪고 있는 그리고 형사 유진이 동조하고 있는, 그 끔찍한 마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만든 위대한 경제학 개념인 ‘노동의 소외’는 비단 찰리 채플린이 묘사한 컨베이어벨트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소외란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노동의 결과물, 곧 그 상품으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이다. 값싼 임금의 노동자는 자기가 만드는 상품조차 구매할 수 없는 경제상황이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나사 조이는 일을 하는, 영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 신세와 같다. ‘다음 소희’의 소희는 고객 응대를 하고 고객에게 이런저런 상품을 파는 중개자 역할로 회사조직의 영업에 일조하지만, 돌아오는 월급은 허구한 날 야근에도 불구하고 112만 원이다. 이런 식이라면 한국식 자본주의에서 쉽게 살아가지 못한다. 궁핍 자체가 문제이기에 앞서 궁핍의 사회학이 만들어내는 모멸감과 좌절감, 차별받는 느낌, 사회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소외된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형 노동의 소외는 바로 이런 것이다. 형사 유진은 소희가 겪었던 그 모든 일에 대해 분노한다. 화를 내는 그녀를 향해 학교 교감이든 장학관이든 늘 하는 얘기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쥐꼬리만 한 보조금이라도 받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잖아요.” 장학관의 말은 더 걸작이다. “일개 지방 장학관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자, 어쩌시겠어요? 다음에 어디로 가시렵니까. 교육부요?” 자, 그렇다면 다음 소희는 누가 될까. 소희 다음엔 또 어떤 어린 청춘이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관료주의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을까. 지난해 있었던 이태원 참사와 그 진상조사 과정도 결국 그 같은 관료주의의 끝판왕이 아니었을까. 영화 ‘다음 소희’는 놀랍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 작품이다. 다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답을 알게 된다. 영화는 종종 문제를 던진다. 하지만 그 답은 스스로 알아서 찾으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소희’는 사람들이 답을 알고도 침묵하고, 답을 알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 봐 그것이 심히 걱정돼 아예 답을 정확히 알려 주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는 작품이다(형사 유진은 교감의 면상을 한 대 때려 붙인다). ‘다음 소희’는 그렇게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그 사회정치적 태도가 돋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이다.
영화 ‘교섭’은 일종의 ‘팩션’이다.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가져 오되 그것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픽션을 가미했다는 얘기다. 이런 팩션은 사실, 기획과 연출이 줄타기의 경지를 보여 줘야 하는 작품일 경우가 많다. 팩트(fact)를 어디까지 바꿀 것이냐 혹은 그 팩트를 어디까지만 보여 주는 것이 좋으냐를 놓고 매우 정교하게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교섭’은 몇 가지 지점에서 여러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사실을 영화로 만들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발생했던, 경기도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에 대한 아프간 탈레반의 납치 사건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샘물교회를 깊숙이 다루지 않는다. 기획 단계에서(특히 기획자들의) 불필요한 종교 논쟁을 피하겠다는 의지가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극중 인물을 통해 두어 마디의 대사로 이에 대한 연출의 태도를 드러내는 정도다. 아프간 통역사 카심(강기영)은 이런 말로 짜증을 낸다. “그러게 (저 인간들은) 왜 이런 데를 와 가지고서는.” ‘교섭’이 보여주는 이 소극성은 사회정치적, 무엇보다 종교적 논쟁의 절충점을 찾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그 고심은 이해가 가지만 이 영화가 지닐 수 있었던 긍정적 폭발성을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잠재웠다는 점에서 영화 전체의 족쇄로 작용한다. 팩션 드라마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명확하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중립이란 어쩌면 그저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다. 중립은 있을 수 없다. ‘교섭’이 요르단 올-로케이션에 여러가지 미덕을 지닌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점이 잘 살지 않는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일부 대중관객들의 반응 중에는 ‘교섭’을 두고 재미가 없다. 긴장감이 떨어진다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영화는 서사 구조와 스텍터클 신이 비교적 정교하게 짜여 있는 작품이다. 서스펜스의 고조도 계산된 강도로 진행된다. 예컨대 주인공인 외교부 기획조정실장이자 교섭관(황정민)이 납치의 주범인 탈레반 지도자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 장면 같은 것이 그렇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한미 공조를 통해 미군의 공군 폭격을 유도하며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한다. 탈레반의 은신처 바깥에서는 폭격과 굉음이 이어지고 안에서는 탈레반이 들이미는 총구의 위협이 이어진다. 이건 진짜일까? 진짜가 아니더라도 진짜처럼 찍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진짜처럼 느껴진다. 고답적인 연출 장면이지만(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진짜이든 그렇지 않든 진짜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에서 연출력, 연기 모두가 돋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교섭관 옆에서 그와 경쟁하는 동시에 그를 돕는 국정원 요원(현빈)이 인질 협상 사기단을 상대로 액션을 펼치는 장면은 다소 지나치게 인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건 다분히 현빈을 위해 연출이 의도적으로 만든 픽션이다. 실제로 그런 총격전, 액션 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적 접근상 그 같은 스펙터클 장면 하나 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윤색은 용서가 된다. ‘윤색의 윤리학’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임순례의 정치적 태도가 밋밋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감독 스스로가 상당 부분 의도했다는 점에서, 영화 전체마저 밋밋하게 보이게 하는 치명적 한계점을 보인다. 임순례 감독은 평소의 뚝심 있는 태도와 달리 이번엔 다소 보신주의적 입장을 나타낸다. 임순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점이 기이하게 보일 정도다. 투자와 배급을 맡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전작 중 하나가 ‘헌트’였다. ‘헌트’를 생각하면 ‘교섭’은 매우 몸을 낮춘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른바 샘물교회 피납 사건은 명백히 종교적 이기주의가 낳은 참극이었다. 강성 무슬림의 근원지인 탈레반 지역인데다 테러 발생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무지가 낳은 비극이었다. 샘물교회 측 교인 23명은 세 차례에 걸친 정부의 간곡한 경고와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몰래 제3국을 거쳐 아프간에 잠입했으며, 피납 11일 만에 정부의 인질 협상에 의해 구조됐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사 등 두 명이 살해됐다. 샘물교회 측은 교인들이 극적으로 구조된 이후 정부가 출국금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며 일종의 직무유기로 고소하기까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종교적 광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샘물교회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짜증에도 불구하고 당시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무능으로 공격하기 바빴다. 두 명이 살해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테러 집단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제1원칙을 어긴 점 때문에 사건 정리를 변변한 수준에서 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인질 석방을 위해 탈레반 측에 막대한 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에서는 교섭관이 5000만 달러 요구를 2000만 달러에 협상을 성공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지금 돈으로 247억원 정도가 된다. 그런 팩트도 이 영화가 당시 사건을 심도 깊게 다루지 않은 ‘불편한 진실’의 한 축이다. 무엇보다 2007년의 샘물교회 사건이 2004년 한국 민간인이었던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저항 반군에 의해 납치 참수된 사건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당시 중동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급박했던 분쟁사를 이야기의 줄기 중 하나로 다루지 않은 것도 ‘교섭’이 보여 준 아쉬운 점 중 하나로 거론된다. ‘교섭’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고난이도 첩보 정치 스릴러였을 것이다. 예컨대 스티븐 개건이 만든 2005년작 ‘시리아나’나 2008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바디 오브 라이즈’ 처럼 예민한 국제정치의 역학이 그려지는 드라마로 예상했었을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샘물교회 사건의 민감한 이슈, 그 역사성을 희석시키고 둔감하게 만들며 비교적 범상한 버디 영웅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데 주력한 것처럼 보인다. 일부러 잘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임순례로서는 가장 후일담이 많은 필모그래피의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지나친 폄훼는 온당치 않아 보인다. 영화는 그렇지 않은 척 사실은 그것이 다루는 주제와는 별개로 그것이 구현되는 시기의 정치사회적 공기(空氣)에 영향을 받는다. ‘교섭’은 지금처럼 굴절된 사회 분위기를 상대로 민감한 역사 이슈를 놓고 진짜 ‘교섭’에 애를 쓴 흔적을 보인다. 가장 근접해 있는 현대사에 대한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영화다. 특히 우리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교회 문제를 이슈화 한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종교에 대해 국가가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작품은 그런 문제 인식의 시발(始發)이지 착지가 아니다. ‘교섭’은 민감한 주제를 볼만한 드라마로 안착시킨 영화이다. 그 정도면 됐다. 영화가 어디 신이겠는가.
이해영 감독의 야심작 ‘유령’이 비교적 개봉 초기부터 꺾어진 데는 사람들이 가능한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칭찬이든 욕이든 영화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노이즈 마케팅도 처음엔 도움이 된다. 영화가 안된 것을 보니 그 어느 쪽도 아니었던 셈이다.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는 영화가 비교적 졸작이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가 않고 그보다는 뭐랄까, 지나치게 젠 체를 한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을 줬다. 이 영화는 독립운동 얘기다. 그중에서도 테러리스트들의 얘기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얘기다. 이런 영화는 사람들이 쉽게 미워하지 못한다. 근데 뭐랄까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약간 혀를 차게 하는 느낌이다. 영화 속 테러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너무 멋이 들렸다고 해야 하나, 역사적 사명감의 스노비즘 같은 것, 그 이상한 속물성 때문이다.(이준익 감독이 제작했던 2000년도 영화 ‘아나키스트’도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실패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을 갱스터 영화처럼 꾸민 것은 영화가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해영 감독은 1930년대를 유희의 공간처럼 여겨지게 끔 찍었는데 그게 결국 패착이었다고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박차경(이하늬)이 묘령의 여인 난영(이솜)과 담배 불을 나누는 곳이 마를렌디트리히 주연의 영화 ‘상하이 특급’ 간판이 그려진 극장 앞이다. ‘상하이 특급’은 1932년작이다. 근데 영화 속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신임 총독이 문화통치를 천명하느라 유령의 테러 조직인 흑색단을 공공연하게 수색하거나 탐문하지 않으려 한다. 여기서부터 일단 시대의 코드가 맞지 않는다. 1932년이라면 만주사변 직전의 해이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가는 길목이다. 다시 무단통치로 가는 때이다. 여러 가지 실제 사회 상을 영화적으로 일그러뜨려 놨다는 얘기다. 이런 부분에서부터 영화가 턱 막힌다. 오히려 영화의 최대 장점은 일본 순사인 무라야마 준지(설경구)란 인물이 가져온다. 그는 조센징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반만 일본인인 경무국 간부다. 그는 일본인 장군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직접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출신 성분 때문에 좌천된 상황이며 그렇기 때문에 호시탐탐 복귀를 노리는 중이다.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는 그런 그의 경쟁자이다. 무라야마는 경성에 들어온 유령을 체포해 공적을 올려야 한다. 하지만 유령을 잡으려는 자가 오히려 더 거물인 유령일 수도 있다. 그건 마치 프랑스 비시 정부에서 독일군 앞잡이 노릇을 했던 프랑스 장군이 사실은 레지스탕스가 심어 놓은 스파이였다는 것과 같은 식이다. 무라야먀도 겉으로는 독립운동가들을 잡아서 고문하는 쪽이지만 사실은 더 큰 거사(총독 암살)를 위한 위장일 수 있다. 이해영 감독의 ‘유령’이 만약 그 같은 플롯이라면 꽤나 흥미로운 반전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경구의 정체는 비교적 일찍 드러나지만 설경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교적 마지막까지 그에게 희망을 걸게 된다. 진짜인지, (이중 스파이어서) 그러는 척하는 것인지, 무라야마는 영화 속에서 줄곧 이런 얘기를 한다. “아직도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하는 헛된 희망을 가진 자가 있다. 틀렸다. 조선은 결코 독립하지 못한다. 영원히 일본 천황과 함께 내선일체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못하든 1930년대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일본이 러시아도 이기고 이제 만주도 차지하고 곧 중국도 이길 판이다. 누가 감히 일본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암살자 유령이 소속된 흑색단이?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의 명장면도 의외로 배신자의 고백에서 나온다. 최대의 밀정이었던 염석진(이정재)은 저격수 안옥윤(전지연)과 명우(허지원)에게 처단당하기 직전 이렇게 말하며 애걸한다. “내가 조선이 정말 독립이 될 줄 알았겠는가. 그때 그걸 알 수가 있었겠는가”라고. ‘암살’과 ‘유령’이 보여주는 흥행의 갈림길은 그런 역사적 패배주의에 맞서는 사명감의 진정성이다. ‘암살’의 안옥윤이 겪게 되는 비련(하와이 피스톨, 하정우가 그녀를 두고 죽는 것)과 그녀의 동지 속사포(조진웅)와 황덕삼(최덕문)의 희생은 멋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멋있는 것이었다. 영화 ‘유령’에서 암약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서는 바로 그런 분위기가 떨어진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진정성의 근거가 다소 불분명하다. 관객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그 지점이다. 독립운동의 행동동기들은 다소 인공적이고 억지스러운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반(反) 독립의 설법은 오히려 내추럴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래서는 궁극적으로 악이 이기는 세상이 된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영화 ‘유령’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시대를 그대로 묘사하려 했지만 서사를 촘촘하게 엮어 내는 능력이 부족해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유령’에서 유령을 잡으려고 설치는 자처럼, 그리고 영화 ‘암살’에서 밀정인 염석진처럼, 지금도 주변이 온통 부역자 천지이다. 변절한 지식인들 천지이다. 지식인의 본산인 언론이 그렇고 대학이 그렇다. 변절자들이 점점 승승장구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래선 이기지 못한다. 변절한 지식인들의 수를 줄이거나 없애지 않는 한 시대는 바뀌지 못한다. 영화 ‘유령’의 마지막 장면처럼 잔뜩 멋만 부려서 될 일은 안될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1930년대 일본 식민지 시대를 빼닮았다. 영화 ‘유령’이 낱낱이 보여 준 대목이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로나마) 속시원하게 시대적 해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영화 흥행이) 실패한 이유이다. 이래저래 답답한 시절이다. 영화도 답답하고 시대도 답답하다.
아마도 국세청 조세과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매우 중요하다) 에이미 커(나오미 왓츠)는 요즘의 삶이 만만치 않다. 그건 순전히 남편이 1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탓인데, 에이미 커는 아직 초등학생인 딸 그리고 이제 반항기에 들어선 고등학생 아들 노아(칼튼 곱)와 일상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에이미는 오늘따라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아들의 이불보를 걷어 내 깨운 후 이런저런 짜증을 가라앉히려 조깅에 나선 참이다. 그런데 조금 뛰기만 하면 전화가 울린다. 오늘 나가지 않겠다고 연락한 사무실에서 동료인지 누군가가 서류 파일을 찾는다며 전화가 오고,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친정 엄마는 몇 시간 후면 비행기로 도착할 것이라며 곧 만나자고 연락이 온다. 여느 자식이 그렇듯 에이미 역시 약간 짜증을 덧붙여 상대를 한다. 그래도 학교에 간 딸아이가 전화해 자신이 그린 공룡 그림을 갖다 달라고 하자, 이번엔 하등 귀찮을 게 없다는 양,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전화를 걸어 그림을 찾아가겠다는 통화를 한다. 그 와중에 아들의 친구 엄마, 곧 같은 학부모에게 전화가 오는데 아들 노아가 요즘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시달린다는 얘기를 전한다(이 얘기도 나중에 꽤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아무튼 에이미 이 여자, 도무지 맘 놓고, 시원하게 달릴 시간이 없다. 엄마는 바쁘다. 엄마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세상의 엄마란 다 그렇다. 거기까지만 해도 좋다. 그 정도라면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에이미의 휴대전화에 곧 재난 경보가 울린다. 노아가 다니는 학교에서 무슨 사고가 났다는 것. 그리고 곧 그 사고가 총격사고임을 알게 된다. 에이미는 충격에 휩싸인다. 에이미는 오늘따라 조깅을 좀 멀리 나왔다. 숲 속 깊이 들어왔다. 집에서 8㎞의 거리다. 걸어서 40분 정도. 에이미는 냅다 달리기 시작하지만 급한 마음에 다리를 접질리고 절뚝절뚝, 비틀비틀 아이의 학교를 향해 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911 요원, 경찰과의 빗발치는 전화에서 청천벽력의 얘기를 듣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이, 노아가 총격사건의 용의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엄마 에이미는 제시간에, 그러니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극장에 잠깐 걸렸다 곧바로 사라진, IPTV에서 볼 수 있는(현재 1만 1000원) 영화 ‘패닉 런’의 원제는 ‘더 데스퍼레이트 아워(The desperate hour)’이다. 절망의 시간이다. 목숨이 경각의 위기에 처한 아이를 향해 뛰어갈 때 엄마의 마음은, 당연히, 지옥이다. 쇼크와 절망의 시간이다. 기이하게도 이 외국 영화를 보면서 지난해 우리에게 벌어진 이태원 참사가 자꾸 떠오르는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 영화는 대놓고 소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현재 ‘숨어 있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매우 절묘하고 영리하게 찍었는데 모든 서사는 엄마 에이미 커의 시선으로만 처리된다. 그러니까 영화의 이야기 전부가 엄마의 조깅 길에서 전해지는데, 바깥에서 펼쳐지는 연옥도는 그녀의 휴대전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달리면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속보를 찾아보며 아들에게 끊임없이 통화를 시도하고 급기야는 범인의 윤곽까지 알아내게 된다. 영화의 동선은 단 하나, 그녀가 달리는 길이다. 당연히 영화 속 인물 대개가 휴대전화 영상으로 보이거나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오로지 중심인물은 엄마인 에이미 커 뿐이다. 이런 설정으로 영화는 급박한 상황의 액션 시퀀스를 구축해 낼 수 있을까. 영화 ‘패닉 런’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 러닝 타임 83분 동안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영화는 몇 가지의 상황과 장치를 심어 놓는다. 일단 주인공이 뛰는 것이다. 그녀는 과연 잘 달릴 수 있을까. 게다가 그녀는 중간에 길을 잃는다. 급한 마음에 우버 택시를 부르는데 주변 모든 도로가 이미 철저하게 통제가 된 터라 택시와 에이미가 만나는 게 쉽지 않다. 거기에 경찰과의 전화 통화가 에이미의 상황을 급변한다. 경찰은 그녀에게 집에 총기를 갖고 있는지, 최근 아들에게 심경의 변화 같은 것이 감지됐는지, 아들이 엄마 모르게 총기나 탄약을 구입한 흔적은 없는지 등을 묻는다. 경찰은, 어느 나라 경찰이 모두 그렇듯, 자신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만을 묻고, 정작 부모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를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에이미는 아들이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학교에서의 왕따를 당하게 되면서 가공할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때 그녀는 오히려 냅다 달리던 발걸음을 늦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들 노아를 저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 영화를 만든 필립 노이스 감독은 그때마다 드론 카메라를 이용해 시점을 하늘 위로 올려 보낸다. 익스트림 부감 숏을 구사하는데 에이미가 저 하늘 밑 빽빽한 숲 속 한가운데에 완전히 홀로 고립돼 있음을 보여 준다. 아이를 잃었거나, 잃게 되는 순간에 있는 어미의 마음이 저럴 것이다. 신이 굽어보고 있다 한들 저 여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저 여인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할 도리가 없다. 어쩔 것인가. 세상의 끝에 다다른 느낌일 것이다. 액션이 전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우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러닝 타임이 비교적 짧은 것도 군더더기를 쳐냈기 때문이다. 사건은 단 두 시간, 그러니까 대략 9시에 발생해서 11시 정도에 종결된다. 그 앞뒤의 구차한 얘기는 과감히 삭제하고 사건 본체에만 집중했다. 가족의 단란했던 삶은 플래시백의 장면 몇 컷으로 처리했다. 다른 일상의 모든 관계는 휴대전화 안, 유선 속에 가둬 놓았다. 주인공 에이미를 이렇게 저렇게 돕는 사람들, 사건 현장에 가까이 있는 카센터 직원, 911 통화 요원, 나중에 에이미를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택시 기사들과의 이야기들도 최소화시켰다. 그것 역시 미뤄 짐작하기에 충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엄밀히 보면 아들이 처한 학교 내 총격사건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겪게 되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속 지옥도이다. 그 휘몰아치는 격랑의 파도와 광풍이 이 영화가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이고 진정한 공포이자 서스펜스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엄마가 알고 보면 시시각각 아이들이 처한 위기, 처할 수 있는 위기 때문에 살얼음판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아이가 학교에 가는 것조차 위험해진 사회가 됐다. 이것이 정상이냐고 영화는 묻고 있다. 도대체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올바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냐고 영화는 항변한다. 필립 노이스 감독은 호주 출신이다. 그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인기를 모은 것은 ‘솔트’이다. 초창기에는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명령’ 같은 첩보영화로 유명해졌다. ‘본 콜렉터’ 같은 연쇄살인마 얘기의 영화도 그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중영화에 앞서 그는 호주 원주민들의 지난한 삶을 그린 ‘토끼 방호 울타리(Rabbit Proof Fence)’ 등의 작품으로 자신의 사회의식이 남다름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패닉 런’은 그가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여자 한 명의 이야기로 세상 전체의 상황을 보여 준다. 연출의 힘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을 과시해 낸 셈이다. 이태원 참사를 예견한 듯한,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아이들 엄마와 아버지의 심경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주인공 에이미는 아들을 향해, 그녀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되뇐다. ‘엄마가 간다. 엄마가 가고 있어. 엄마가 가서 구해 줄게’ 그 말을 마다 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패닉 런’은 기이한 시기에 나온 기이하면서도 기발한 작품이다. 선뜻 이 영화를 권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것 역시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평군 용문면(면장 권용진)은 17일 육군 제6796부대(부대장 오동진)와 민·관·군 복지증진 및 용문 지역발전을 위한 상생발전 협약을 체결 헸다. 이번에 협약을 체결한 육군 제6796부대는 용문면 금곡리에 위치한 부대로 면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적극 협조해 오던 부대다. 이날 협약의 주요 내용은 ▶복지증진을 위한 각종 행사나 지원 상호 협력 ▶재난발생시 신속한 복구 및 구호활동 상호협력 ▶안보의식 고취 지원활동과 안보체험에 상호협력 ▶문화·체육활동에 대한 상호협력 ▶기타 상호 협의에 따른 사업에 대한 상호 협력 등이다. 오동진 대대장은 "오늘 상생발전 협약을 통해 용문면사무소와 좀 더 긴밀하게 협조체계를 구축하겠다"며 '신속한 재난복구와 구호활동을 통해 안전한 용문을 조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권용진 용문면장은 "항상 우리 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주시는 오동진 대대장님을 비롯한 부대원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상호 협력을 통해 지역을 발전시켜 활력 있는 용문면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한편육군 제6796부대를 비롯한 면내 기관단체들은 오는 19일 구정을 맞이해 고향 방문객을 맞기 위한 설맞이 대청소를 실시할 예정이다. [ 경기신문 = 김영복 기자 ]
지난해 말 개봉해 1월 12일 현재 개봉 2주 만에 종영 위기를 맞고 있는 ‘젠틀맨’은 사실 매우 영리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흥분할 정도의 걸작은 아니지만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할 정도의 긴장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잠깐이라도 장면을 못 보게 되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까 봐 조바심을 내게 할 정도는 된다. 꽤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제목 때문일 듯싶다. 젠틀맨이란 제목은 정작 이 영화를 도통 무슨 영화인지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 영국 신사들의 정장 느낌이 나는 영화라는 얘긴지, 그렇다면 댄디(dandy)한 남자의 로맨스 아니면 폭력 남자나 나쁜 남자가 주인공이서 그것을 거꾸로 강조하기 위해 붙인 제목인지, 도대체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곧 ‘젠틀맨’이 케이퍼 무비(caper film, 등장인물들이 무리를 지어 절도를 하거나 강탈을 하는 이야기. 최동훈의 ‘도둑들’ 같은 영화)의 스토리 구조를 따라가는 작품임을 알게 된다. 일종의 사기단 얘기이고, 영국 가이 리치가 만든 동명 제목의 영화 ‘젠틀맨’이 롤 모델이라는 셈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기꾼들이 정의감도 있고 사회적 목적의식도 있다는 얘기이다. 영화는 꽤 복잡한 배경을 갖고 있고 그걸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 노력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이 영화를 쓰고 만든 감독 김경원은 등장인물들, 특히 주인공 캐릭터를 꽤 많이 비틀어 놨다. 말 그대로 옷 잘 입고 잘 생겼으며 부드러운 성격의 젠틀맨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이건 영화광들만이 눈치챌 수 있을 텐데) 필름 누아르(film noir, 어둡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뒷골목의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를 일컫는 말. 1940년대 험프리보가트가 나왔던 ‘빅 슬립’이 대표적이다. 어두운 골목길, 비가 내리는 도시의 밤, 인물의 그림자가 즐겨 나온다)에 나오는 탐정 캐릭터로 그 느낌을 섞어 놓았다. 그래서 영화가 멋있(는 척 한)다. 영어로 말할 때 흔히들 스타일리시하다고 하는데 영화를 그렇게 디자인 해 놓았다. 주인공 현수(주지훈)의 캐릭터는 이런 류의 영화나 소설에서 최고봉이라 여겨지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탐정 캐릭터 필립 말로우에다 일본 인기만화 ‘시티 헌터’의 주인공 사에바 류를 섞어 놓은 것이다. 짐작컨대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김경원 감독이 필립 말로우보다는 칼 프랭클린이란 할리우드 감독을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영화를 보며 그의 영화 ‘블루 데블(Devil in blue dress), 1995’을 많이 떠올렸다. 근데 이런 얘기란 게 다 쓸데없는 것이다. 일반 관객들은 그런 걸 알 필요가 없으며, 관심 가질 필요도 없는 얘기이다. 그보다는 단순히 말해서 영화가 재미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영화에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할 수 있다. 대중 영화는 그 둘 다가 있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만이라도 있으면 된다. 영화 ‘젠틀맨’은 의외로, 그러니까 예상 밖으로, 둘 다가 있는 작품이다. 오히려 영화가 뒤로 갈수록 후자 쪽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건 순전히 박성웅이 맡은 전직 검사 권도훈 역 때문이고 그가 손발과 마음 모두를 받쳐 모시는(이용하는) 중앙 지검장 역(김귀선) 때문이다. 영화는 중반쯤 보는 사람들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는데 (마치 영화 ‘헌트’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서 강제로 지우게 했던 김학의 법무차관 사건을 소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트’가 아웅산 테러 사건을 수 십 년 만에 복기해 낸 것처럼)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서 매우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매우 의미심장하게 진행되기 시작한다. 감독 김경원이 무수히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학습하고 답습해 냈음을 보여 주듯, 영화는 이야기의 뛰어난 직조(織造) 능력을 과시한다. 장면 하나하나가 또 다른 장면 하나하나로 이어진다. 그 씨줄 날줄의 흐름이 매우 매끈하다. 주인공 현수는 모텔에서 장기 투숙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3류 탐정이다. 탐정이랄 것도 없다. 흥신소 직원이자 대표이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을 맡아 처리하는 하류 인생이다. 비록 모텔에서 숙식하며 살지만 몸매와 외모가 미끈하고 여성을 ‘후리고’ 울리는 플레이 보이일 것처럼 보인다. 성격도 쾌활한 편이다. 직업상이어서인지 친절하기까지 하다. 그가 자주 가는 모텔 앞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으면서 말 못하는 주인 남자와 농지거리하는 걸 보면 그가 심성이 착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류의 탐정 영화, 필름 누아르 풍의 범죄 스릴러 영화는 앞자락에 깔리는 주변의 이야기,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하찮은 척하는 에피소드가 꽤 중요하다. 그걸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데, 뒤에 가서는 이것들이 반전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탐정 현우는 어느 날 포차에서 어묵을 우물우물 먹고 일을 나간다. 고등학생을 갓 지난 정도의 웬 여자 애가 헤어진 남자친구로부터 자신의 강아지를 찾아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둘은 함께 경기도 변두리의 한 별장으로 가는데, 집 안으로 들어간 여자아이는 나올 생각을 않는다. 주변을 배회하던 주인공은 갑자기 습격을 받고 쓰러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살인 용의자로 몰리게 됐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자신을 잡은 검사에게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다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신분이 뒤바뀐 채 의식을 되찾는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주인공은 진짜 검사가 일주일 후 의식이 돌아오기 전까지 사건을 해결하고 (여자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찾아내고) 자신의 누명을 벗기로 한다. 일명 검사 사칭 수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여기까지는 그렇고 그런 탐정 소동극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권도훈이란 전직 검사가 나오고 이 인간에게 여성들을 ‘공급하는’ 루트와 깡패들이 등장한다. 또 권도훈이 (섹스를 할) 여자들을 소개하는 대상이 중앙지검장이라는 아주 높은 직책의 파워맨이라는 것, 그 중앙지검장이 늘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참회를 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 등 영화는 심상찮은 전개를 보이기 시작한다. 별장 안에서 어린 여성들에게 늘 흉측한 일들이 벌어졌으며, 권도훈은 (아마도) 주가 조작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 스위스 계좌에 이를 숨겨 놓은 채 호화로운 권력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바, 그 ‘뒷 배’가 바로 중앙지검장이라는 얘기이다. 지현수 일당, 지현수 수사 팀(이지만 사실은 뒷골목 ‘선수’들)은 점점 더 드러나는 엄청난 범죄의 윤곽에 바짝 긴장하게 된다. 근데 ‘이들’은 ‘저들’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이 모든 게 우연의 연속인 것일까. 여기에 깊고 큰 웅덩이, 음모의 배경은 없는 것일까. 영화는 대 반전의 이야기를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한다. ‘젠틀맨’은 이미 얘기한 바, 매우 영리한 영화인데 그건 이 작품이 현실 사회 정치를 비판하고 풍자하고 있는 내용이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정작 그런 얘기를 잘 숨기고 가서 그렇다는 얘기이다. 영화가 너무 현실에 붙어 있는 것을 대중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얘기가 아닌 척 그런 얘기여야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부조리 극을 꾸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것들에 통달해야 한다. 사회 정치의식도 나름 정치(精緻) 해야 하며 많은 종류의 영화 작법들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소품, 분장, 의상 등 트렌드에도 전문가적 식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조화로워야 한다. 어색한 느낌, 남의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젠틀맨’은 오랜만에 나온 꽤 괜찮은 상업영화 수작이다. 김경원은 자신이 한국의 칼 프랭클린 같은 감독임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흥행까지 하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이다. 실제 김학의 사건이 지저분하게 결론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악이 늘 이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를 제대로 알리고 홍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놓고 선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의 운명은 종종 현실의 무게감이 짓누르는 편이다. 아까운 영화 한 편을 잃은 셈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할 뿐이다.
넷플릭스의 오스트리아 6부작 드라마 ‘우먼 오브 더 데드’의 주인공 블룸(안나 마리아 뮈에)은 직업이 장의사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하도 시체를 많이 봐서인지 살면서 그리 무서운 것이 없다. 성격도 냉랭한 편이다. 말하는 것도 남을 배려하거나 하지 않는다. 도무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지만 오직 한 사람, 곧 남편 마르크(막시밀리안크라수스)에게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마르크는 아침 출근길에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 광경을 블룸은 두 눈 뜨고 지켜보게 된다. 블룸은 차차 남편의 사고가 의도적이었으며 누군가, 어떤 집단이 남편을 살해했음을 알게 된다. 블룸의 가혹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원래 이런 류의 자경단(自警團) 영화는 (그 이름도 추억에 젖게 만드는) 찰스 브론슨의‘데스 위시’ 시리즈가 원조였다. 아내를 살해하고 딸을 강간해 죽인 범인들을 찾아 일일이 응징하고 죽이는 중년 남자 폴 커시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형편없었으며 찰스 브론슨의 대표작 ‘빗속의 방문객’, ‘원쓰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황야의 7인’ 등에 비해 그의 명성을 몇 단계 떨어뜨리는 작품이었지만 오히려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찰스 브론슨은 이 영화로 일약 세계적 인지도의 대 스타가 됐다. 사람들은 그의 복수에 열광했다. (특히 남자는 뉴욕의 전형적인 화이트 칼라였다는 것이 환호의 이유가 됐다.)이 영화의 인기는 1편이 1974년에 만들어진 후 5편이 만들어지는 1994년까지 20년간 계속됐다. 찰스 브론슨은 그 10년 후인 2003년에 죽었다. ‘데스 위시’ 시리즈의 명성은 2018년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을 정도다. 공권력의 행사, 엄정한 법 집행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들의 얘기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은다는 것은 거꾸로 그 사회의 내부가 심히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데다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신을 사고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시즌 드라마 ‘우먼 오브 더 데드’의 주인공 블룸도 경찰을 향해 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한다. 당신들 수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냐며 소리 지르고 힐난하기 일쑤다. 실제로 경찰은 별반 미동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남편은 경찰이었다. 블룸짐작으로 남편은 어떤 조직적인 범죄의 뒤를 쫓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먼 인 더 데드’에서 보이는 블룸의 복수극은 기이한 특징을 지닌다.‘찰스 브론스 시절’에는 상대가 아무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계산과 고려가 앞세워졌다. 주인공이 상대를 죽이기까지, 그 개연성, 그러니까 주인공이 벌이는 또 다른 살인의 이유와 명분을 앞자락에 이렇게 저렇게 많이 깔아 놓는다. 그런데 ‘우먼 인 더 데드’는 그렇지가 않다. 그게 이 드라마의 유별난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블룸의 복수극은 실로 가차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일말의 고려가 없다. 고민 따위는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 응징을 당하는 인간들이 정말 나쁜 놈일까, 그런 놈들의 수장 급에 해당할까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 정도다. 특히 동네 신부에게 휘발유를 들이붓고 그를 불태워 죽이는 장면은 여주인공 블룸이 나가도 조금 너무 나가는 가 아닌 가 싶을 정도다. 그런데 찰스 브론슨의 영화가 197,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이 드라마 역시 요즘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모양이다. 유럽에서나 한국에서나, 세계 그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다는 얘기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삶에 내몰리고 있다. 끝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과 원칙, 공정한 사회란 구호만 앞세우는 건 실로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얘기이며 법과 원칙은 일부 소수의 권력자들 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조사는 무슨 얼어 죽을 조사. 사람들이 듣는 것은 그저 몰랐다 아니면 (내 책임이) 아니다는 말 뿐이다. 이러니 유가족들이 피를 토할 수밖에. 게다가 유가족들의 뒤에서는, 심지어 정면에 대고 ‘자식의 시체팔이를 해서 보상금을 벌려고 한다’며 미치광이 집단이 야유까지 보내고 있는 마당이다. 유가족들의 마음속에서는 응징과 복수의 마음이 싹틀 것이다. 얼마나 그들을 죽이고 싶겠는가. 예전의 폴 커시나 지금의 블룸처럼 그들에게 휘발유를 들이붓고 불을 댕기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그럴 유혈극을 (바라는 대중들의 마음을) 영화나 드라마가 달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수극의 아이러니이지 역설이다. 좀 적당히들 하자. 행안부 장관도 이제 적당히 물러나고 대통령도 이제 적당히 진심 어린 사과를 하자. 아이들 죽은 걸 두고 자존심 싸움을 내세울 때인가. 일국의 지도자가 그러면 되겠는가.
미국 메이저 영화사인 유니버설 배급작품임에도 극장 개봉에 실패하고 IPTV로 직행한 ‘부활’은 레베카 홀과 팀 로스 등 스타급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이다. 감독은 생소하지만 두 배우의 인지도만으로도 충분히 손이 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아마도 이 영화의 마케팅을 맡았던 사람들은 요령 부득, 극장 개봉을 포기하게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갖게 된다. 영화 내용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매기(레베카 홀)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데이빗 모스란 남자(팀 로스)는 어떤 인간일까. 악마일까. 그냥 그저 그런 악한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범죄 스릴러 장르를 많이 본 사람들은 으레 생각하는 결말이 있다. 남자의 존재는 알고 보면 허구라든지, 모든 게 다 여자가 보는 허상이나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든지, 이 모든 사달은 정신병적인 측면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맨 마지막 장면은 병동 창살 안에 갇힌 주인공의 멍한 표정이 나올 것이라든지 등등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쪽이다. 그래서 더욱더 ‘정말?’하는 심정이 된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이 영화의 제목을 퍼뜩 떠올리게 될 것이다. 부활?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고 과연 누가 부활한다는 것일까. 매기는 생물 공학자이다. 관련 회사의 중역이다. 그녀는 여자 인턴 그윈(안젤라 웡 카보네)에게 인생 상담을 해 줄 만큼 회사의 이사로서 다방면의 업무에 활동적으로 임하며 살아간다. 18살 딸이 하나 있는데 미뤄 짐작하건대 현재 마흔 한 살이거나 마흔 살이다. 매일같이 비교적 격렬하게 조깅을 하고 엄격하게 일상을 관리한다. 나름 성욕도 강한 편이어서 회사 내 유부남 애인과 틈틈이 섹스를 즐기는데 아마도 그건, 그것을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라고 생각해서인 듯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일상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한 남자가 자신 앞에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19년 전, 18살 때 만났다가 19살에 남자 아이를 낳고 도망쳐 나온 관계로 설명된다. 이 설명은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던 매기가 인턴 그윈에게 독백처럼 고백하는 장면에서 이뤄진다. 레베카 홀은 이 장면을 5분 넘게 원 숏으로 홀로 대사를 이어 나간다. 레베카 홀이 출중한 연기력의 배우임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문제는 매기가 영국에서 (나이 차이가 스무 살 정도 나는) 데이빗을 만나 정신적으로 심각한 학대를 당했다는 것. 여자가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그녀가 오로지 남자인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충성하게 하기 위해 중절을 시키려 한 것 등 과거의 일이 심각해도 너무나 심각했다는 것이다. 더 끔찍한 일은 결국 남자 아이가 태어났고, 벤이라고 이름까지 붙였음에도 어느 날 매기가 마트에 갔다 온 사이 데이빗이 그 아이를 손가락 두 개만 남겨 놓고 ‘먹어 치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1년 넘게 데이빗에게 완벽하게 가스라이팅을 당해 살아가던 매기는 이 사건으로 정신을 차리고 돈과 트럭을 훔쳐 달아나 지금의 미국 뉴욕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 그녀의 비극적인 사연이다. 근데 정말 이 일이 사실일까.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가스라이팅과 학대를 다루는 이야기는 영화에서 꽤 자주 등장했다. 이 영화 ‘부활’ 역시 남자가 신생아를 ‘먹었다’는 쇼킹한 얘기를 빼면 이런 류의 영화가 갖는 트루기(이야기의 전개 방법, 방식)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편이다. 멀게는 줄리아 로버츠의 1991년 출연작인 ‘적과의 동침’과 유사하다. 조금 확대 해석하면 ‘적과의 동침’에서 탈출에 성공한 여자 앞에 남자가 다시 나타나 벌이는 새로운 학대 극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부활’의 매기 역시 새롭게 전개되는 남자의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나타난 남자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여자에게 말한다. “벤을 데려 왔어. 이 안에 벤은 살아 있어.” 여자는 기겁을 하며 자신과 자신의 딸 애비(그레이스 카우프만)에게서 떨어지라고 소리치지만 곧 남자가 시키는 짓을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남자는 회사까지 차를 놓고 걸어서, 그것도 맨발로 출근하라고 한다. 매기는 절대 안하겠다면서 그렇게 한다. 데이빗은 또 여자에게 공원에서 새벽 2시부터 동이 틀 때까지 반성과 명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라고 한다. 여자는 내가 네 얘기대로 하면 미친 인간이라고 소리치면서도 공원에 나가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서 오로지 자신이 이러는 것은, 딸 애비가 남자에게 해코지를 당할까 봐,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자위한다. 영화는 점점 더 패러노이드(paranoid)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는 듯이 보인다. 매기의 편집증이 거의 광적인 수준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남자의 존재가 여자를 미치게 하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스치기 시작한다. 데이빗의 존재가 실재하는 것인가. 데이빗은 과거의 존재일 뿐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은 매기가 과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꾸미고 저지르는 자작극 같은 사건이 아닌가. 영화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영화 ‘부활’은 부활이란 말이 갖는 종교적 상징성의 제의(祭儀)를 물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여 준다. 그건 이성적으로는 허무맹랑할 수 있지만 여성이 가학적 남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주인공 매기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역사의 배를 가른다. 영화가 후반부에 칼부림과 난도질, 피 칠갑이 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매기는 인턴 그윈에게 나쁜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녀 자신에게 올바른 말을 하도록, 비웃거나 막대하지 못하도록 남자에게 당당히 요구하라고 한다. “그윈. 당신은 전사니까요”라고 말한다. 매기 스스로 지난 19년간 당당한 여전사가 되는 것을 꿈꾸며 살아 왔다. 그러나 정신적 트라우마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데이빗의 존재가 실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매기의 트라우마는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영화 ‘부활’은 그 트라우마, 정신적 상처를 없애기 위해 현대사회의 여성들에게 어떠한 부활 의식이 필요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올바른 여성성의 부활은 이 영화가 요구하는 것처럼 매우 전투적이고 공격적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영화의 결론에 대해서 사람들은 동의와 부정으로 엇갈릴 수 있겠다. 바로 그 ‘엇갈림’이야말로 마케터들로 하여금 이 영화의 극장 개봉을 포기하게 만든 원인이 됐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중들은 영화에 관한 한 심플하고 명쾌한, 그럼으로써 예측 가능한 결말을 원하는 경향이 높다. 마치 정치적 논란에 대해 단순한 해답을 요구하는 것처럼. ‘부활’은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소 외면을 받더라도 언젠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꼭 다시 부활할 영화이다. 장담하는 바이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저 ‘공산당 선언’은 이런 글귀로 시작해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난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 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런데 영화 ‘가가린’을 보고 있으면 공산주의는 진실로 유령이란 존재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언제부터인가 거리에서 배회조차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음을 느끼게 한다. 만국의 노동자는 모두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다. 한때 위대했던 이념의 시대는 완벽하게 끝이 났음을 알려 준다. 그 비정한 서사(敍事)가 기이하고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서정의 장면들과 시어들로 구성돼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가가린’은 가가린의 일생을 그린 것이 아니다. 가가린은 유리 가가린을 의미하는데 인류 최초로 달나라에 발자국을 남긴 구 소련의 우주 비행사 이름이다. ‘그런데, 그리고, 그래서’ 흔히들 오해하는 것처럼 영화 ‘가가린’에는 유리 가가린이 나오지 ‘않지 않는다’. 제목만 ‘가가린’이고 가가린은 나오지 않겠지 싶겠지만 가가린은 영화 초반에 보이는 기록 필름에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 가가린이 잠깐이지만 나온다는 얘기다. 영화 ‘가가린’은 프랑스 파리 외곽에 있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가가린이 철거되는 과정을 극화한 작품이다. 가가린 단지는 1963년 건축돼 2019년 재개발로 사라졌다. 57년 동안 서민들, 파리 저소득 계층이 살던 곳이었다. 처음엔 프랑스 공산당이 야심 차게 만들었다. 그래서 완공됐을 때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고 기념식수까지 했다. 1960년대 프랑스는 혁명의 시대였다. 파리는 곧 6·8 혁명으로 들끓게 된다. 공산당이 우파 정부인 드골 정권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지지세를 얻었던 때이다. 좌파연합은 의회에서 늘 다수를 차지했고 드골 내각을 위협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파리 시위에 이골이 난 대중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공산당은 분열했으며 전통적 지지 세력인 노동자들마저 이탈한다. 공산당은 대중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회가 언제나 그렇듯이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흔들린다. 그 진자의 추가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움직일 때였다. 그건 마치 아파트 가가린 단지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공산당과 공산당이 지원하던 프랑스 노동자 가족들도 모두 이곳을 버리고 떠났고, 대신 빈곤 계층들이 가가린을 채웠다. 이 가가린처럼 프랑스 공산당은 거의 철거, 아니 사멸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정책으로 많이 선회한 사회당이나 수정주의적 정당으로 흡수됐다. 노동자들은 노동 귀족화 됐거나 더욱더 빈곤해지는 양극화 전선으로 내몰렸다. 이제 아무도 공산당 선언 ‘따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다. 아파트 가가린도 노동자의 보금자리라는 상징성을 잃었고, 극도로 노후화되며 결국 철거라는 운명을 맞게 된다. 노동자들은 세계는커녕 아파트 한 채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가가린의 철거는 바야흐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던 시대는 끝났음을, 그 대가로 극도로 자본주의화된 사회에서 모두들 절대적으로 고립됐으며, 그럼으로써 이즘(ism)의 시대가 완벽하게 종언을 고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실로 구체화된 것이다. 영화 ‘가가린’의 주인공은 흑인 청소년 유리(알세니 바틸리)이다. 이 아이는 유리 가가린의 우주 인생을 동경한다. 남들은 모르게 아파트 옥상에 천체 관측소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하늘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유리는 고물상 제라르(드니 라방)에게서 이것저것을 구해 오거나 스스로 만들고 조립한 것들로 자신의 관측소를 채워 나간다. 그의 꿈을 알고 있는 것은 동네 친구 우삼(자밀 맥크라벤) 정도지만, 나중에는 터키계의 예쁜 여자 다이애나(리나 쿠드리)와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을 다니며 또래 청소년들에게 약을 팔며 살아가는 달리 같은 친구(피네간 올드필드)도 유리의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취미를 공유하게 된다. 유리의 일상은 아파트 가가린을 하나하나 고치고 수리하는 일이다. 곧 시 공무원이 나와 철거 여부를 결정짓는 심사를 하기 때문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유리는 이 아파트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고치고 복도의 형광등을 갈고 다닌다. 하지만 아파트 주민들은 공산당 마냥 분열된 지 오래다. 더 이상 이런 곳에서 못살겠으니 시 당국이 대대적인 수리를 해주든, 재개발을 하든, 적당한 보상을 받고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삼의 아버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주민이자 유리를 늘 따뜻하게 대해주는 한 이주민 출신의 아줌마(파리다 라우아디) 같은 사람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40년 전에 어느 나라에선가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넘어왔고, 추운 겨울 반바지 차림으로 가가린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녀는 유리의 부모가 이사 들어오는 것을 도왔는데, 그때 두 남녀는 ‘아주 예뻤다’고 회고한다. 유리는 그녀의 회고담을 고마워한다. 유리의 엄마는 유리를 버리고 이 단지를 떠나 다른 남자와 애를 낳고 산다. 아빠의 존재는 옛날에 없어졌다. 유리는 엄마와의 기억을 안고 청소년의 나이에 홀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특히 이 아파트가 유리 가가린의 우주선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똑똑하고 손재주가 남다른 유리는 동네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는 개기일식 날 동네 사람들을 모아 그걸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치를 만들기도 한다. 영화는 가가린이라는 아파트 공간의 상징성을 보여줄 요량으로 줄곧 부감 숏과 풀 숏을 구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유리가 환상으로 넘겨짚는 우주 공간의 상상 숏으로 이어 붙인다. 가가린 단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몰과 일출, 야경을 비교적 장관의 표정과 모습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아파트는 곧 철거될 운명이지만 거기서 살아가는 그리고 계속 살아가기를 꿈꾸는 유리와 유리 주변의 삶은 그다지 누추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환경은 비루해도 사람들의 꿈은 아름다울 수 있다.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 공동감독이 유리를 둘러싼 일상을 때론 즐겁고 흥미롭게 그리는 한편으로, 줄곧 처연한 비장미가 느껴지게 끔 그려낸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극 후반부, 아파트가 폭파 해체되는 신을 유리의 우주선이 우주로 발사되고 유리가 그 우주선 안에서 유영하는 듯한 환상 장면으로 구성한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주는 대단원의 압권이다. 바로 그 장면 때문에 칸과 로테르담, 부산영화제가 열광하고(공식 초청) 세자르 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 데뷔작 상을 준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어둡고 불행한 일상을 그려내야 한들, 영화는 미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켜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가가린’은 데뷔 감독들의 놀라운 성취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영화 ‘가가린’은 사라진 이념의 가치, 사라진 계급주의의 시대(계급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를 기리는 영화다. 언젠가 모두들 영화 속 유리가 아파트 가가린을 지키려 했던 것처럼 순수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모두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가. 어쩌면 그때가 그리워질 것이다. 그것도 몹시.
미국 미네소타주가 영하 48도라는 뉴스가 전해진다.. 미네소타라면 미시간 5대호 옆에 붙어 있는 미국 최북단 도시이다. 워낙 추운 곳이긴 해도 영하 48도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 ‘투모로우’가 현실화됐다는 얘기다. 물론 ‘투모로우’가 기후변화에 의한 재난을 그린 내용만은 아니다. 내 기억엔 이 영화는 부상(父性)의 가치,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얘기를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메릴랜드 워싱턴D.C. 밑으로 밑으로 피난을 가려할 때 아버지 잭(데니스 퀘이드)은 아들 샘(제니크 질렌할)을 구하기 위해 뉴욕주의 뉴욕인지(컬럼비아 대학이었는지) 매사츄세츠의 보스턴인지(보스턴 대학이었는지)로, 그러니까 북으로 북으로 향한다는 이야기이다. 잭의 아내인 의사 루시(셀라 워드)는 그의 북상이 죽으러 가는 길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남편을 떠나보낸다. 아들을 꼭 구해 올 것을 믿는다면서. (가서 우리 아들 구해와!, 하는 것 같았다.) 난 그 옛날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그 장면이 꽤나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당시 2004년은 9·11 테러 여파가 심했을 때였다. 롤랜드 에머리히는 이 '얼척(어처구니)없는' 상업재난영화를 통해 놀랍게도 '아들을 구하는 아버지=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지도자(대통령)'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진짜 아버지. 진짜 지도자란 어때야 하는 가를. 한 마디로 부시 대통령을 ‘돌려 까기’로 비판한 셈이다. 우리가 주로 할리우드 영화만을 편향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때(지금은 넷플릭스 같은 OTT 때문에 아이슬란드 영화, 남아공 영화, 베트남 영화, 아르헨티나 영화 등등을 그들의 자국어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에조차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래저래 문제가 많은 대형 자본주의 국가이긴 해도(예컨대 트럼프 같은 인물을 배출한 나라이긴 해도) 미국이 200년 넘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숙성시켜 온 나라인 만큼 자본만 우대하는 내용의 영화보다는 그 자본이 낮은 계급에게도 나뉘어질 수 있는 사회에 대해서도 그리는 영화를 많이 만들어 온 덕이다. 당연히 지배계급, 지배층의 도덕성과 그 ‘지배계급 다움’에 대해 얘기하는, 곧 우파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것이야 말로 바로 할리우드의 진짜 힘이다. 랜달 월레스 감독이 만든 2002년 영화 ‘위 워 솔저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미군이 최초로 남베트남에 지상군을 파견, 첫 전투를 치르는 이야기다. 1965년 북베트남 정규군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 남측 게릴라(흔히 베트콩이라 불리는)와 벌어진 전투였고(아이드랑 계곡 전투) 미국이 서서히 베트남 전을 본격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 사례였다. 미군은 할 무어 중령(멜 깁슨)까지 395명, 베트콩은 2천명에 육박했지만 서로의 일전을 제대로 겨룬 전투였다. 영화에서도 할 무어와 베트콩의 지휘관은 서로의 전투 실력, 병력 운영 및 전술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서로는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달으며 이 전쟁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다. 영화는 양측 지휘관에 대한 그 톤앤매너가 특출한 작품이었다. 국가 간 전쟁에서든 삶의 전반적 영역에서든 ‘아버지 같은 지휘관=지도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전해졌다. 역시 당시의 부시 대통령을 ‘돌려 까기’하고 있음을 드러낸 영화였다. 할 무어 중령이 전투에 투입되기 직전 연병장에 병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는 대목은 이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국민의 힘 유승민 의원이 지난 대선 경선 때 써먹어서 어떤 이들은 속으로 ‘기특하다’고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보좌관이 나쁘지 않군, 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할 무어는 연설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나는 여러분보다 전장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딜 것이고 여러분 보다 전장에서 가장 나중에 발을 뗄 것이다.” 지도자의 연설은 이쯤이 돼야 한다. 육화(肉化)된, 체화된 이념과 정신이 있어야 꽤나 감동스러운 어휘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런 영화들을 생각하면 작금의 한국은 기가 막힌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이태원에서 애들이 안타깝게 참사를 당한 걸 가지고도 ‘애들 시체팔이 해서 돈벌려고 한다’는 극우 파시스트들의 난동에 가까운 시위가 이어진다. 게다가 그들을 은근히 지원하는 지도층, 지도자 부부가 득실거린다. 미국이 현재 실제로 영하 48도이긴 해도 한국은 체감 영하 48도인 곳이라는 얘기다. 그게 더 춥다. 시쳇말로 피타고라스의 명언이 그런 게 있다는 것처럼 현재 한국은 답이 없는 나라가 됐다. 할 무어처럼 잘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할 무어처럼 하바드 석사 출신의 지적인 지휘관이나 지도자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거버먼트 인게이지먼트가 레귤레이션이다” 같은 말은 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흔히들 보그체(패션잡지 보그의 기사가 영어가 뒤섞여 쓰일 때가 많아 생긴 신조어)라고 하는데 신세대들은 아예 ‘보그병신체’라 부르는 모양이다. 일국의 지도자가 이런 비아냥을 들으면 되겠는가. 아 춥다. 정말 추운 나라이다. 차라리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되는 것이 낫겠다. 웬 ‘보그병신체’ 같은 글이란 말인가.
극영화는 서사와 스펙터클로 승부를 한다. 이에 비해 뮤지컬 영화는 코러스로 승부수를 가져가려 한다. 솔로도 아니다. 뮤지컬 영화에서 가슴이 뭉클해질 때는 집단의 코러스가 나올 때이다. 2012년 겨울에 개봉돼 해외보다 국내에서 보다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레 미제라블’이 그랬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장발장의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마리우스(에디 매드레인), 머리를 박박 민 판틴(앤 해서웨이) 등과 일군의 시위대들은 파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다. 그들은 결연하게 함께 소리를 외쳐 노래를 부른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도 이들은 이후 옥쇄(玉碎)를 했을 것이다. 그 느낌과 오라(aura)를 보여주는 마지막 코러스는 실로 사람들의 가슴을 친다. 윤제균의 신작 ‘영웅’도 그렇다. 언뜻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한일 합방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김승락)를 암살하는 장면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하기 쉽다. 근데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서 훨씬 영화가 살았다. 영화의 여운이 오래간다. 그리고 이 작품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이 매우 영리한 선택을 했다는 점에 동의하게 된다. 특히, ‘영웅’은 이전 뮤지컬 공연 작품이 워낙 인기를 모았던 터이다. 그것을 영화로 리메이크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면밀하게 뮤지컬이 갖는 단점과 장점을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점은 당연히 서사(敍事)가 약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영화 역시 서사 중심이 되기 위해서였다면 드라마 전체를 점층적 구조로 이뤄 냈어야 했을 것이다. 안중근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면 당연히 서서히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하얼빈 암살 장면으로 모든 기(氣)를 모아야 한다. 그러나 뮤지컬 영화라면 이야기보다 감정의 엑스터시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요소요소에 노래가 갖는 힘을 분산 배치시키되 그 리듬과 구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안중근(정성화)이 하얼빈으로 출발하기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진주(박진주)로부터 죽은 오빠(조우진)가 쓰던 모자(일명 뉴스보이 캡이라 불리는 것. 헌팅캡과는 약간 다르다)를 받아 들고 노래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 직전 진주의 대사는 이것이었다. “대장님. 거사에 꼭 성공하셔서 오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 주세요.”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에는 안중근의 장도를 마중하려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이들은 곧 안중근과 진주를 중앙에 놓고 양옆으로 마치 모세의 홍해가 나뉘듯 좍 갈라선다. 윤제균의 카메라는 그걸 풀 쇼트로 잡고 안중근과 마진주, 동지들인 우덕순(조재윤)과 조도선(배정남) 그리고 유동하(이현우)가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는 장면을 정면으로 잡아낸다.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의 코러스가 이어질 때는 부감 쇼트로 전체 민중의 의지를 전달한다. 이 장면이 매우 좋다. 가슴을 쿵하고 치고 나간다. 실제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 전, 그 결단의 순간이 얼마나 살 떨렸겠는가. 그걸 혼자의 의지만으로 극복했겠는가. 얼마나 큰 공포에 시달렸을까. 얼마나 그 위험한 독배를 피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한편으로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을까. 안중근을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그 모든 갈등의 순간과 위기를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꼭 혼자만의 힘이었겠는가. 안중근이 혼자라고 느꼈으면 과연 ‘거사를 거사로서’ 끌고 갈 수 있었을까. 김훈의 문학 ‘하얼빈’은 바로 그 ‘개인의 위대한 결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소설은 기이하게도 여백이 많게 느껴진다. 작가 김훈은 안중근의 항쟁이 꼭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음을 간파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여백을 많이 남겨 놓았다. 작가 김훈은, (그 민중의 뜻과 힘을)굳이 서술하지 않을 테니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생각하고 역사적으로 상상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훈의 의도는 적중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만들어진 의미의 골짜기를 통해 사람들은 안중근이되, 안중근이 아니었던 것을 추론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이 혼자의 힘으로 거사를 치렀지만 그 위업은 안중근만이 아니라 그 뒤에 민중들의 도도한 흐름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영화는 소설의 문장이 갖는 그 같은 오라의 힘을 시각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문학이 갖는 추상성,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윤제균의 영화 ‘영웅’은 김훈이 소설 ‘하얼빈’에서 의도적으로 그려내지 않았던 민중의 힘을 정중앙에 배치한다. 바로 그 점이야 말로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이다. 안중근의 독립운동은 개인만의 결단이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따른 것이었음을, 그 거대담론의 시각을 보여 주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영화 ‘영웅’의 주인공은 안중근이 아니라 안중근을 뒤에서 밀어주고, 또 안중근이 주도적으로 끌고 나갔던 민중과 시대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 암살 장면의 스펙터클, 그 서스펜스보다는 민중 전체를 보여 줘야 했을 것이다. 거기에 방점을 찍어 줘야 한다고 윤제균은 생각했을 것이다. 몹 신(mob scene), 코러스 신의 또 하나의 압권은 마지막에서 한 번 더 나온다. 그리고 그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건 안중근의 법정 신이다. 일본인 판사는 그에게 묻는다. “안중근, 너는 왜 이토를 죽였는가?” 안중근은 이에 대해 “(과연) 누가 죄인인가?”라는 말로 화답한다. 재판정에 함께 앉아 있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재판정 밖, 안중근의 아내(장영남)와 동생 안정근 등 무리들이 연신 ‘누가 죄인인가’를 후렴으로 소리 높여 외친다. 안중근은 그 후렴에 힘입어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그가 천명했던 동양 평화사상의 실체와 허구, 자신이 주장하는 대체 이론들 등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들을 낱낱이 그리고 샅샅이 열거한다. 마치 래퍼들의 속사포 가사처럼 안중근은 일제의 역사적 과오가 얼마나 큰 것인 가를 웅변한다. 안중근은 곧 죽을 것이고 우리 모두 그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이 법정 신은 안중근의 독립운동이 사람들, 민중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영웅’의 후반부에 이르는 이 장면은 톰 후퍼의 ‘레 미제라블’이 보여 줬던 마지막 바리케이드 장면을 연상시킨다. 법정 안과 밖을 리드미컬하게 교차해 가며 그려 낸 코러스 신은 ‘영웅’에서 압권 중의 압권이며 최고의 장면이다. 뮤지컬 영화가 갖는 강약의 흐름, 그 완급의 조절, 뺄 건 과감하게 빼고 드러낼 것은 완벽하게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 등등 영화 ‘영웅’의 연출은 매우 스마트한 선택과 집중을 해냈다. 무엇보다 안중근을 바라보는 인간주의적 시선이 흥미롭다. 윤제균은 다소 과도할 만큼 안중근이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음을 강조하려 애쓴다. 옥중 교도관에게 안중근이 자신은 일본을 싫어하지 않으며 일본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이다. 자칫 친일적 시선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사상의 핵심인 사해동포주의를 보여 주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영화가 중간중간 코믹한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는 것도 안중근의 일상이 꽤 인간적인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혁명은 영화처럼, 때론 웃고 우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 진행될 때가 많다. 엄숙주의는 역설적으로 위대한 혁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윤제균은 안중근이 웃으면서 위업을 달성했고 웃는 순간을 통해 공포의 순간들을 극복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단순하게 영화를 재미있게, 상업적으로 성공시키고 싶어서였거나. 모든 것은 균형의 문제이다. ‘영웅’에서 그려지는 코미디 코드가 그렇게 과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민비(이일화)에 대한 정치적 시선이 다소 평면적이었고 그것이 결국 ‘설화(김고은)’라는 캐릭터의 행동 동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해도, 민비가 정치적으로 추악했던 측면(청과 일본 등 외세를 개인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려고 끌어들인 점,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느라 청일전쟁을 유도한 점 등등. 안중근도 초창기, 동학농민운동 부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었다. 그가 민중주의를 올바로 깨달은 것은 그 이후로 보인다)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그녀가 진정한 국모였다는 이미지만 강하게 남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점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는 역사에 대한 인식과 서술에 있어 어차피 다소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에 있는 몇 가지의 핀을 뽑아내는 것이다. ‘영웅’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기대 이상의 감정적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좋은 평론은 영화를 보게 만들고 싶게 하는 것이다. 좋은 역사 영화는 당시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지금의 현실에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영웅’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안중근과 그의 독립운동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어쩌면 영화 ‘영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안중근을 만들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웅’을 보고 있으면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꽤 도발적인 작품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 지금 누가 안중근인가. 누가 불의에 맞서 거사를 준비 중인가. 바로 당신인가? 영화의 총구가 당신들에게 겨눠지고 있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한 종합병원에는 이런 서예 글귀가 써 있는 큰 액자가 병동 복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누가 쓴 것인지 낙관은 없으나 다소 발칙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병든 사람들의 마음에 꽂히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써 있다. “세상 모든 근심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는 없지만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하리라.”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병원의 간호 서비스는 나름 친절하고 세심한 편이다. 서러운 마음을 어루만지라고 평소에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병들어 아프면 흔히들 인생 뭐 별거 없다느니, 이제 모든 걸 다 내려놓으라느니, 앞으로는 몸만 생각하고 건강만 염려하며 살라느니, 일은 다 그만두라느니 하는 소리를 한다. 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그게 다 빈 말이라는 것을. 영어로 얘기하면 ‘bullshit’, 한 마디로 개소리라는 것을. 자본주의에서는 아프다는 것도 매우 계급적인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플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일에서 은퇴해서, 건강만 생각하며 말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아플 시간이 없다. 노동을 멈출 수가 없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 가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지신이 밥벌이를 위해 일을 나가야 한다. 아프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들 하지만 그 ‘아프면 소용없는 일’이 진정으로 ‘소용없어지려면’ 바로 돈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아플 자격이 없다. 병에 걸려서는 안된다. 일산에 있는 병원의 저 글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적인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한국은 비교적 의료서비스, 건강보험이 잘 돼있는 나라이고 그래서 늘 병원에서 퇴원을 하거나 진료를 받고 나올 때마다 진료비, 입원비의 총액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우파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종종 MRI나 초음파의 건강보험 급여 체계를 조정한다느니 해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 같고 아니면 아예 공공 병원의 민영화 여부를 놓고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의 여론은 지금의 건강보험 서비스를 보다 더 확대하는 게 맞는 것이 아니냐는 쪽일 것이다. 한번 앞으로 간 것을 뒤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고스톱 용어로 ‘낙장불입’, 윷놀이 용어로 ‘빽도 불가’이다. 그러다가 망한 나라가 대처 시절의 영국이다. 오죽했으면 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와 환호성을 질렀을까. 지금의 윤석열 정부가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없애 주지는 못해도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이라도 달래 줄 수 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서러운 마음을 달래 주기는커녕 세상 근심을 더욱더 많고 크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최근 벌어진 화물연대 파업 사태와 대통령과 정부의 업무 복귀 명령, 그에 따른 파업 철회에도 불구하고 핵심 주동자에 대한 엄정한 법 적용 원칙을 천명하는 모양새를 보면서 아 이 사람들은 정치를 하려 하지 않는구나, 오로지 통치를 하겠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든다. 다소 간교한 한 우파 평론가는 윤석열 정부의 법과 공정의 정신을 보여 준 사례여서 지지율이 올랐다고 자평했지만, 그 원한의 함성이 언젠가 부메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힘으로 누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좌에서 우로 전향했다고 내세우고 다니는 한 의원도 방송에 나와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에 대처처럼 대처를 잘했다며 낄낄댄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서러운 마음이 더욱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려고 다들 이렇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간의 얼굴을 잃어 갈 때 그 사회에서는 파국이 벌어지는 법이다.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가 이런 문제를 더욱 노골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전장연은 지하철 정거장 지연 점거 농성을 이어 갈 것이고 서울시는 그런 구역은 무정차 통과를 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시민들의 불편이 이어질 것이다. 서울시나 정부가 머리를 싸매고 해결할 생각보다는, 장애인과 시민의 대립으로 프레임을 짜려고 하는 얄팍한 정치적 술수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노-노 갈등을 유발시키는 셈이다. 전장연의 시위는 결국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이고 이에 대한 예산 문제이니만큼 해결의 실마리는 있을 것이다. 정부 권력을 쥔 자들이 ‘내 밑으로 다 숙이고 들어 오라’는 식의 태도를 일관해서는 민란을 유도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는다. 정치가 이렇게 돼서는 안될 일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영화 중에 ‘와즈다’란 작품이 있다. 2012년 영화이다. 10살 된 어린 소녀가 동네 친구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엄마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하자 엄마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아이를 그러지 못하게 하려는 내용의 영화다. 10년 전 사우디에서는 여성들이 이동권이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가 됐든 자전거가 됐든 직접 이동의 물체를 운전할 수가 없다. 남자가 해주는 것을 타야 했다. 강고한 회교 율법인 ‘와하비즘’때문이었다. 지금의 한국이 10년 전 와하비즘의 나라인가. 이동권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가.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은 것은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통치가 아니라. 통치는 김정일의 북한이나 시진핑의 중국, 푸틴의 러시아 같은 곳에서 쓰여지는 단어다.
영화 ‘본즈 앤 올’을 다 보고나면 여러가지가 떠오르고 기억날 것이다. 역시 ‘루키 구아다니노 감독이야’ 소리가 나올 것이고, ‘티모시 살라메는 왜 저렇게 해골처럼 말랐으며 저렇게나 살을 빼야 했을까’라고도 할 것이거나 ‘테일러 러셀 이 여배우 정말 신성(新星)이로군’하는 소리도 나올 것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두 연인의 식인(食人)하는 모습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끔찍해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워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곧 나 같은 사람들)은 이들의 여정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게 더 특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주인공인 18살 식인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은 버지니아에서 시작해 오하이오의 컬럼버스인지 인디아나주인지에서 또 다른 식인 청년 리(티모시 살라메)를 만나, 함께 켄터키와 아이오아를 거쳐 미네소타의 퍼거스폴스란 병원에서 자신의 엄마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잠깐 헤어졌다가 네브라스카에서 다시 만나 미시간 앤 아버에서 잠깐이나마 정상적으로 정착해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곧 다시 식인의 사달이 난다. 지도를 놓고 보면 알게 된다. 이들이 다닌 거리가 얼마나 광대한 지역을 거쳐 가는지. 거의 2000㎞에 육박할 것이다. 그것도 편도로 그럴 것이다. 영화는 그 거리만큼 해당 지역의 모습을 잠깐 잠깐 스케치 하듯 보여 주려고 주력하는데, 대체로 경제수준(소득 수준)이 낮은 곳이다. 버지니아주는 인기 컨트리 가수였던 존 덴버가 히트 노래의 가사로 써서 친근한 곳이지만, 사실 미국에서 가장 못사는 지역에 속한다. 웨스트 버지니아, 오하이오, 인디아나 모두 러스트 벨트 지역이다. 한때 융성한 공업지대였으나 제조업의 쇠퇴로 몰락한 도시들이자 주(州) 들을 말한다.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스윙 스테이트에 속한 지역들이다. 부동층이 많은 주라는 의미이고 트럼프가 공을 들였던 지역이다. 그가 재임 당시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대하며 버지니아와 미네소타를 해방시키라는 주장까지 나왔던 곳이기도 하다. 왜 영화는 이런 지역을 훑어 나갈까. 영화는 식인, 곧 사람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이다. 영화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이터(eater)라 부른다. 이들의 원칙 아닌 원칙 같은 것 중의 하나는 ‘이터는 이터를 먹지 않는다’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들이 왜 식인 습성을 지니게 됐는지 영화엔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터들은 사람을 먹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참고 참아도 결국엔 먹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드라큘라가 흡혈을 아무리 참으려 해도 그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주인공 매런은 아빠의 엄격한 통제 하에 학교생활을 하고 있지만(아빠는 아이가 자면 방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린다. 학대하는 아빠인가?), 또래 아이들의 유혹으로 밤에 몰래 집을 나섰다가 친구 여학생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먹고 만다. 장면이 결과적으로 끔찍해서 그렇지 사실 시작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원래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 육체적으로 누군가에게 끌리게 되는 사람들은 종종 상대의 손가락을 빨곤 한다. 손가락은 육체적 접촉의 첫 관문 같은 신체의 일부다. 매런이 식인을 하는 모습은 마치 동성애 섹스의 전조(前兆)처럼 느껴지게 찍혔다. 이는 곧 섹스와 사랑은 식인의 행위와 다름 아닐 수 있으며, 약간 발전시키면 식인의 습성이란 어쩌면 애정의 결핍을 극단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과 욕구의 표현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아이가 입가가 피범벅이 된 채 새벽에 들어오자마자, 아빠는 딸에게 간편한 짐만 꾸리라고 채근하며 동네에서 도망갈 준비를 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종종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아 왜 밖에서 문을 잠갔는지 이해가 된다. 이후 아빠는 새벽에 몰래 잠든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 더 이상 너를 돌 볼 수 없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아이의 식인습성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놀랍게도 매런이 처음으로 먹은 인간은 유모였다. 대부분의 식인 포식자들은 유모의 젖가슴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등등의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출생증명서를 남긴 채 떠난다. 이 출생증명서로 매런은 자신의 생모가 지금 미네소타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매런은 엄마를 만나야겠다는 일념, 곧 자신의 식인 정체성의 근원을 알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녀와 식인 남자 리의 긴긴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세상에는 소외된 계층들이 넘쳐난다. 현실적 측면에서, 곧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밀려난 계층과 계급이 엄청 많아진 세상이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물적 토대가 빚어낸 정신적 소외 계층들은 더욱 더 넘쳐 나는 세상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서적, 정신적 결핍에 시달리고 거꾸로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과 이상 행동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기 마련이다. 이는 성적인 측면에서 매우 다양한 편차를 만들어 나가는데, 한때 동성애가 차별과 절대적 소외의 대상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 극단의 집단으로 식인주의자들의 모습을 그려 나간다. 그들(소외된 사람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떨어진 채 자신만의 고립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소수 중에서도 완전히 소수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고 궁핍하며 낮은 계층을 형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가 버지니아에서 미네소타까지의 긴 여정을 통해 그 사회·경제적 배경을 보여 주려 한 이유일 것이다. 이걸 다소 극단화된 형태로 정리하자면, 가난한 자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먹는 것이든 성적으로든 아니면 사람간의 관계와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든 늘 심각한 욕구와 욕망의 결핍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심리가 사람들을 식인의 행위를 통해서라도 상대를 가지려는 이상 성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얘기하면 식인은 결국 일부 극단적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사랑하기의 방식(the art of loving)이며 자신들의 사랑을 완전체로 가게 하기 위한 필수적 행위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감독 루키 구아다니노는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이다. 그가 지금껏 만든 영화들 ‘아이 엠 러브’와 ‘비거 스플래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서도 짐작케 하듯, 자신 스스로가 끊임없이 이 세상의 사랑, 남녀 간, 동성 간의 사랑을 완전체로 만들려면 어떠한 길로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루키 구아다니노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됐던 카미유 드 안젤리스의 소설에 매료됐을 것이다. 매런의 ‘엄마 찾아 삼만리’와 리와의 러브 스캔들 모두에 깊이 동화됐을 가능성이 크다. 감독의 그런 내면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평가에 대한 갈림길이 될 것이다. 제목 ‘본즈 앤 올’은 뼈까지 싹 먹어 치우다는 뜻이다. 매런이 마지막에 뼈까지 먹어치우는 대상은 누구일까. 매런은 또 다른 포식자이자 중년 남성인 설리(마크 라일런스)에게 스토킹을 당하는데 그야말로 그녀에게 이터는 이터를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게 만드는 인물이다. 식인주의자들이든 동성애자들이든 이성애자들이든 자신들의 사랑의 연대를 잘 이뤄내지 못해 비극이 생긴다. 모든 게 다 사랑 때문이다. 다 그 놈의 사랑 탓이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렛 미 인’을 뒤섞어 연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흡혈에서 식인으로. 영화의 상상력이 여기까지 왔음을 보여 준다.
영화는 명백히 이야기 설정이 어떠한가에 따라 대중적 성공, 예술적 평가가 갈린다. 그건 어떻게 보면 백남준의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과 같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아이템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아티스트라 부른다. 영화 ‘올빼미’는 그런 ‘씨네아스트(cinéaste)’의 탄생을 알리고 예고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올빼미’는 조선 16대 왕 인조 때의 이야기이다. 인조는 26년간 조선을 통치했고 영화 속 사건, 곧 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실록 23년 때의 일이니 1645년이 배경이다. 사건을 겪고 인조는 우리 햇수로 4년, 곧 1649년에 사망한다. 앞선 사건이나 인조의 죽음이나 실록은 간단하게 처리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매우 미스터리하고 수상쩍다. 감독 안태진의 착안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역사의 공식기록인 실록조차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 아닌 독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영화 ‘올빼미’는 6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진실을 명확하게 밝히되, 그 방법을 목격자의 증언에 따른 것으로 찾아내는 식이다. 문제는 그 목격자란 인물이 맹인 침술사라는 것인바. 다만 낮에는 못 보지만 밤에는, 특히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약간이나마)보이는 주맹증(빛이 없어야 보이는 시각장애) 환자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과연 역사 속에 실재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사건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무엇보다 사건의 행동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사건의 근원, 경악할 만한 진짜 범인은 누구였을까. 주맹증이란 신소재의 조건 때문에 영화 속 사건은 매우 복잡해진다. 과연 주인공 침술사가 본 것은 정말 ‘본 것’인가. 그가 보지 않은 것은 무엇이고 진짜 본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살면서 눈을 뜨고 봐야 할 것은 무엇이며 차라리 눈을 감고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본다는 것 그 자체는 무엇인가. 많은 상념이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의 가슴을 휘몰아친다.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침을 잘 놓는 경수(류준열)는 어의 이형익(최무성)에게 발탁돼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곧 그의 침술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병자호란으로 청(후금)에 인질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김성철)가 돌아오고 궁 안과 바깥세상의 분위기에 긴장감이 흐른다. 서인으로 보이는 최 대감(조성하)은 세자와 손을 잡고, 혹은 세자의 등에 업혀, 조선의 권력을 잡으려 한다. 어쩌면 소현과 최 대감은 조선과 세상을 개혁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청을 통해 변화한 문물을 접한 세자와 아직 친명적 이념의 가치를 지닌 인조(유해진)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만성 기침에 시달리는 세자는 종종 침술 치료를 받곤 하는데, 어느 날 밤 경수는 어의 이형익이 세자에게 독이 묻은 침을 놓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경수는 곧 이 사실을 세자빈 강씨(조윤서)에게 알리지만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일파만파,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번져 나간다. 그리고 그의 목숨이 일각에 처하게 된다. 경수는 진짜 범인을 세상에 알리게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왜 이런 일, 이런 언어도단의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조선 27대 왕 가운데에서 인조는 가장 무능하면서도(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교활한(인조반정, 광해군 폐위) 왕으로 꼽힌다. 그가 그렇게 불리는 데는 왕권의 정통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것이고, 그 같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해 재위 26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오로지 가문의 복수를 위해 멀쩡했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이었다. 정통 왕권에 도전해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인 셈이다. 그가 북악산 기슭 홍제천에서 일군의 반정 세력, 무사들과 칼을 씻고 뒤로 삼각산을 넘어 창덕궁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광해군은 그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이복형으로, 한때 능양군으로 불렸던 인조는 자신의 큰 아버지를 ‘친 셈’이 된다. 선대의 왕 선조는 두 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광해군과 인조 모두 후궁의 핏줄로 태어난 자식이다. 인조가 광해를 제거할 때 뒀던 명분은 그가 선조의 두 번째 정실인 인목왕후와 그녀의 자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일종의 친족 살해 혐의였다. 그러나 그 본질은 수많은 자식을 둘러싼 권력승계 문제로 야기된, 더 깊게는 신하들과의 권력 분점 문제로 야기된 당파 싸움이 원인이었다. 당시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웠으며,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북인은 다시 소북파와 대북파로 나뉘었다. 서인은 훗날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다. 어쨌든 인조의 옹립은 대립세력이었던 서인과 남인이 오로지 광해군을 끌어 내리고자 하는 목적의 일시적인 연합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왕의 자질보다는 이 같은 권력 구조의 다툼을 잘 알았던 능양군, 곧 인조는 정쟁을 활용해 왕위에 오른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화 ‘올빼미’가 출중한 것은 이 같은 거대담론의 줄기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른바 영화적 추론으로 당시 시대를 짐작하게 하고, 진실의 아우라에 접근하게 한다. 영화는 이형익이 소현 세자를 독살하고 침술사 경수가 그것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서스펜스(극적 긴장감)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우리는 이제 범인이 누군지를 다 알고 있다. 관객 모두에게 범인의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영화 속 주요 인물들만이 그걸 모른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주인공에게 어서 도망가라고, 빨리 진실을 알아채라고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게 된다. 안태진이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은 그 같은 서스펜스의 정통 기법을 인조실록의 몇 줄 안 되는 기록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중흥과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기회가 소현세자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는 그것을 걷어찼다. 조선이 다시 반짝, 기회를 얻은 때는 정조에 이르러서였다. 효종과 현종, 숙종, 경종, 영조 등 5대를 거친, 100년을 훨씬 지나서이다. ‘올빼미’가 폭로하고 있는 것은 사건의 실체와 범인에 있기도 하지만 시대를 허송세월한 권력 찬탈의 비극, 권력의 정통성이 부재할 때 빚어지는 참극에 대한 진실이다. ‘올빼미’는 보려 하지 않는 것과 그저 보게 되는 것,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보려 하는 것에 대한 영화이다. 곧 무지(無知)와 인지(認知), 인식(認識)의 차이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무지에서 인지로 건너가는 길은 어렵다. 많은 지식을 알아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지에서 인식으로 가는 길은 더욱 더 험난하다, 알게 된 것을 실천을 통해 자기화, 내면화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전체든 모든 변화의 시작은 인식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올빼미’는 조선조 16대 왕 때 벌어진 일을 ‘인지’함으로써 지금의 사회를 ‘인식’하고 그런 수순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자고 역설한다. 이 얼마나 오묘한 행위인가. 실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안태진의 등장을, 곧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대를 목격하는 당신은 야맹증인가 주맹증인가. 지금처럼 권력의 정당성이 입증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은 영화의 주인공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어둠 속을 잘 살펴야 할 일이다. 진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축구 영화는 사실, 그리 많지가 않다. 야구나 풋볼, 특히 복싱을 다룬 영화들은 많아도 축구는 그렇지가 않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이고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예컨대 야구 같은 경우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았던 1984년 영화 ‘내추럴’ 같은 것이 있고 케빈 코스트너의 1999년 영화 ‘사랑을 위하여’ 같은 작품은 잊을 수 없는 야구영화…라기보다는 러브 스토리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배리 래빈슨이나 샘 레이미 등등 명장 감독들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사랑을 위하여’ 같은 경우도 케빈 코스트너의 앞 머리가 아직 남아 있을 때이고(웃자고 하는 소리이며 대머리 남성 분들 기죽지 마시라. 끝까지 사랑하고 연애하며 사실 수 있다.) 켈리 프레스턴이 유방암으로 죽기 훨씬 전의 일이다.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가 앞으로 너무 나오면 안된다. 그러려면 그냥 TV 중계가 낫다. ‘내추럴’이든 ‘사랑을 위하여’ 든 영화 속에 음모와 범죄가 나오기도 하고 팜므파탈(요부)이 등장하기도 한다. 풋볼 영화인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애니 기븐 선데이’ 같은 풋볼 영화는 광활한 경기장을 하나의 국가 영토처럼 놓고 점령을 위해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거듭하는, 정치 드라마이자 인생 드라마로 엮어 낸 역작이었다. 이에 비해 정통 유럽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는 비교적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할리우드의 거장 감독인 존 휴스톤이 1982년에 만들었던 ‘승리의 탈출’이 기억나는 정도이다. 연합군 포로들이 수용소의 독일군과 축구 시합을 벌이는 이야기이고 양 팀 선수가, 양측 군인이 두 나라 간에 전쟁을 벌이 듯 목숨을 걸고 경기를 펼치게 된다는 내용인 바, 연합군 포로들은 이 과정에서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는 전쟁 드라마이다. 제목이 왜 승리의 탈출인 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축구가 영화로 잘 안만들어지는 이유는 과정이 비교적 우직하고 정직하며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우는 선수들, 정직하게 훈련했던 사람들, 남의 뒷 머리를 치는 지략보다는 몸과 몸이 부딪히는, 그 ‘육질의 정확도’가 승부를 가로지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별로 음모나 뒷거래가 없다. 한마디로 영화가 가져다 쓸 드라마적 요소가 야구나 풋볼에 비해 그리 많지 않거나 축구 경기의 흥분감만큼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수 있는 축구 영화를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온통 축구 얘기, 월드컵 얘기다. 요즘 축구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많은데 확실히 한국 팀이 매우 잘한다는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이 비단 한국 팀의 우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시합에서 만끽할 수 있는 화끈한 재미, 그럼으로써 일상의 지루함과 비루함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 팀의 기량이 높아진 것은 다른 모든 이유에 앞서서 선수들 개개인의 체력이 매우 높아진 것 때문일 것이다. 전후반 90분 동안 선수들은 지치지 않고 구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뛰어다닌다. 전반에 반짝했다가 후반이면 공격과, 특히 수비에서 현격하게 밀리는 상황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선수들 모두 잘 먹고 잘 크고 잘 단련된 덕이다. 개인과 국가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량과 국력, 국격이 동시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축구 팬들은 비록 한국이 16강에서 떨어진다 해도 중계 시청을 중단하지 않는다. 누가 이겨도 또 누가 져도 축구는 축구이고 그 열렬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국 팀이 탈락하면 중계방송조차 중도에 중단될 만큼 한국 우선의 경기가 아니라는 것이고, 바로 그게 월드컵 정신이며, 팬들의 태도가 이제 경기는 경기 자체로 즐기겠다는 것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글로벌 화 됐다는 얘기이다. 축구가 국수주의나 지나친 민족주의 감정에 휩싸이거나 그렇게 이용되던 시대는 지나도 한참을 지난 것이다. 우리도 과거엔 그럴 때가 있었다. 전두환 시대 때가 그랬다. 선수와 축구 팬들은 이제 선진화될 만큼 선진화돼있는 상황이다. 감독이나 축구 운영위원회가 이상한 짓, 못된 짓을 하면 당장 쫓겨나거나 해체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선수를 기량과 상관없이 주요 포지션에 배치하거나 이유 없이 특정 선수를 내치거나 하면 안 될 것이다. 축구 역시 승리를 향해 가는 여러 매뉴얼이 있을 것인 바, 사리에 어긋나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훈련방식으로 선수들을 압박하고, 그런 것 등등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축구위원회나 팬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독선적으로 팀을 운영하는 감독이라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축구에서 바라는 것은 정직하게 노력하는 경기이며 그래서 얻게 되는 그 대가이다. 그건 승리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쩌면 곧 축구 영화가 한편 만들어질 것이다. 지금의 정치 상황과 연계해서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얘기로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주성치 주연의 ‘소림축구’에서 웃음과 코미디를 싹 걷어 낸 분위기 같은 것. 약한 자들, 선한 자들이 승리하는 이야기 같은 것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라가 축구보다 못한 세상이 됐다. 사람들이 축구를 보면서 한편으로 마음이 찝찝한 것은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여론조사업체 모닝 컨설트의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 지도자 22명 가운데 꼴찌인 22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축구는 좀 지더라도 재미와 감동을 주면 된다. 지도자의 국격과 품격은 그럴 수가 없다. 되돌리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럴진대, 실로 닥치고 축구나 볼 일이다. 근데 과연 그럴 일인가?
극장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곧장 직행한 아르헨티나 출신 세계적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의 역작 ‘더 원더’는 몇 가지 키워드를 이해하면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1860년대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이런 얘기를 왜 지금 하려 했는지 그 현재성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 기이하게도 우리는 이 영화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보편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키워드는 영국의 산업혁명, 아일랜드 대기근 그리고 크림 전쟁이다. 산업혁명은 대체로 1760년부터 1840년에 이르기까지 진행됐다. 방직기계의 발명으로 공장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한 분야의 발전이 연관 산업으로 이어져 경제 시스템의 근대화, 자본주의 경제의 초석이 만들어졌다. 사회는 혁신되었을지 모르지만 빈부격차는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10세 미만의 아동들이 공장 노동으로 착취됐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1845년에서 1852년까지 벌어졌고 200만 명이 죽었다. 수백만 명이 굶주림을 피해 아메리카나 호주 같은 신대륙으로 넘어 갔다. 대기근으로 아일랜드의 인구가 800만 명 정도가 줄어들었다. 크림전쟁은 1853년 발발해 1856년 종전됐다. 그 유명한 나이팅게일의 이야기가 나오는, 가장 참혹했던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역사다. 영화 ‘더 원더’는 그 같은 세상의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립 라이트(플로렌스 퓨)는 잉글랜드 간호사다. 그녀는 크림전쟁에서 돌아 온 직후 아일랜드의 외진 시골 마을로부터 안나라는 이름의 한 여자아이(킬라 로드 캐시디)를 관찰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아이는 4개월 째 음식을 먹지 않은 채로 생존하고 있다. 아이를 둘러싼 이 ‘기적’이 의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아니 그보다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기적임을 입증하라는, 마을 유지들의 명령 아닌 명령을 받는다. 때문에 립 간호사는, 아이를 관찰할 수는 있지만 ‘개입’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강제로 먹을 것을 주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안나를 둘러싼 하늘의 기적은 아일랜드 전역에서 아니 잉글랜드에까지 그 소식이 퍼져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신의 기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철썩 같이 믿으려 한다. 자신들의 영성(靈性)을 아이를 통해 확인하려 애쓴다. 뭔가의 기적을 바라던 시대였던 탓이다. 하지만 간호사 립은 당연히,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생각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잉글랜드에서 온 기자 윌(톰 버크)도 이 소동의 실체와 진실을 밝히려 한다. 마을 사람의 일부도 이 거짓된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을 종교 지도자와 지배층들의 공고한 자기 확신의 벽에 부딪힌다. 4개월간의 금식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던 안나는 간호사 립의 ‘관찰’이 진행되는 2주간 급격히 쇠약해지고 심지어 점점 죽어가기 시작한다.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립은 결국 단호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전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성(神性)을 상실하게 하는데, 거기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립은 안나에게 전쟁에 나가 많은 것을 봤다고 말한다. 특히,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다고 한다. 립은 아마도 지옥을 봤을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것이다. 신이 과연 존재하느냐는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신을 부정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신, 인간의 이성이라는, 근대적 합리주의를 깨닫게 됐을 것이다. 전쟁과 기근으로 수백만이 죽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신을 믿기 보다는 인간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간호사 립이 어떻게든 안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그녀의 이성이 전근대성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3주 만에 잃었던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시대가 한 번에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인간의 이성이 한 번에 확립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런 상황은 때로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또 때로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표면화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같은 지역과 민족의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주식(主食)이었던 감자의 흉작이 직접적인 원인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착취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감자를 제외한 다른 곡물을 잉글랜드인 지주들이 철저하게 수탈해 갔으며, 먹을 거라곤 오직 감자밖에 없던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감자 역병으로 흉년까지 들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일랜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립 간호사가 처음부터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는 이유다. 사람은 4개월 간 아무 것도 안 먹을 수 없다는, 그녀의 이성적 판단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대기근 때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잉글랜드 신문사 기자 윌은, 안나에게 소마트로프를 선물한다. 소마트로프는 당시로서는 기이한 장치로 일종의 만화인형이다. 원형의 음반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 후 양쪽에 실을 달고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기면 두 그림이 합쳐진 형태로 보여진다. 영사(映寫)의 초기 단계, 그 기술적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장치인 셈인데 영화에서는 근대적 물건과 그에 대한 사고(思考)가 출현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은유하는 대목이다. 윌이 준 소마트로프에는 새장과 새가 앞뒤에 그려져 있는데, 줄을 잡아 당겨 회전시키면 새가 새장에 가두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과 밖은 하나이며 신의 영역과 자연=인간의 영역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안나를 새장 안에 가두려는 세상의 무지, 그 종교적 완고함과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는 늘 역사의 큰 파고를 겪으며 발달한다.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신의 영역으로 다가서고, 그 과정에서 신 역시 인간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것, 곧 자신처럼 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1860년에는 대기근과 전쟁, 참혹한 노동 현실이 인간을 보다 이성적으로 만들었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초고를 완성한 것이 1867년인 것을 보면, 당시의 시대가 어떻게 이성적 결론을 맺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결국 영화 속에서 아이를 의도적으로 굶주리게 하면서 예수의 만나(man hu, 하늘의 양식)로 살아가고 있다는 인간들의 희대의 사기극, 그 종교적 무지몽매함이 왜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860년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크림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놀라운 동일성)과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1860년대의 립과 윌처럼 지금 우리도 이성의 확장을 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더 밝아질 것인가, 아니면 더 암울해질 것인가. 그 점이야말로 영화 ‘더 원더’가 묻고 있는 대목이다. 대영제국 전역에서 / 매일 밤 아이들이 / 도랑과 시궁창에 누워 / 죽어가지 않는가 / 모든 평범한 어린이에게서/ 기적을 보기엔 너무 굶주린 / 비통한 세상의 탓이여. 영화 ‘더 원더’는 영화 세트장에서 시작해 영화 세트장으로 끝나는 기이한 형식으로 돼있으며, 중간중간 화자를 배치함으로써 교묘한 소격 효과(疏隔效果, defamiliarization)를 불러일으킨다. 비록 영화의 스토리이지만 좀 떨어져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이다. 위 글은 신문기자 윌의 기사를 영화 속 화자가 읽어 내려가는 부분이다. ‘비통한 세상의 탓’이란 말에 영화의 모든 방점이 찍혀져 있다. 실로 비통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에브리띵 윌 체인지’의 정체는 극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이건 다큐인가 극영화인가, 환경영화인가 SF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다가 확연한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도래한다. 이건 2054년의 세 청년이 해킹을 통해 2022년의 우리에게 영상 자료를 하나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미래에서 온 영화이다. 미.래.영.화.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미래에서 보내 온 영화라는 설정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정말 미래 세계의 누군가가 이걸 보낸 것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데 기껏해야 32년밖에 안 남았다. 32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세 친구, 곧 남자 둘과 여성 1명은 세상 바깥의 모습은 알지 못한 채 인공 지능과 안구에 장착된 인터넷 베이스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생체와 기계가 결합된 트랜스 휴먼이다(그건 어느 정도로 편의적일까?). 하지만 그런 얘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인공 셋은 반항아이다. 셋이서 모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명의 에이섹슈얼리스트(무성애자들. 성생활에 관심이 적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을 일컬음)는 어느 날 낡은 LP음반 재킷에서 뮤지션 뒤에 찍힌 기린이란 존재를 발견하고, 인간 아닌 이종의 동물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기린이 언젠가 지구상에 살았던 개체이며, 지금은 완전히 멸종된 동물임을 알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지구상에 있었던 백만 종이 넘는 생물들이 완전히 사라진 시대에 자신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셋은, 아니 처음에는 남자 둘만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길의 도로 끝에 위치한 이상한 성(城)에 모여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이어 가는 나이 든 과학자들, 생물학자들, 환경론자들을 먼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은 곧 인간의 미래(그들에게는 현재)가 얼마나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들이 배우게 되는 환경 변화, 지구 생물 멸종(인간만 제외하고)의 기점은 2020년이다. 이때부터 지구에서 생물이 하나하나 사라지게 됐는데, 처음엔 1년에 하나였다가 나중에는 하루에 하나씩 기하급수로 그 수가 늘어나게 된다. 그 결과 2054년 지구에는 인간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고, 사람들은 야생이란 공간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기계 문명에만 의존해 고립된 존재로 살아간다. 2054년의 토양은 붉은 색이다. 아무 것도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벌판의 풍경이 녹색이거나 황금색이었는지 아닌지 주인공 셋은 알 수가 없다. 이들이 그 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이유는 ‘기준점 이동 증후군(Shifting Baseline Syndrome)’ 때문이다. 어쩌면 2054년의 어린 아이들은 코끼리를 공룡(현존하진 않지만, 과거에 생존했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는)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공룡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지 과정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 있어 이제 공룡은 존재조차 없던 종(種)이다. 그 자리를 코끼리가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기준점이 이동하게 되면, 더 나중의 아이들에겐 코끼리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점점 더 악화되면 결국 나중에 우리 아이들은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인류가 멸망하게 되는 것(어쩌면 지구를 위해 나은 일일 수 있다) 혹은 지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은 환경의 재앙이 아닌 그에 대한 인식의 기준점이 사라지는 것 그 자체 때문이다. 영화 ‘에브리띵 윌 체인지’의 메인 테마는 바로 그 지점에 닿아 있다. 이건 정말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문제이자 사회과학적 인식의 문제이다. 자, 그렇다면 영화 속 2054년에 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사라진 것일까. 거기에는 인간들의 무분별한 남획(참다랑어 잡이만 봐도 잘 알 수 있듯이) 같은 지엽말단의 문제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환경오염과 무엇보다 바로 기.후.변.화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 2020년에 과학자들은 지구 평균 온도가 1.5도 이상 높아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경고는 먹히지 않았다(트럼프는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기까지 했다). 자꾸 불이 났고 그것도 대형으로, 더 대형으로, 마치 핵이 터진 것처럼 지구가 화염에 휩싸였다. 그 과정에서 지구 생물은 멸종했고, 지구의 종 다양성은 완전히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가장 큰 문제는 ‘환경의 역습’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잘 읽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이 기후변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 너머, 피안(彼岸)의 세계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환경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근원은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 때문이다. 그 핵심은 ‘인간과 자연은 다르다, 인간은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이다’며 그래서 결국 인간과 자연을 분리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착취의 시작은 바로 이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있다. 우리는 흔히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이 도구를 쓰는 존재라거나 생각하는 존재라거나 등의 얘기를 하는데, 그보다는 변경의 동물, 주변을 변화시키는 존재라는 게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 변경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의 근본적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환경운동에 대한 자각만이 아니라 환경과 우리, 자연과 인간이 갖는 상호 연관성,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 위대한 진보성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일단 환경문제에 대한 인지 부조화를 없애고 인식을 확장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요즘들 많이 얘기하는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운동의 핵심 이론이다. 단순히 대기업으로 하여금 환경 친화적 사업 요소에 투자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 회사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만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환경 우선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지속 가능한 생존의 문제로 바꾸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ESG운동이며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궁극의 요체이다. ‘에브리띵 윌 체인지’를 보고 있으면 영화가 어느 지점까지 왔는가를 알게 해 준다. 영화적 이성이 이제 어떤 정치·사회·경제적 이슈에 몰두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한다. 어쩌면 이런 얘기도 다 필요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냥 이 영화는 실.제.로. 미래 세계, 2054년의 청년 셋이 해킹으로 우리에게 보낸 병속에 든 편지일 수 있다. 진짜 그럴 수 있다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당신이라면 병 속의 편지를 읽겠는가. 아니면 휙 다시 던져 버릴 것인가. 관객 수가 828명이다. 환경 문제가 절망적 수준이라는 점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영화 속 청년 셋이 깨달은 것도 자신들이 목도한 환경문제, 그 동영상들을 어디로, 누구에게 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로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엔 2054년의 대형 방송,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해킹해 영상을 띄우지만 조회 수가 0명으로 떨어지는 참담한 경험을 한다. 그들이 이 영상을 2022년 우리에게 보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미래는 암흑의 시대이고 과거는 황금빛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색깔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떤 색깔을 칠할 것인가. 이 영화는 일종의 환경 SF 공포영화이다. 미래의 환경 공포를 체험해 보시기 바란다.
한국영화사를 빛낸 탁월한 작품과 세계적 영화인들을 대거 탄생시켰던 기념비적 해로 꼽히는 2003년. 들꽃영화상 운영위원회는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그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영화 리덕스’를 개최한다. 내달 8일 서울 용산 서울드래곤시티에서 열리는 행사는 2003년 당시의 성과를 되돌아보고 중흥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쓰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이날 행사와 함께 열리는 ‘한국영화 리덕스’ 시상은 ▲베스트 시네마틱 모멘트 ▲베스트 시네마틱 피규어 ▲모스트 패러디드 필름 ▲모스트 퓨처리스틱 필름 ▲에버래스팅 인디 스피릿 ▲모스트 어스토니싱 피규어 등 총 6개 부문으로 진행된다. 행사에 앞서 내달 2일부터 5일까지 2003년 개봉됐던 주옥같은 영화를 만날 수 있는 소규모 상영회가 용산CGV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모두 8편의 영화가 상영되며 상영작은 ‘올드 보이’,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지구를 지켜라’, ‘4인용 식탁’,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등이다. 한편, ‘한국영화 리덕스’ 행사 기획위원회(위원장 오동진)는 김홍준 영상자료원장, 제작자 김형준, 문화평론가 김태훈, 영화평론가 윤성은·김효정 등 작품선정위원회를 구성해 ‘2003 베스트10’ 영화를 꼽기도 했다. ‘살인의 추억’, ‘올드 보이’,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지구를 지켜라’, ‘실미도’, ‘황산벌’, ‘똥개’, ‘싱글즈’, ‘스캔들’ 등이 이름을 올렸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공포영화는 세상을 읽는 척도다. 공포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그 표현 수위, 통용되는 방식, 관객의 수용 태도 등등은 그 사회가 지금 어떤 문제의 지점을 관통해 내고 있는 지를 가늠케 한다. 그래서 한때는 공포영화의 그런 진지한 태도가 싫다며 팝콘형 공포영화, 곧 그냥 즐기는 오락 형 공포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스크림’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이 그랬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곧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본래적 역할, 곧 사회의 메신저 역할을 해내곤 한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조금 좁게 치환시키면 공포영화를 보면 세상이 잘 들여다보인다가 된다. 감독부터 나오는 배우 대다수가 거의 ‘듣보잡’인 미국 영화 ‘스마일’이 쥐도 새도 모르게 1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홀연히 극장에서 사라진 것은 마치 공포영화 자체가 그렇듯, 소름 끼치는 일이다. 게다가 절대적 비수기라 불리는 기간에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 ‘스마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걸 보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마일’은 극도의 편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주인공 앞에서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살했는데 그 순간 얼굴엔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 표정을 목격한 주인공이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는 설정이다. 문제는 주인공 자신도 곧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집증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고 그런 증상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결국 다들 목을 긋거나 총을 쏘거나 하는 등등 갖가지 방식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짧게는 나흘, 길어 봤자 일주일 상관에 벌어진 것들이어서 주인공 로즈(소시 베이컨)도 스스로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극도로 초조해 하기 시작한다. 로즈는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지는 않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주인공 로즈와 함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노이로제를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 ‘스마일’은 명백히 코로나19의 전이와 전파, 그 전염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19와는 다른 얘기를 다룬다. ‘스마일’은 코로나19에 대한 얘기인 척, 사실은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음을 영화 내내 서서히 드러낸다. 영화가 코로나19에서 코로나19가 아닌 얘기로 넘어가는 순간, 바로 그 시점에 ‘스마일’이 지닌 본질적 주제가 담겨 있다. 결국 주인공 로즈의 영화 속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로즈의 생사는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 바, 그건 이 영화를 만든 파커 핀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기 때문이고 또 그가 그러기로 한 것에는 관객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세상을 살아갈 쉬운 방법이 없음을 다들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영화 ‘스마일’은 한 번도 마음을 풀어 주지 않으며 오히려 공포의 강도를 점층적으로 높여 나간다. 이러한 서술방식이 이 누군지도 모르는 감독과 배우들 모두가 세상과 영화에 대해 꽤 두텁고 정교한 심미안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만듦새가 꽤나 좋다. 점점 미쳐 가는, 극도의 정신 분열에 시달리는 연기를 해 낸 소시 베이컨의 연기가 눈에 띈다. 당연히 그런 연기를 뽑아낸 연출의 힘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당분간 사람들이 짓는 미소나 웃음이, 그 속에 결코 간단치 않은 진실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웃음이 무서운 세상, 미소를 재해석해야 하는 세상은 평화롭고 아늑하며 행복한 무엇과는 담을 쌓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비교적 급속한 속도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의 공포는 사실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그것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심리적 위축, 그 확산이 더 큰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바이러스로 인해 시작된 공포는 사람들 간의 불신, 정치 사회적 차별과 탄압, 경제의 양극화로 인한 소통의 단절들을 양산해 낸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극도로 고립시켰는데 영화 속 주인공 로즈의 환자들(그녀는 신경정신과 의사로, 스스로가 상담의이기도 하다)은 대다수 역시 혼자서 이상한 증세에 시달린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보고 느끼며 결국 그녀나 그도 죽고 자신도 죽게 된다고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로즈는 전 애인 조엘(카엘 케터)과의 관계 이후 안정적인 남자 트레버(제시 어셔)와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지만, 트레버는 곧 여자의 기이한 행동들에 질려 하기 시작한다. 로즈의 고립과 고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무도 그녀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로즈는 어릴 때 자신 앞에서 죽어 간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키기까지 하는데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건 다른 귀신이 아니라 바로 엄마 귀신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웠던 사람. 무조건적인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그 관계의 파탄은 이미 근원적이었고 모든 트라우마와 공포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무서운 형상으로 로즈에게 나타나 왜 ‘그때’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 결국 로즈의 심리 밑바닥에 있는 공포, 그녀가 자신 앞에서 목을 그은 여자의 모습을 보고 난 후 겪게 된 트라우마의 정체는 죽어가는 엄마를(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공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건 최근 몇 년간의 세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의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타인의 고통, 타인의 죽음보다는 그저 나만 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적 생존 의식과 그 유전자를 확인시킨 공포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이제 극도로 고립된 상태에서 외롭게 죽어갈 것이다. 자신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그런 심리적 증상을 치유할 방법을 찾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바이러스 치료제가 나온다 한들 그런 세상에 대한 치유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스마일’이 다루고자 하는 공포의 정체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은 치료될 수 없다는 것, 이제 우리는 치유의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줄곧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쇼크에 이르게 한다. 그 괴상망측한 존재,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는 그 기묘한 형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한다. 그 존재는 당신이 지금 일하고 있는 데스크나 의자 옆에 붙어 있거나 천정 위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고 심지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는 식이다. 영화 ‘스마일’은, 공포영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장면이 세 개쯤 있어야 하고, 끔찍하게 자해하거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하며, 사람들의 시체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돼 있는 장면이 세 개쯤 있고, 너무 징그러워서 욕지기가 나오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한다는 그 원칙 아닌 원칙에 충실한 영화다. 결론은, ‘스마일’은 꽤 무서운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스마일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왜 자신을 죽이기 전에 미소를 띠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이제야 마음의 짐, 가슴속 공포를 벗어나게 됐다는 식의 안도감 같은 것 때문일까. 아니면 ‘너도 나처럼 될 것이다’는 식의 저열한 심리의 소산일까. 분명한 것은 그 미소가 매우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극장 문을 열고 나온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 차창 속에는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비칠 수도 있겠다. 진짜의 나는 전혀 웃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의식 저 밑바닥에는 어떤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가. 길가 골목에서 어처구니없이 죽은 156명의 젊은 아이들을 구해 내지 못했다는 것? 그 죄책감이 나의 이기적 생존 유전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 영화는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음속 심연 저 한가운데에 있는 괴물을 꺼내게 만드는 세상이다. 영화 ‘스마일’은 그 깊은 우물의 공포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