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대통령실 앞에서 벌어진 mbc 기자와 윤석열 대통령 사이의 논쟁은 언론에 대한 이 정권의 낮은 인식을 드러내 큰 문제점을 남겼다. 윤 대통령은 외국 정상과의 만남 직후 자신이 뱉은 비속어를 보도한 언론 가운데 유독 mbc를 향해 “국가안보의 핵심축인 동맹관계를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로 이간질하려고 아주 악의적인 행태를 보였다”면서 극단적인 비난과 언론 혐오증을 보여줬다. 이에 해당 기자가 “(mbc가) 뭘 (그리) 악의적으로 (보도)했다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대통령실은 더 나아가 기자의 질문이 ‘난동에 가까운 행위’라고 규정하고 출입 정지 등 징계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대응은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흉하다. 국민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내용에 대한 질의를 무시하는 대통령이나, 대답하기 다소 껄끄러운 내용에 대해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기자의 질문 행위를 ‘난동’으로 규정한 대통령실을 보면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른바 도어스텝핑 방식의 소통을 강조하면서 “정부 정책에 대해 언론을 통해 민의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든지 비판할 것은 비판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던,
일반적으로 65세 이상이 되는 사람을 노인이라 한다.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장기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는 노인은 노인성 질병, 고령 등의 사유로 독립적인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며, 65세 이상의 노인 또는 65세 미만의 사람으로서 뇌질환·치매 등 노인성 질병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온 분들로서 존경과 더불어 생활의 안정과 그분들의 능력에 맞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받고 원하는 만큼 사회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해 주도록 법에 명시되어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자치단체장들은 노인복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상담·지도, 노인(의료)복지시설 입소 위탁 등의 조치를 해야 하며,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은 매월 일정액의 연금이나 장기요양급여 등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건강,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한 노인 자살률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수준이다. 유엔 산하 자문기관에서 발표한 ‘2020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61위를 기록했고, 노인자살률은 1위를 차지했다. ’육아휴직법’에 의하면 육아휴직제도는 근로자가 피고용자 신분으로, 일정 기간 자녀의 양육을 위해 휴직을 할…
정치·사회적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 사회 분열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고인들의 이름을 모 인터넷 매체가 공개했는데 이를 두고도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공개를, 다른 한쪽에서는 비공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상대에게 논점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을 함으로써 토론 자체를 무력화 시킨다. A가 논점인데 B라는 논점으로 이동하면 토론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토론이 가능하려면 A 범주 안에 있어야만 한다. A1, A2, A3 등 중학교 수학시간에 배우는 인수분해 동류항 A를 벗어나면 식이 성립되지 않거나 다른 차원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토론뿐만 아니라 짧은 글이든, 시든, 소설이든 동류항 묶기에서 벗어나면 실패작으로 본다. 논점이 일관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토론이나 글쓰기는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명대사인 "한 놈만 패라"가 철저하게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논점이탈은 십중팔구 상대를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풍경은 우리가 주변에서 숱하게
당연한 말이지만, 광고는 시대를 반영한다. ‘대한민국 1%가 타는 차’라는 광고가 차를 이동 수단이 아니라 신분을 과시하는 도구라는 점을 부각할 때,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는 해결한 뒤였다. 그리고 요즘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광고를 만난다. 모 그룹 이미지 광고는 이렇게 말한다. “목표가 생기면 뭐라도 하게 되고, 뭐라도 하다 보면 한발 더 나아가게 되지.” 이 광고 문구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근면성실 또는 대부는 재천이요, 소부는 재근이라는 도덕률에 기반한다.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다. 작위가 부작위보다 도덕적으로 현실적으로 우위에 있는 행동규범이고, 그것은 결국 너를 발전시켜줄 것이란 믿음, 하지만 그게 정말 옳은가, 생각해 볼 때가 됐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공시생을 가르치는 강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그저 공시생이란 신분을 위해서 장시간 학원에 다니는 분들입니다.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백수로 노느니 시험 준비 중이란 말을 듣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거죠. 부모님들도 이 학생들을 그저 학원에 방치하는 겁니다. 합격 가능성도 없
일반 사람들은 특권층의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행동하고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이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대의제(代議制)에 의한 통치의 목적은 큰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쁜 지배에 굴종하면서 그것을 불평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헌법 조문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계약서이다. 우리의 목표는 노예의 지위 향상이 아니라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게르센)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지배할 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지배할 권리도 없다.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 진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진짜처럼 보이지만, 이는 찬반 투표로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칼라일) 투표수의 많고 적음이 정의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쉴러) 우리는 총칼을 고문도구가 놓여 있는 박물관의 선반에 진열하는 것은 물론, 곧 경찰기구와 투표함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니스트 크로스비) 이곳의 바닷가에 앉아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나는 내가 모든 의무에서 해
죽음조차도 온 힘을 다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의 승리를 방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싸워라. 굽힐 줄 모르는 올바른 마음이여,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전진하라. 그리고 네가 그것을 위해 싸우는 정의를 승리를 확신하라. 파멸하는 것은 오직 부정이며, 옳은 것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신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라일) ‘최후까지 인내하는 자는 구원받으리라.’ 우리는 왜 이렇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목적이 달성되는 곳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고, 심지어는 뒷걸음질까지 치는 것인지! 마찰이 모든 노동의 긴장도를 나타내듯, 외면적인 고뇌의 정도는 예수에 대한 우리의 추종의 정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사랑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미워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들은 종종 악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선이기 때문에 미워한다. 인간이 아니라 신의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 나라란 무엇입니까? 악과 싸워가자는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재산이라 안녕질서라 하지만 그 생명이라 재산이라 안녕질서라 하는 것은 그저 가만히 먹고 살아가는 것만 아닙니다. 악과 싸우는 생명이요, 재산이요, 안녕이요, 질서입니다. 악
언론의 자유 “의회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스피치와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거나,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를 제약하는 법을 받을 수 없다” 미국 연방의회가 1791년에 채택한 미국의 수정헌법 1조이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 집회의 권리, 민주사회의 언론 자유와 표현 자유의 보장을 법적으로 명시한 대표적인 조항이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한국 헌법 21조에 명시된 언론의 자유 조항이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국가 기관과 국민의 모든 행위와 자유는 헌법과 법률의 규율을 받는다. 스피치의 자유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말할 자유, 표현할 자유를 의미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언론과 출판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다.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헌법으로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민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제도로서의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면 건강한 여론 형성이 어렵고, 여론은 국민의 생각과 의견이고 이를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역할이 언론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행정부를 구성하고 국가를 대표한다. 국민은 대통령의 발언과 의사결정, 정부의 정책에 직간접
일본에서 교사는 기피 직업이 되어가는 중이다. 일본의 몇몇 학교에서는 교사가 부족해서 새 학기에 임시 담임교사로 교장, 교감이나 부장 교사가 들어가거나, 수업을 자율학습으로 대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고 한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파행이라고 불릴법한 일이 일본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쩌다가 교사가 없어졌을까. 20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공립 초등학교 교사 임용 경쟁률은 12:1이 넘었다. 끝없이 올라갈 것 같던 경쟁률은 꾸준히 줄어서 2021년에 2.6:1로 5배 가까이 감소했다. 중, 고교 교원 채용 응시자 수도 작년에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선 현장에서 교사가 부족한 탓에 뽑는 인원은 늘어났는데 응시율은 계속해서 떨어지는 상황이다. 일본에서 교사가 비인기 직업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OECD 회원국의 교사 중 일본 교사의 근무 시간이 가장 길고 처우가 열악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워라밸이 붕괴된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가 교사이다. 일본 법정 근무 시간이 주 40시간인데 반해 상당수 교사가 주 8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을 많이 만큼 수당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달에 80시간 이상 야근해도 전체 수당이 10
넷플릭스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재미있게 본 기억의 연장선상에서 ‘수리남’도 다 봤어요. 가만히 놔두면 다음 편으로 넘어가게 돼 있는 시스템 덕분에 전편을 다 보는 일은 어렵지 않더군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이비 목사로 위장한 마약왕 전요환 역 황정민의 소름 돋는 악역 연기였지요. 악독한 마약상과 목사라는 이중인격적 연기를 어쩌면 그렇게 실감 나게 소화하는지, 역시 황정민이구나 하는 생각을 사뭇 했네요.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악마적 마약상 전요환이 눈가림 사목 활동을 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는 모습은 참으로 천연덕스러웠어요. 문득 떠오르는 것은 사탄이 목사의 영혼에 빙의(憑依)되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감동적 자애 사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소명을 맡은 성직자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사탄이 몸을 빌려 장난치기에 딱 좋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우리는 사탄에 빙의된 타락한 성직자들을 정말로 보고야 말았지요. 김규돈 대한성공회 신부가 페이스북에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마지 않는다”는 글과 함께 전 국민이 함께 추락을 기원하자고 상상을 초월하는 선동을 했지요.…
첫눈(小雪)은 청첩장이에요. 겨울이 보내온 언약이기도 하고요. 가을빛에 시든 것들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물들이겠다는 다짐이라고나 할까요. 언약이든 다짐이든 속내를 들춰 보면 거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되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러한데 계절과 계절이 주고받은 약속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간다고 해서 붙들 수 있는 가을이 어디 있으며, 온다고 해서 등 돌릴 수 있는 겨울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에게도 세상에게도 시절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있어요. 이를테면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도 그런 셈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의 그 소설(小說)이 아니니까 흘려듣진 마세요. 좋든 싫든 첫눈은 오고야 마는 거니까요. 첫눈(小雪)은 밤 여덟 시에요.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라면, 밤 여덟 시는 스무 번째 시간에 속해요. 무슨 소리냐고요? 일 년을 스물여섯 개의 절기로 나누었을 때, 스무 번째 절기가 소설(小雪)이라고 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나요? 그리 보면 밤과 겨울은 닮았어요. 어둡고 춥고 쓸쓸해요. 날짜로 환산해 보니까 11월 22일이더군요. 절기상 소설(小雪)에 해당하는 날짜 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지나온 11월 22일을 돌이켜 보면 유독 찬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