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를 통해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권문세도를 누려오면서 절개와 지조를 지킨 이들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변절하거나 후대에 부끄러운 일면을 남겨놓은 이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여러 외침으로 군란과 정변들이 있을 때 나라를 지켜야 할 교목세신들이 썩은 고기 냄새에 개미 때 달라붙듯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날뛰는 일들은 그리 오래지 않은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아주 가까웠던 일제하에서만 보아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정조대왕의 시(詩)에 ‘喬木白江宅 文衡家宰孫 出爲關西伯 休忘二字言’이 있다. ‘교목세신 백강의 집이 대제학 이조판서의 손자로다. 평안도 관찰사 되어 나가니 두 글자의 말을 잊지 말게나’ 하였다. 교목세신에게 내린 흔치 않은 임금의 시다. 정조는 이휘지란 신하에게 이 시를 내렸는데 ‘向陽之地 向陽花木’으로 가장 신임이 두터웠다. 그것은 여러 대를 걸쳐 중요한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집안이었다. 시 내용 가운데 두 글자란 정조가 가장 사랑한 백성들의 平安(평안)이었으니 우리에겐 이러한 임금의 품에 안기고 싶은 마음뿐이다. /근당 梁澤東(한국서예박물관장)
오매불망이라는 말이 있다.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우면 깨어 있는 동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잠을 자면서도 잊지 못할까? 그전에는 상상으로 지나쳤는데 그 말을 뼈저리게 느낄 일이 생겼다. 별 말썽 없이 자라준 아들이 대학 2학년을 다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그게 남의 일일 때는 남자라면 당연히 국방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며 정의의 편에 섰고, 그 아이들이 휴가를 나오면 벌써 하며 웃고, 고생 끝에 제대를 하면 기껏 하는 말이 요즘 군대 짧아서 좋다고 했으니 듣는 마음이 오죽했으랴. 그러다가 내 자식이 군대를 가니 훈련소에 두고 오는 날부터 걱정이 앞서고, 훈련소 카페를 들락거리며 매일 편지를 쓰고, 우리 아들 사진은 언제 올라오나 살폈다. 전화라도 오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눈물부터 나왔고, 섬으로 배치를 받아 비만 오면 섬이 떠내려가지나 않을까 청개구리처럼 밤잠을 못 이루었고, 어느 날엔 꿈에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 가기도 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군인은 다 아들처럼 보이고 애석하게 여겼다. 아무리 잠 못 이루는 날이 쌓여도 때가 되면 휴가를 오고 어느덧 제대를 해서 품으로 돌아왔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그새…. 예전에 우리 친정에도
국정원이 ‘NLL 대화록’과 관련해 새로운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대화록이 국정원의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국정원 보관본이 ‘원본’에 가깝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알려진 작성경위와 주체를 완전히 뒤집는 설명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 엄청난 자기폭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뉴시스는 지난 5일 국정원 고위 관계자가 대화록의 녹음 자체가 국정원의 ‘기획’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북 당시 안보정책비서관에게 국정원 녹음기를 주고 녹음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통령의 언행도 국정원 정보수집 영역이었다는 얘기다. 청와대 비서관은 국정원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는 하수인? 국정원의 주장은 한 발 더 나간다. 녹취 파일이 국정원 것이므로, 2007년 10월에 청와대에 중간보고만 했고, 2008년 1월 완성본을 ‘생산’했다고 한다. “녹음기가 우리 것이어서 녹음 파일도 우리 것”이라는 유치한 주장은 그렇다 치자. ‘우리 것’이라 대통령에게 중간보고만 하고 말았다? 대통령 직속기관이 자신의 불법을 백주에 이렇게
1977년 3월 27일 일요일 오후 스페인령 카타리나제도 테네리페섬 산타크로스의 로스 로데오스 공항에서는 항공 역사상 가장 많은 583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항공 사고가 발생한다. 이륙하던 네덜란드 KLM 소속 보잉747기와 이륙 준비 중이던 미국 팬암 소속 같은 기종의 항공기가 충돌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두 여객기의 당초 착륙예정지는 카타리나제도의 그랜드 카나리섬 라스팔마스 공항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자 사고가 난 로스 로데오스 공항으로 착륙이 변경되었고, 거기서 두 항공기는 대기 중이었다. 로스 로데오스 공항은 747기가 운항되지 않는 매우 작은 공항이다. 때문에 공항은 테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착륙을 시킨 비행기들로 넘쳐났다. 원래 비행기를 대는 ‘주기장’ 외에도 항공기가 활주로로 가기 위해 지나다니는 길목 ‘택싱웨이’와 활주로로 진입하는 ‘유도로’에까지 갖가지 비행기를 주기시켰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얼마 안 있어 라스팔마스 공항이 정상 운영됐다. 대기 중인 다른 비행기들은 관제탑의 지시대로 속속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KLM 소속 항공기는 그 시간 급유 중이었고, 팬암기는 그 항공기에 막혀 이륙이 지연되
천문학의 발달은 인류문명의 원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고대로부터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발달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을 이해하는 방법의 차이로 주요 논쟁이 촉발되며 종교와 과학이 발전했으며, 신화와 예술, 인문학 등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하늘은 꿈과 상상력을 제공한다. 시인은 여전히 별을 노래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사람들은 꿈과 사랑을 키운다. 천문학의 발달은 인류 문명의 진보와 함께 했고, 우주를 향한 무한 경쟁은 오늘날에도 국가의 위상이자 힘으로 대표된다. 우리 민족 역시 고대로부터 변치 않고 하늘을 향한 문화 유전자를 키워왔기 때문에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며 당당히 세계사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닐까 신라인들은 하늘에서 별을 따다 경주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경주는 단순히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산과 마을, 여러 건물들로 이루어진 문명의 도시가 아니라 우주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하늘나라였다. 하늘의 질서와 영원한 생명을 담아낸 지상의 천상도시다. 경주는 우주도시 첨성대가 태양의 고도에 따른 그림자 길이를 적정 비율로 축소해서 회전시킨 모양이고, 27단의 돌단으로 이루어진…
남과 북이 가동중단 95일 만에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폐쇄 수순에 들어갔던 개성공단이 회생할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다. 16시간에 걸친 밤샘 마라톤회담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낸 남북 회담대표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남북의 모든 창구가 끊어진 상태에서 작지만 소중한 신뢰의 소산을 일구어냄으로써 남북관계 전반에 새바람을 불어넣을 계기를 잡은 점을 높이 평가한다. 무엇보다도 지난 3개월여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입주기업들이 한숨 돌리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이 아니다. 사실 4개항으로 된 실무회담 합의서는 상식적인 수준의 평범한 문안이다. 남측 기업 관계자 등이 개성공단에 들어가 설비점검과 정비를 진행하고, 남측 기업들이 완제품과 원부자재 및 설비를 반출할 수 있도록 하며, 출입 인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하고, 10일 후속 회담을 개최한다는 것이 전부다. 입주 기업들이 그간 간절히 원했던 내용들이어서 새로울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합의문을 끌어내는 데 16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재발방지 보장에 역점을 두었던 남측과 장마철 설비점검을 최우선 의제로 삼았던 북측이 일정 정도 양보를 통해 절충을 이뤄냈기에 합의가 가능했
이제야 정치가 좀 제대로 돼가는 것 같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공통공약으로 내세운 기초단체장·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 폐지 문제가 여·야 모두 폐지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다. 당장 내년 6월 4일 치러질 지방선거부터 정당공천이 폐지될 것 같다. 맞다. 공약은 지켜져야 한다. 지난 5월 6일 열린 국회 정치쇄신특별위원회 과제심사소위원회에서 기초자치단체장·기초의원에 대한 정당공천 폐지방안을 논의했지만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게 대두되면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바 있어 끝까지 두고 보긴 해야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아직도 ‘신중론’ ‘속도조절’ ‘시기상조’를 주장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여야가 따로 없다.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내놓은 대국민 약속이었음에도 어깃장을 놓는 정치인들을 보며 조소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국민들의 여론은 기초의회와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정당공천제가 폐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구태 정치가 개혁될 뿐 아니라 지방자치가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우리정치의 악습 가운데 버려야 할 것은 중앙당에 의한 지역정치의 예속이다. 이런 정치 시스템 하에서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중앙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독
우리나라 육종학의 선구자인 우장춘 박사는 ‘씨앗은 그 하나로서 우주이다’라고 이미 60여 년 전 종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앞으로 생명자원의 산업화를 통한 바이오 경제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종자산업은 신성장 동력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종자는 한 알의 씨앗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량종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농작물 생산과 수급에 막대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 식량안보와 연결되며, 나아가 종자산업은 반도체와 같이 전 세계로 뻗어나갈 가능성이 큰 미래형 수출전략산업이다. 최근의 종자산업은 교배육종의 단순한 접근에서 벗어나 의약·재료산업과의 융복합산업화 및 나노기술 접목 등 첨단생명 과학기술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종자산업을 국가 신동력산업으로 인식해 지원을 강화하고 있으며 글로벌 거대 종자기업은 원천기술의 선점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1990년대 말 종자주권 대두 그 결과, 전체 종자시장의 67%를 세계 10대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 식량안보에 대비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유전자원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분자마커, GM기술 등 첨단생명공학기법
최근 ‘삼국유사’를 주제로 하는 특강을 의뢰받아 고민한 적이 있다. 숱한 생각의 가지들을 쳐내고 선택한 것은 ‘주몽신화’였다. 그리고 강연 내용 중에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연호를 단군기원, 즉 ‘단기’로 사용하자는 주장을 포함시켰다. 서구화 및 세계적 공통 사용이라고 행정적 편의를 위해 서력으로 대체해 사용 중인 공용연호를 단군기원과 병용하자는 내 주장에 박수를 치며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며칠 후, 특강에서 만났던 한 분이 내게 우편물을 보내왔다. ‘단기복원’ 운동에 열중하시는 어르신의 책자였다. 강연을 들으면서 유난히 동감하시던 분이었다. 반갑고 그리고 고마웠다. 지난 5월에 복구된 숭례문은 수백 년 역사의 보물로서 한국전통의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 때문에 전통의 상징인 국보 1호이며, 언론을 통해서 전통의 방식으로 복원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널리 알렸다. 그렇다면 그 상량문의 모든 연호 또한 전통의 방식인 단기 또는 임진년 등 육십갑자로 표기해야 하는데, 서기로만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현재의 연도 표기는 ‘대한민국의 공
이번 주말 개성공단 문제가 중대한 고비를 맞게 될 전망이다. 이미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터라 획기적 전기가 마련되리라 예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존속이냐 폐기냐를 가르는 마지막 분수령이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기계전자부품 관련기업들은 지난 3일 국내외 이전을 선언하며 배수진을 쳤다. 북은 그날 오후 기업인들과 공단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의 방북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판문점 연락채널도 오후에 받아들였다. 통일부는 4일 오전 개성공단 관련 남북당국 간 실무회담을 6일에 갖자고 제안했다. 주말 중에 실효성 있는 진전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지난 6월초 남과 북이 돌연 대화에 나설 것처럼 요란한 제스처를 보이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산시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과 북이 발표한 문안을 곰곰이 음미해 볼 때 양쪽 다 공단 폐쇄에는 큰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북이 보낸 통지문은 “장마철 공단 설비·자재 피해와 관련해 기업 관계자들의 긴급대책 수립을 위해” 방북을 허용하겠다고 명시했다. 기업들이 주장한 국내외 설비이전에 대한 언급은 없다. 남쪽의 실무회담 제안도 회담을 통해 “시설과 장비점검 문제를 비롯한 완제품 및 원부자재 반출 문제, 개성공단의 발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