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난관이 걱정스럽지만, 일단 환영이다. 수원을 비롯한 대구, 광주 등 이미 ‘도심 속 군공항’을 반세기 넘도록 껴안고 살아온 도시의 반응이 그렇다. 하루종일 이·착륙을 위한 항공기 소음에 시달리다 피해보상 집단소송으로 승소했다. 사실 살아보지 않은 이들은 그 맛(?)을 제대로 알 리 없다. 요즘같이 층간소음 다툼으로 인해 이웃 간 ‘웬수지간’을 넘어 폭력·살인까지 다반사인 마당에 온종일 귀청 째지는 소음에 시달리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수원군용비행장만 해도 가깝게는 고색동 일대를 비롯해 화성 동탄신도시와 병점, 오산 등이 사정권역이다. 아파트 분양공고에도 깨알 같은 글씨의 퍼즐게임처럼 항공기 소음피해지역임을 애써 공지한다. 동네 사정 모르는 이는 뒤늦게 울화통이 터지기 일쑤다. 그 주변은 또 어떤가. ‘개발소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규제권역이다. 또 다른 시선은 지역민원을 의식한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한다. 앞날의 나라 곳간이나 시장원리보다 당장의 여론에 영합하기 때문이다. 표를 의식해 경제논리나 안보논리를 무시한 선심성 법안으로
8년을 끌어 온 국민참여재판 최종안이 확정됐다. 국민참여재판은 그동안 시범적으로 시행되면서 몇몇 문제점이 지적되기는 했으나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된다. 대법원이 엊그제 발표한 최종안은 배심원 재판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피고인의 의견을 묻되 판·검사가 직권으로 국민참여재판에 회부할 수 있도록 했고, 배심원 평결에 사실상의 기속력을 부여하는 평결존중 원칙도 도입됐다. 연내 법 개정이 이뤄지면 국민참여재판이 활발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국민참여재판은 법률 전문가들의 손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던 사법 절차에 국민이 민주적으로 관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 참여와 통제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사법부에도 적용하자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들에 비해 다소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제도를 갖추었으니 본래의 취지와 정신을 구현할 수 있도록 운영의 묘를 살려나가야 한다. 특히 전관예우라든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잘못된 사법 관행을 뿌리 뽑아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물론 제도의 틀을 세웠다고 제도가 정착되는 것은 아니다. 넘어야 할 산이 여럿 있고, 제도 자체에 대한 공격도 예상된
장애인은 나들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도로나 교통 사정, 그리고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은 시설들로 인해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이동하고 생활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데 최근 각 지자체들이 저상(底床)버스를 도입해 운행하고 있어 그나마 도움이 되고 있다. 저상버스는 버스바닥을 낮춰 장애인이 휠체어에서 내리지 않고 버스에 탈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탑승하려 하면 버스 차체가 아스팔트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게 내려간다. 또 자동슬로프가 장착돼 있어 휠체어를 탄 사람이 쉽게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버스 안에도 휠체어를 탄 채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이 버스는 차 바닥의 높이가 일반 버스보다 훨씬 낮고 계단이 없어 노약자나 장애인의 탑승이 편리하다. 외국의 경우 유럽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내버스 기본모델로 도입했고, 일본도 1999년부터 시내버스 시범운행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3년 시범 운행된 후 점차 확대되는 추세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수원시가 앞으로 노약자, 장애인 같은 교통약자들의 이동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저상버스의 숫자를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시는 현재 126대의 저상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전체…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 삶의 시간이 참 더디게 느껴졌다. 미래는 너무 멀고, 과거는 늘 붙어 있어서 빨리 늙고자 조바심을 치기도 했다. 그때 스승들은 우리의 그 시간이 아름답다고 했다. 이제 조금씩 삶의 시간이 빨라지기 시작해서, 어느 순간엔가는 쏜살같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고 말이다. 그때는 잘 몰랐다. 그런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시간은 걷잡을 수 없게 지나가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내가 대학생이 던 30년 전만 하더라도 비디오는 최첨단 영상기기였다. 발밑에서 쥐가 돌아다니는 냄새나는 영화관이 아닌, 집에서 편안히 영화를 볼 수 있다니! 놀라운 변화였다. 그것을 갖고 싶어 안달하다 졸업 다음해인 1990년 국립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거금을 주고서야 살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20여 년 만에 쓸모없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비디오만이 아니다. 아날로그 카메라가 그러하고, CD가 그러하며, 불과 서너 해 전까지 스타일을 겨루던 2G폰 역시 이젠 찾아보기 어렵다. 자동차에서는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어졌고, 누구나 들고 다니던 소니 워크맨도 골동품 상점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노트북에서는…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를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독자로서 나는 문학의 장르 중에서 시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 같은 경우 인내력을 가지고 오랜 시간 앉아 읽어야 하지만 시 한 편을 읽는 것은 훨씬 시간이 덜 걸리고, 또 혼자서 낭송의 기쁨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이다. 물론 시가 시적언어로 표현된다고 해서 시를 언어학의 한 분야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는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우리의 전통 시는 진달래, 국화, 사슴, 노루, 해, 달, 눈, 산, 강 등 자연에서 그 소재를 찾아 감정이입을 하여 시로 표현한 것이 많았다. 그러한 시 읽기에 익숙해져있는 나는 음성이든 의미이든 언어학적 속성을 소재로 한 시, 즉 서두에 인용한 ‘롤리타’나 아래 정진규 시인의 ‘삽’이라는 시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시가 언어학은 아닐지라도 언어학의 주요 범주인 음성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삼국지의 주인공은 유비, 관우, 장비다. 정사(正史)인 진수의 삼국지는 많이 다르지만, 우리가 삼국지라며 읽는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은 이들 3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3인의 도원결의부터 죽을 때까지를 영웅담으로 풀어냈다. 이들 가운데도 관우는 그 기상과 충절,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외모로 인해 중국인들의 사당에 모셔질 정도로 신기(神氣)를 자랑한다. 우리나라 계룡산이나 주술을 하는 장소에도 관우상은 빠지지 않는다. 나아가 유교권인 동남아시아 여행자들은 관우상을 심심치 않게 발견케 될 정도다. 관우는 싸움에서 패해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지만 자기 사람을 만들려는 조조의 온갖 유혹을 물리쳤다. 후에는 적벽에서 패한 조조의 목숨을 구해 신의의 상징이 됐다. 한데 삼국지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인물 가운데 천하를 호령하던 관우를 죽인 여몽(呂蒙)이 있다. 어찌 그 이름을 관우에 비하랴마는 여몽 또한 삼국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 충분한 스토리의 소유자다. 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삼국지 팬들에게 충분한 영감을 주는 인물이다. 삼국이 정립되던 시기, 오나라의 미미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몽은 무장으로 입신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의를 참지 못했고, 전쟁에 나가
이어주는 섬 /배진성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배진성 시집 <꿈섬> 중에서 바다에는 섬이 있다. 무수한 섬들이 살고 있다. 보이는 섬, 보이지 않는 섬, 모양도 성격도 모두 다르다. 이 섬들은 서로가 제아무리 하나가 되고자 해도 이어지지 않는다. 홀로 바다에 앉아 있다. 혹은 홀로 떠돈다. 홀로 아름답기도 하고, 홀로 아프기도 하고, 홀로 가난하기도 하고, 홀로 풍요롭기도 한다. 이 섬이 저 섬을 도와줄 수도 없으려니와 해코지하기도 어렵다. 섬과 섬은 애초 하나 될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도 애초 하나 되기 힘든 존재다. 이어도는 수중의 암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어 섬과 섬을 이어주는 섬이다. 홀로인 섬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이어도가 시인의 마음속에 숨어있어 따뜻한 겨울이다. 그러나 홀로 섬인 사람은 그저 섬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마음이 바다인 사람이어야 온갖 섬을 제 섬으로 가질 수도 있는 것
‘양재기’는 구리, 아연, 니켈 따위를 합금하여 만든 금속인 양은이나 알루미늄 따위로 만든 그릇으로 서양에서 들어온 제품이다. 우리나라 전통제품으로는 음식을 담거나 데우는 데에 쓰이는 놋그릇인 ‘양푼’이 있다. 따라서 양푼보다는 양재기가 실용적이며 현대적인 서양 형식의 그릇이다. 그리고 대야는 물을 담아서 무엇을 씻을 때 쓰는 둥글넓적한 그릇이다. 용도는 손과 발, 얼굴을 씻는 데 사용된다. 컴퓨터에서 기억용량의 의미인 시피유(cpu)가 있다. 이것은 컴퓨터 시스템 전체의 작동을 통제하고 프로그램의 모든 연산을 수행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치로, 제어 장치와 연산 장치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기억 장치를 포함한다. 그러면 사람 마음의 용량을 담는 그릇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과 용서’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계몽가들은 인간 내면의 그릇을 크게 하라고 주문한다. 특히 교사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조언한다. 그릇이 작으면 담을 내용도 작기 때문이다. 그 작은 그릇으로 어찌 제자들에게 큰 그릇을 가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제자는 스승의 세계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2010년 3월 11일 칠레 여성 대통령 바첼레트의 퇴임식에서 칠레 국민들은 ‘대통령 고마웠어요, 2014년에 다시 만나요’라고 외쳤다. 칠레 헌법상 연임이 금지돼 있어 2014년에 대통령 선거 후보로 다시 나와 달라는 주문이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낸 미첼 바첼레트는 공약 이행의 모범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대선 공약 시 ‘당선되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혜택으로 여기도록 하겠다’는 약속은 의회에서 남녀 동수내각을 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녀는 임기동안 빈민가에 3천500여개의 유아시설을 건립하여 저소득층 가정의 1~4세 아동에게 무상급식과 무상교육을 실시하여 여성 취업률과 출산율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였다. 즉, ‘모성(母性)정치’의 결과였다. 바첼레트가 칠레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았음에도 한(恨)을 이해와 사랑, 관용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집권 4년 동안 ‘증오’를 넘어 통합과 화해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독재에 희생된 사람의 딸인 바첼레트는 독재정권 시절
지난달 27일 필자의 네 번째 시집 “해남 가는 길”이 출간되었다. 21살에 방송드라마 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한 필자는 작가가 되면 꼭 출간하고 싶은 시집의 이름이었다. 작가로 벌써 30년이다. “박병두 시인에게 해남 가는 길은 또 다른 ‘무진기행’이다. ‘물집 잡히듯 잡히는’ 그립고 아픈 길이며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영원으로 통하는 길이다. 오죽하면 ‘죽으러 가고 싶어진다’고 고백을 할까. 이 길을 지배하는 상상력은 붉은 상처의 이미지에서 나온다. 가난이 드리워진 가족사, 말하지 못한 역사의 뒤편, 그리고 경기경찰청 정훈관이라는 현재의 신분과 시인으로서의 고뇌 사이에도 이 단심(丹心)이 작용한다. 마음이 뜨거운 시인은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지만 실은 늘 해남으로 가고 있다. 남도 사투리가 그의 몸을 떠나지 않고 그의 정신을 이끌고 가는 것처럼.” 위 글은 출간한 필자의 시집 ‘해남 가는 길’의 뒤표지에 실린 안도현 시인의 추천사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한 적이 있다. 고향 해남을 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