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경은 함경북도 경원군 양하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났다. 1897년 가족들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떠났다. 기울어가는 조선에서 가난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열두 살이던 김숙경도 살길을 찾아 조선을 떠나는 가족을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김숙경을 데려가지 않았다. “넌 이미 다른 집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다.” 한 해 전, 11살이던 김숙경을 이웃에 사는 황천금이와 혼약을 맺게 한 그녀의 부모였다. 그녀보다 한 살 위인 천금이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돈 벌러 간다며 러시아와 만주를 떠돌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 천금이는 잠시 집에 들렀다. 남편 천금이는 항일투사가 되어 있었다. 야속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살아온 천금이가 자랑스러웠다. 천금이는 금방 다시 떠났고, 아이가 생겼다. 아들이 태어나고, 천금이가 다녀간 것을 안 일본 경찰은 김숙경과 시아버지를 잡아가 가두고 고문했다. 집문서와 얼마 되지 않는 땅문서까지 모두 빼앗기고 갓난아이마저 잃은 김숙경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한밤중에 고향을 떠났다. 연해주의 연추에서 만난 천금이는 김숙경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숙경씨.” 천금이는 아내 김숙경을 언제나 그렇게 불렀다.
종교의 차이라니, 이 얼마나 기묘한 표현인가! 물론 종교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시대에서 시대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여러 가지 신앙은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젠다베스타(페르시아의 고대 경전), 베다(바라문의 경전), 코란과 같은 여러 가지 종교 서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진실한 ‘종교’는 오직 하나뿐이다. 여러 가지 신앙도 다만 진정한 종교에 대한 보조 수단 외에 아무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그 보조 수단은 우연히 출현한 것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칸트) 너는 그르고 나는 옳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잔인한 말이다. 특히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런데 종교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잔인한 말을 서로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네가 만약 이슬람교도라면 그리스도교도에게 가서 함께 살아라. 만일 그리스도교도라면 유대인과 함께 살아라. 만일 가톨릭교도라면 정교도와 함께 살아라. 네 종교가 어떠한 것이든 신앙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사귀어라. 만일 그들의 말에 네가 화내지 않고 자유로이 그들과 사귈 수 있다면 너는 이미 평화를 얻은 것이다
150석 예정으로 만든 작은 음악회 입장권이 일주일도 안돼 동나버렸다. 100석도 안 채워지면 어쩌나 해서 다각도로 마련했던 한 달 홍보 총력전이 기분 좋게 무색해졌다. 일반적인 공연장이 아니라, 관객석을 급히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음악회를 100회 가까이 기획해오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6월 18일 열렸던 ‘2022 아마니 페스타(Amany Festa)’이야기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 문화계가 신음하고 있는 판에 경기도, 그것도 최북단, 그것도 시골 산속의, 이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한 조각가의 작업장의 페스타(축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마니 페스타는 작업장이 아마니 삼거리 인근인 데다 아마니가 아프리카 스와힐리 어어로 평화라는 뜻이라 조각가의 작품 주제 ‘사랑과 평화’와 상통돼 정한 이름이다) 지난해 늦여름, 예술가의 인터뷰 일로 찾았던 경기도 전곡, 조각가 김창곤의 작업장.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국내 최초, 유일한 ‘거석 조각가’라는 소개로 찾았는데 기대와 상상 이상이었다. 멧돼지, 고라니 뛰어다니는 산속, 4천 평의 흙바닥 작업장에 전국에서 모은 100여 점의 거석들이 희귀한 장관을 연출했다. 사람 키 일곱, 여덟 배
주위의 친인척 지인들은, ‘저렇게 지속적으로 미사일실험하고 핵실험을 준비하는 북한과 교류한다는 것이 상식에 맞는 얘깁니까’ 라고 내게 따지듯이 질문을 한다. 늘 기·승·전·남북교류협력을 강조하는 필자의 견해에 대한 반문일 것이다. 아마도 다수의 우리 국민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즈음 한반도 주변 상황을 보면 남북간 교류의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왜 남북교류가 만병통치약이 되는지 한번 보자. 첫째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분단체제에 적응된 우리국민들은 지금의 어려운 안보상황을 대단치 않게 여기지만 사실 위기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보유 핵무기를 방어 개념이 아닌 공격개념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표현을 했고,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를 시험하기 위한 7차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위기상황임이 분명한데 우리는 너무 태평한 것 같다. 과거 북한인사와의 대화 시, 북측인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남조선과 미국 사람들이 한 2-30만명 정도가 우리 공화국에 상주한다면 말야, 우리가 와 핵이 필요하겠나?” 교류협력이 필요한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둘째 경제적 문제 해결이다
언론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바닥 수준이라는 한탄은 새롭지 않게 들린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디지털 뉴스리포트’ 뉴스 신뢰도 평가에서 최하위 혹은 꼴찌 수준이라는 평가를 종종 듣기 때문이다. 한국은 46개 국가 중에 2021년 38위, 2022년 올해는 40위라는 결과를 받았다.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 하락은 전 세계적인 경향이다. 2021년 평균 44%였던 신뢰도 수준은 일 년 사이 42%로 낮아졌다. 뉴스리포트는 코로나 영향을 지목했다. 다른 정보원에 비해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사 뉴스에 대한 신뢰가 상승했었다가,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니까 팬데믹 이전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한국은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가 30%로, 글로벌 평균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5년 전인 2017년 23%였던 것에 비하면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17년 조사는 “최근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적이 있는지”를 묻는 뉴스 기피 문항을 추가했다. 뉴스 기피 경험은 뉴스 신뢰도가 낮을수록 많게 나타났다. 뉴스 기피 경험자들은 “뉴스를 보면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거나
며칠 전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는데 어떤 환자가 큰 소리로 의사를 타박하고 있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치료결과에 대해 따지는 게 분명했다. 의사는 난감해하며 무언가 설명하려고 했고, 환자는 말을 자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의사의 명령에 환자가 순한 양이 되어 복종하는 일반적인 풍경과는 정반대여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내는 의사들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특수한 사례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일반적인 일이라고 대답을 했다. 의사가 갑이었던 시절은 끝났고, 갑을관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현상이 빚어졌는지 묻지 않았다. 변화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의 뒤바뀐 관계는 분당 글쓰기 교실에서 강의했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 대령 출신의 중년 남성이 수강을 했는데 그는 병사들에 대해서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이즈음 병사들은 지휘관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단다. 그러나 지휘관들이 모범을 보이거나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면 병사들이 예전 못지않게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병사들을 나약하다고 본 우리들의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증언일 것이다. 학교
1959년 시카고대학의 찰스 라이트 밀즈(C. W. Mills. 1916∼1962)가 쓴 『파워엘리트(Power Elite)』는 출간과 동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관료집단과 군수업자 그리고 군부 등 세 집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미국의 주요한 정책결정을 내리니 이들을 ‘파워엘리트’라고 하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집단은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공동목적을 향해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나머지 미국인들을 이에 추종케 한다고 주장했다. 밀즈는 이같은 미국 사회는 결코 다양한 여러 집단 간의 유화(宥和)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맹비난을 하였다. 밀즈에 의하면 미국 사회는 결코 기회의 나라도 아니고, 다양성의 나라도 아닌 것이다. 권력은 항상 그들 파워엘리트들에 주어져 있고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그것을 행사해 미국을 점차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그를 분노의 사회학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별명을 얻기에는 파워엘리트의 전횡만을 고발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밀즈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권력이 대물림되고 있는 미국 사회였을 것이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파워엘리트의 권력
양심은 자신의 영적 본원에 대한 의식이다. 양심이 그런 의식일 때, 비로소 사람들의 삶을 올바로 이끌 수 있다. 신은 너에게 전통적인 가르침, 즉 전 인류의 의식과 너 자신의 개인적 의식, 즉 너의 양심이라는 두 개의 날개를 주었다. 그것을 통해 너는 비로소 신에게 접근하고 신의 곁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이 날개의 하나를 잘라내고 싶어하는가? 왜 이 세상에서 숨어버리거나 이 세상에 빠져 버리려고 하는가? 그 둘은 다 신성한 것이다. 그 둘을 통해 너에게 말하고 있다. 그 둘이 일치할 때, 너의 의식 또는 양심의 목소리가 전 인류의 의식에 의해 뒷받침될 때, 너는 언제나 신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이 진리를 발견한 것을, 또한 최소한 신의 섭리의 일부를 알아냈다는 것을 확신해도 된다. 왜냐하면 한 목소리가 또 하나의 목소리가 지닌 진실성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주세페 마치니) 양심! 너, 신성하고 영원한 하늘의 목소리여! 너, 무지하고 유한한 자, 그러나 이성을 갖추고 자유가 주어진 존재의 유일한 바른 지도자여! 너, 선에 대한 실수 없는 심판자여! 너만이 인간을 신과 닮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인간 본성의 탁월함과 그 행위
겉절이는 비교적 간단한 반찬이다. 신선한 배추와 갖은양념을 잘 버무리면 된다.. 알쓸신잡은 유희열,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정재승이라는 고급스런 재료를 나영석 특유의 판깔기와 편집으로 잘 버무린 겉절이다. 혹자는 이들 출연자를 보고 방송에 등장해 인문학 르네상스를 펼치는 어벤저스 군단이라 한다 알쓸신잡, 알아도 쓸데없는 신기한 잡학사전의 줄임말이다. 파격적 브랜드 네이밍이다. 이런 황당한 줄임말이 귀에 쏙 들어오고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시즌1-2가 시청률 6-7%, 시즌3가 4-5% 정도면 비지상파 채널에서 그것도 비예능인 중년 남자 출연자들만으로 이룬 대성공이다. 나에게 알쓸신잡은 알아두면 (잘난 체하는데) 쓸모 있는 신나는 잡학사전이다. 내 잘난 체에 짜증 내거나 관심 없는 것은 듣는 사람 사정이고 난 잘난 체하면서 신나면 그만이다. 돈 때문에 떨어지는 자존감 그렇게라도 살려봐야지. 나영석 프로그램이 대부분 그러하듯 프로그램의 포맷은 단순하다. 가고 싶은 곳 돌아보고 함께 맛있는 밥 한 끼 먹고 그냥 떠드는 수다이다. 굳이 멋진 표현으로 하자면 여행 예능+함께하는 먹방+인문학적 수다 정도라 할까. 여행과 함께하는 밥상은 1박 2일부터 일관된 나영석…
최근 달라이 라마의 영어 통역자로 활동했고 스탠퍼드 대학 자비명상 프로그램의 개발자인 툽텐 진파 박사의 “공감과 자비의 과학”으로 워크숍이 있었다. 그는 달라이 라마의 말을 통역하듯이 불교수행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점을 재구성해서 세상에 알리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근본적 의문이 들었다, 공감과 자비의 훈련이 왜 필요할까?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장자의 『인간세(人間世)』에서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듣는 것에 머물고 마음은 상징에 머문다, 기라는 것은 텅 비어 있으면서 외물을 맞이 하는 것이다,’ 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사람은 타인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거나 말하는 것만 듣고 있어도 거울 뉴런이 실제 자신이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활성화 된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타인과 연결 될 수 있다, 자비심은 넓은 의미에서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타인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비심의 근간에는 인간의 취약성과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유한한 인간으로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고통받을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