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선이 성큼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중요한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 “좋은 정부란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가.” 영화 콘클라베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죄로 확신을 꼽는다. 확신이야말로 통합과 관용의 적이라고 하면서 그는 “의심할 수 있는 교황”을 위한 기도를 제안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교황의 자리에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의사결정권자를 대입해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확신하는 대통령보다 의심하는 대통령이 낫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비도덕적 선택을 내리는 순간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평가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윤리적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심적 기술을 동원하는데, 이를 ‘중화의 기술’이라고 부른다. 중화의 기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람은 비도덕적 행위를 하면서도 나 자신이야말로 피해자라거나, 사실 어떠한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다거나,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세상이 자신에게 부당한 책임을 전가되고 있다거나, 헌법과 같이 보다 높은 가치에 의해 자신의 행동이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익숙한 말들이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
“고향이란 버리기로 했다 일년에 몇 번 역마당에 서성대기도 했지만 끝내 고향이란 버리기로 했다. 돌을 깨어 오늘을 먹고 내일을 기다릴 뿐 손 끝에 스며드는 한기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고향이란 버리기로 했다.” 이 시는 내 친구 윤백이가 알려 준 시다. 그가 고등학교 때 내게 알려준 시인데 아직도 내 머릿속 한쪽 구석 폴더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읊어 보는 시다. 그의 시가 아니라 그가 알려준 시다. 이 시의 작가는 그의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는 그 국어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 선생님의 시를 공책에 정자체로 베껴놓고 줄줄 외어 자랑하듯 내게 알려주곤 했다. 그는 말 그대로 문학 소년이었다. 당시에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이과반과 문과반을 나누었는데 내 친구 윤백이는 문과로 갔지만 가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이과반인 나를 찾아와 또 그렇게 자랑하며 시를 읊어대곤 했다. 그런 그 친구를 나는 무척 좋아했다. 사실 1학년 때 그를 만나 같은 지역의 친구가 되었고 친분이 두터워져 나는 그에게 내가 다니는 성당을 소개했고 그도 같이 다니고 싶다고 하여 내가 대부를 섰고 세례를 받게 하여 내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 대자 대부의…
명치가 막힌다는 느낌과 두통으로 내원한 그녀는 다양한 자율신경 이상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잠이 잘 들지 않고 밤에 소변 때문에 잠이 깨기도 하였다 가끔 피곤하면 이명이 있고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리는 증상도 함께 있었다. 자주 더부룩하고 아랫배에 가스가 잘 차고 대변이 시원치 않다. 수년 전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인 하시모토 갑상선염 진단을 받았고 갑상선 기능저하증으로 호르몬 보충제를 먹고 있었다. 수개월 전부터 증상이 심해져 다른 병원에서 자율신경실조증으로 치료를 받기도 했다는데 조금 괜찮았지만 다시 나빠져서 한의학으로 치유하고 싶어서 내원했다. 증상이 심해진 시점에 어떤 일상의 변화가 있었는지를 확인해보니 인사이동으로 상사가 바뀌었는데 업무지시가 일방적으로 이거 해 라고 하는 고압적인 방식에다가 체계 없이 오더를 던지능 상황에 중간 관리자로서 조율하는 과정에서 많이 힘들었다고 하였다. 소통이 안되는 상황을 견디는 시간이 6개월 정도 지나며 그때쯤부터 몸의 증상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녀에게 한약을 비롯한 통합 한방치료와 함께 한의학의 경혈학과 심리요법이 결합한 치료법인 감정자유기법(Emotional FreedomTechni
안과 밖이 있다. 창(窓)도 그렇다. 안에서의 창은 보기 위함이고 밖에서의 창은 가리기 위함이다. 보거나 혹은 가리거나, 얇은 유리창의 존재 이유조차 안팎으로 서로 나뉜다. 볼 것인가, 가릴 것인가. 결정은 내가 아니라, 내가 딛고 선 땅이 한다. 아니, 나와 함께 딛고 선 무리의 그늘이 한다. 이를테면, 학벌과 벌이와 행색과 씀씀이가 결정한다. 버려지는 명함과 살아남는 명함이 결정한다. 창의 존재 이유는 그렇게 나뉜다. 누군가 그랬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읽거나 듣고도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늘 문득 오줌을 누려다 창을 느꼈다. 아니 눈으로 읽히는 창을 보았다. 사내들이 서서 오줌을 누는 소변기에는 사내들만 아는 문양이 있다. 오줌발이 떨어지는 절묘한 각도에 새겨진 파리 한 마리가 그것이다. 파리는 연약한 생명이나 수천수만의 오줌발을 견디며 꿈쩍도 없다. 견뎌내는 모양새가 폭포수를 견디는 도인의 그것 같다. 그런데 오늘 만난 도인은 조금 달랐다. 길게 세워진 네모난 창에 모기가 있었다. 모기는 네모난 창처럼 길게 세워진 새하얀 소변기 속에 있었다. 소변이 낙하하는 절묘한 지점에 모기는 흡사 파리처럼 날개를 접고 있었다. 온갖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도를
헌법은, 헌법재판소는 박근혜에 이어 두 번째로 대통령을 파면했다. 다음은 그 이유를 밝힌 판시(判示)의 한 대목이다. ‘헌법 수호의 책무를 저버리고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였습니다.’ 세계챔피언이었던 왕년의 권투선수 홍수환, 1977년 11월 도전(挑戰)전 2라운드에서 4번이나 다운됐다. 3라운드에서 ‘지옥의 투사’라던 챔피언 카라스키아의 턱과 배를 통렬히 때려 눕혔다. 칠전팔기(七顚八起)를 떠올리는 ‘4전5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신화(神話)’의 대명사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아들의 고함에 절규하듯 엄마는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소리쳤다. 이 대목, 곧 얘기 거리가 됐다. 왜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고 ‘대한국민 만세’냐 하는 시비(是非)였다. 기억에 따르면, 당시 신문 등은 (공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기뻐서 생각 없이 내지른 말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낭독한 이번 판결에 엄연(儼然)히 존재하는 ‘대한국민’도 그러할까? 우리나라 이름의 본디는 대한(大韓)이다. 구한말 고종황제는 그 이름에 제국(帝國) 칭호 달아 ‘대한제국’ 깃발을 세웠다. 다음 시대
총체적 위기다. 대한민국은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다시 일어나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주저앉을 것인가. 6·3 조기 대선을 앞둔 지금, 우리 사회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 할 때다. 무엇보다 정치(政治)가 ‘정치(正治)’해야 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의 정신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과제다. 개인이 자유롭고 신바람 나는 정치, 집 안팎이 평안하고 인심이 넉넉한 정치, 이웃 간에 화목하고 갈등이 최소화되는 정치야말로 우리가 꼭 이루어내야 할 새로운 정치다. 정치문화가 바뀌면 사회 분위기도 달라지고, 자연스럽게 국가의 품격과 경쟁력과 이미지까지 높아진다. 지금의 글로벌 세계질서는 그야말로 ‘무한경쟁의 정글’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벌이는 세기의 관세전쟁(tax war)에서도 드러났듯이, ‘열린 국가’든 ‘닫힌 국가’든 자국 이익이 최우선이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다민족·다국적·다문화·다인종을 선호하고 초국경 협력과 글로벌 공급망을 강조하
인류 역사 속에서 정치와 사회의 안정은 국가의 흥망성쇠, 백성의 안락, 기술의 발전과 생산, 역사의 진보 등에 크게 영향을 미쳐왔다. 평화롭고 안정된 정치와 사회가 받쳐주지 않으면 기술 발전과 생산은 불가능하며, 백성들이 안정된 생업에 종사하는 것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 나라가 도탄에 빠지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지도자의 철학 부재 때문이다. 자고로 한 가정의 가장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가족들이 불행하게 되듯이 한 국가의 지도자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국민은 불행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더욱이 지도자를 보좌하는 참모진들의 철학 부재 또한 지도자 못지않게 국가와 국민에게 해악(害惡)을 끼치게 되는 법이다. 국민에 대한 사랑과 충성은 뒷전이고,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지도자에게만 충성한다. 아울러 자신들의 천박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 위에 군림할 때면 국민은 절망의 수렁에 빠져 헤쳐나오지 못할 게 뻔하다. 역사 속의 간신들은 그 악랄한 속내만큼이나 끼친 해악도 컸다. 그들은 군주를 포악하게 만들었고, 나라와 권력을 훔쳐 농락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충신을 모함했고, 조정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들었으며
최근 양자컴퓨터에 대한 빅테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올해 초 CES에서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양자컴퓨터 실용화가 20년 이상 걸릴 것이다”라고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자 양자컴퓨터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했다. 구글 양자컴퓨팅 담당 임원 켈리는 “양자컴퓨터 시대가 5년 내 올 것이다”라면서 젠슨 황의 발언을 반박하였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도 “3∼5년 후 양자컴퓨터 상용화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지난 3월 젠슨 황은 양자컴퓨터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을 철회하고 “엔비디아도 보스턴에 가속양자 연구센터를 만들 것이다”라고 언급하여 시선을 끌었다. 양자컴퓨터가 왜 이렇게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인가? 양자컴퓨터는 슈퍼컴퓨터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를 활용하여 첨단기술 개발과정에서 풀지 못했던 기술적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도구이다. 인공지능, 우주항공, 바이오, 자율주행 등 과학기술 모든 분야에서 직면한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게임체인저 기술이다.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들이 양자컴퓨터에 많은 투자를 하고 연구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양자컴퓨터 회사인 아이온큐(IonQ)는 현대차와 함께 자율주행
조기 대선이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한달 반 정도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각 공기관이 이를 두고 고민에 싸여 있는 모양이다. 곳곳에서 기관장 알박기 인사가 꽤나 거세고 거칠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 듯이 보인다. 영화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문제가 터진 상태다. 기존 원장은 지난 2월에 임기가 다 됐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야 이미 원장추천위원회가 구성돼 공모를 내고 선임 절차에 들어갔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12월 계엄,내란 사태로 모든 것이 비정상이 됐다. 그런 ‘임시’ 상황이 4월 4일까지 계속됐던 건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이 있었고 이제서야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새로운 원장 임명 절차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자, 지금 이럴 때 새로운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을 뽑아야 하겠는가. 결론은 아니다이다. 대통령 선거 일정이 추후 1년이라도 남았다면 당연히 새 원장을 뽑아야 한다. 그러나 한달 반 정도 후면 어찌 됐든 새 정부가 구성될 것이다. 그때까지 유예해야 한다. 그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국립 아카이빙 기관이다. 모든 뉴스 자료는 KTV가 보관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
무감각해지고 있다. 별의별 일을 다 겪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어지간한 뉴스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도파민에 중독된 뇌를 가진 사람이 된 기분이다. 122일간의 정치적 이슈를 제외하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노라면 눈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내 몸과 머리는 살아남기 위해 무감각해지기를 ‘선택’한 것 같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이제는 미덕이 아니라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태어난 것이 내 선택이 아니었듯, 그저 던져지듯 시작된 인생일지라도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 발 딛고 살아간다면, 먹고 자고 살아지는 대로 살다 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일종의 지식의 고통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정말이지 살기 힘든 세상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고 싶지 않은 세상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만 보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정치도 그렇고, 출산율도 그렇다. 각종 지표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가 나아질 가능성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암울한 전망뿐이다. 그래도 당장 내일을 포기할 수 없기에 우리는 버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