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난무하던 여론조사 결과를 지금은 공표하지 못한다. 후보들의 지지율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투표일 전 1주일 동안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거나 왜곡된 정보로 주권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차단하는 게 맞다. 답답하고 궁금하더라도 지금은 선관위가 보내준 공보물을 찬찬히 읽어보면서 생각을 정리할 때다. 서울신문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 25~26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각각 37.2%와 42.3%로 5.1% 차이였다. 갤럽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가정한 조사도 했는데, 그 결과 격차는 더 적었다. 단일화를 하면 0.1%라도 더 벌어져야지 줄어드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25일 TV 토론에서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는 결렬되었다고 재삼 확인한 마당에 이런 조사를 왜 한단 말인가? 그 답이 나왔다. 결국 안철수는 윤석열과 단일화에 합의하고 후보를 사퇴했다. 결렬 선언 이후에도 집요하게 단일화 조사를 한 이유가 있었다. 단일화 압박. 여론조사는 이렇게 부실할 뿐만 아니라 음흉한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순
오랜 대화 뒤에는 대체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상기해보라. 그러면 그 대화의 대부분이, 아니 때로는 전부가 참으로 공허라고 쓸데없고 종종 사악했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침묵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는 이미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사디) 네가 말을 할 때에는 그 말이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한다. (아라비아의 속담) 말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일이 한 번이라면, 침묵을 지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일은 백 번이 될 것이다. 선량한 사람은 말다툼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말다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리 선량하지 않다. 참으로 현명한 사람은 박식하지 않으며, 이른바 박식한 사람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한 말은 종종 귀에 거슬리고, 귀에 듣기 좋은 말은 종종 진실하지 않다. (노자) 육체노동은 하찮은 잡담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유익하다. 현명해지고 싶으면 현명한 질문을 하고, 주의 깊게 들으며, 차분하게 대답하고, 그리고 할 말이 없을 때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다. (라파테르) 사람들이 오랫동안 논쟁하고 있을 경우, 그것은 그들이 논쟁의 쟁점을 그들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것인가?' 마지막 연이다.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시는 "모든 일이 이렇지 않았던가?" 하고 비논리의 일상성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사회주의 체제였던 동독에서 1954년께 이런 시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민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성으로는 알 수 없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시인은 알고 있고, 보고 있다.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상상력일 터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불가지의 답답한 세상을 다른 세상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신화와 그 이후의 시와 소설 등 예술이 그런 매개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다. 다시 물어보자. 장미
에세이는 자유로운 문학이지만 자기 색깔이 분명해야 한다. 비록 평범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진실이 탑재되어야 힘을 얻는다. 수필적 사유의 깊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의 심도와 깊은 상관성을 갖는다. 동시에 독자에 대한 설득력으로 이어진다. 허풍 떨지 말고 겸허하게 수신에 힘써야 한다. 그런데 내가 성장해 오는 동안 학교 졸업식에서나 대학 학위수여식 때의 총장 축사에서 보면 거창한 말들이 많았다. ‘큰 꿈을 가져라’ 고 하거나 일류대학, 일류 사회, 선진국으로의 진입, 부강한 한국 등, 그것은 결국 경쟁으로 이어지고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상징하게 되었다. 따라서 학교에서나 기업에서나 연구기관에서나 수석이 되어야 하고 등수 안에 들어야 대접을 받았다. 그런 사람만이 행복한 것 같았다, 다수의 행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행복을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었고 배우지도 못했다. 행복에 대해서 선생님이나 부모로부터 배운 게 없다. 돈 때문에 한숨짓고 다투며 손발이 갈라진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돈이 있으면 좀 더 편하고 행복하겠구나. 하고 ‘돈 = 행복’을 막연하게 동경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학생은 공부 못하면 불행하고 어른은 가난하면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최근 발생한 우크라이나 사태는 국제사회는 물론 우리 사회에도 많은 우려와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여러가지 영향중에서 과거 핵 보유국이었던 우크라이나가 미국 러시아 영국이 참여한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안보와 경제 지원을 보장받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핵문제 해결을 당면과제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주기에 충분하다. 북한 핵문제는 지난 90년대부터 우리와 국제사회가 나서 해결한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해결이 어려운 주된 요인은 핵무기는 자위적 수단이고 군축차원에서 북한 핵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는 북한의 무리한 요구에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북한 요구의 강도가 약해지거나 변화할 것 같지 않아 보여 매우 우려스럽다. 북한 핵문제가 방치되면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안보 불안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북한이 우리를 핵무기로 공격하지 않는데 과도하게 문제삼아 북한의 반발을 초래하고 한반도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북한의 호전성을 외면하면서 북한 지도부의 합리적 판단과 선택에 대한 기대가 큰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북한이 잘못된 판단으로 이판사판식으로 핵무기를
약팽소선(若烹小鮮)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어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의 준말인데요, 직역하면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듯이 해야 한다’쯤이 될 거예요. 살이 연해서 부서지기 쉬운 작은 생선을 요리할 때와 같이, 정사(政事)를 다루는 데도 차분하게 기다리며 세심하게 살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품고 있대요. 바야흐로 20대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네요. 워낙 ‘비호감 대선’이니, ‘막장 드라마’니 하는 악평이 지배한 선거전이어서 난생처음 보는 험궂은 장면들이 넘쳐나고 있지요. 국민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비전도 딱히 없고,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구호도 없어요. 시종일관 네거티브로 점철된 선거전이 유권자들의 시름만 깊어지게 만든다는 한탄이 나올 정도예요. 그래도, 사뭇 전개되는 팽팽한 진영 대결 구도만큼은 예나 마찬가지인 듯해요. 상대방의 약점만 골라 침소봉대하는 흠집 내기 일변도, 나라 살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우선 환심을 사고 보자는 식의 포퓰리즘 난무, 정치 수준을 높일 개혁 프로그램 경쟁의 실종 등을 특징으로 정리해도 될 것 같네요. 최선도 차선도 아닌 차악(次惡)을 골라야 하는
神은 세상 모든 만물을 주관할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창조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꽃을 주었다. 꽃이라 이름 불러주기 전에는 몸짓에 불과했으나 알맞게 불러 줌으로써 무엇이 된다. 흔들리며 피는 꽃도 있고 이름을 불러줌으로 꽃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생물학적 성(性)과 사회학적 성(性)으로 구분하면 젠더(gender), 섹스(sex)가 된다.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불러내고 응답함으로써 완전한 무엇을 이룰 수 있다. 이러한 균형이 깨지면 갈등이 생기고 권력과 힘에 의한 폭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성은 꽃 인가?라고 물으면 남북한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말할 것이다. 남쪽사람은 ‘빵과 장미’ 아니면 다른 무엇일 것이다. 북쪽출신인 나는 노랫말 가사를 생각한다. 여자의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남쪽남자는 ‘너 나와 친구할래, 아니면 남자할래’고 물음으로써 자신이 남자임을 확인시킨다. 북쪽남자는 무엇이라고 할까. ‘너 나와 동무할래 아니면 오빠할래’고 하여 자신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근접시킨다. 연애하는 과정에도 오빠가 아니라 동무라고 하기도 한다. 동지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고 동무는 친구이다. 동지라는 말보다 동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동무에서 연인
‘비호감선거’라는 말 자주 듣는다. 영웅부재시대라는 말 떠올린다. 아버지 집을 누가 비싸게 사줬다네. 법카로 초밥 수십 인분을 한 번에 사먹었다네. 살아있는 소 가죽 벗기는 푸닥거리로 뭘 노렸지? 대장동 직접 사인한 서류가 왕창 나왔대. 검사 사위 덕 듬뿍 봤다네. 아들 퇴원에 관용차 썼다더군. 주식시세 조작해 돈 벌었다네... 이런 일들, 전에는 구렁이 담 넘듯, 흘러갔다. 모르는 척해야 현명하다 했다. 심지어 ‘순리(順理)’라고도 했다. 권력과 언론의 유착은 매우 정교해서 아직도 ‘파워 만땅’이라고들 한다. 민초(民草)들은 뭐지, 세금만 내는 루저? 개돼지? 지금도? 전에 영웅 또는 천사를 뽑았다면, 착각이다. 박정희 전두환 등을 뽑았던 과거 선거는 ‘호감선거’였나? 백성 입 닫아걸고 언론에는 아무 얘기도 못하게 하면, 그는 영웅이었다. 어릴 적, 내게 대통령 박정희는 천사였고, 잘생겼고, 정의 그 자체였다. 좀 지나 ‘사나이’ 전두환 일대기는 주먹 불끈 쥐게 하는 영웅담이었다. 이순신 장군보다 위대했다. 착각을 강요했다. 심지어 충무공과 지들을 겹쳐보이게 하는 시도도 벌였다. 장난도 심했지. 비밀 없는 세상, 영웅이 되거나 만드는 ‘작전’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기대어 이를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이를 널리 밝히며, 민족의 오래도록 변함없을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에 따른 세계 개조의 기회에 따라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가 함께 생존하고 같이 살아 나갈 권리의 정당한 움직임이니 하늘 아래 어떠한 것이든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이니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비롯하여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몇 천 년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겪은 지 지금까지 10년이 지났으니 우리 생존권을 빼앗긴 것이 무릇 몇이며, 정신적 발전에 장애가 됨이 무릇 몇이며, 민족적 존엄이 훼손된 것이 무릇 몇이며, 새로움과 독창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흐름에 기여하고 도움을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무릇 몇인가. 아아 슬프도다. 오랜 억울을 드러내려 하면, 지금의 고통에서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180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한다. 유럽정복 전쟁의 연속적인 승리는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전쟁에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확산을 위한 전쟁의 명분 또한 작동했다. 일종의 “해방전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독일의 전신인 프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영향으로 시민들의 정치기본권인 권리조항과 함께 봉건적 의무의 해체, 그리고 국가공직이 능력있는 시민들에게 개방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의 구질서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은 위협받게 되었고 이들은 결속했으나 패배의 연속이었다. 프랑스에 의한 독일의 패배는 따라서 지배계급의 패배였지 독일 민중의 패배는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 군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 그 위세가 달라진 민중으로 구성된 군대였으니 전쟁은 영토 전쟁을 넘어 사상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는 시민 혁명군의 국제화를 이뤄내고 있었던 셈이다. 루카치가 그의 『역사소설』에서 이 시기를 “대중이 역사를 집단적으로 체험한 시기”라고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옳다. 역사소설의 대중적 수용이 가능해진 조건이 만들어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