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 뚝뚝 떨어져 슬피 울던 울음 속에 희망 있었는가 그리워서 너무도 그리워서 그냥 미쳐버린 저절로 미쳐버린 그리움 속에 우리 희망 숨어 있었는가 오곡백과 온갖 꽃 다 피어나는 깨끗한 세상 기원 속에 그때 우리 쓰라린 패배 낮고 낮은 벌거숭이산 침묵처럼 엎드려 있었는가 버림받은 어머니 평야 삽날처럼 쓰러져 누워 있었는가 그런데 오늘 저 기다림 버리고서야 저 그리움 지우고서야 그때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태어나신다니 세상이여 들이여 풀이여 별이여 모르겠네 희망의 깊은 속내를 모르겠네 - 시집 ‘흙의 경전’ / 2008 / 화남 정치는 수식어의 잔치인가? 대선을 앞둔 11월의 지면에는 온통 들뜬 희망만이 철 지난 깃발처럼 나부낀다. 흙의 시인, 농민 시인으로 사는 홍일선 시인은 가난한 이에게는 언제나 깊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희망을 마치 초혼가를 부르듯 목 놓아 부르고 있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은 늘 실패를 위로하는 수식어였다. 해방의 감격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보다 해방을 회피했던 자들의 권력 희망으로 바뀌었고, 민주화도 산업화도 가난한 자들의 눈물을 감추는 얄팍한 수사적(修辭的) 희망에 불과했다. 이제 희망에 도착했는가…
수원이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를 치르기 위한 경기장을 건설하려고 할 무렵인 1996년 7월 삼성은 월드컵경기장을 건립한 뒤 20년 사용 후 수원시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삼성은 IMF를 이유로 1998년 4월 일방적인 파기를 시에 전달해 왔다. 이 때문에 수원시민과 경기도민들이 나머지 공정에 들어가는 비용을 걷어 부담하게 됐다. 특히 수원시민들은 당시 심재덕 시장의 아이디어로 월드컵구장 ‘1인 1의자 갖기 운동’을 펼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긴 해도 총 건설비 3천107억1천400만 원이라는 막대한 재원을 수원시 혼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월드컵은 열려야 하고, 결국 경기도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건설된 ‘경기도수원월드컵경기장’(이하 수원월드컵경기장)의 지분은 도와 수원시가 6:4의 비율로 나눠 갖게 된다. 이 지분비율을 근거로 설립된 월드컵관리재단의 이사장은 도지사, 부이사장은 수원시장이 맡고 있다. 이사회도 도가 당연직 4명 등 총 10명, 시가 당연직 3명 등 총 5명이다. 이사회는 월드컵관리재단의 정관은 물론 경기장 시설사용규정 등에도 경기장 임대 등 수익사업의 의결을 한다. 그러므로 월드컵경기장은 사실상 도가 운영…
전주에서 순천에 이르는 호남고속도로와 순천에서 부산까지의 남해고속도로가 1973년 오늘 동시 개통됐다. 총길이 358km의 호남·남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광주와 부산의 운행시간은 7시간에서 3시간 30분으로 단축된다. 두 고속도로는 호남과 영남지역의 경제와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1969년 오늘 미국 우주선 아폴로 12호가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4개월여 전 발사된 아폴로 11호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발사된 유인 달 탐사선 아폴로 12호. 아폴로 12호는 달에 착륙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카메라의 고장으로 아폴로 11호 때와 같은 달 착륙 모습을 지구로 전송하지는 못했다. 아폴로 12호는 달의 운석들을 채취하는 등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발사 열흘 뒤인 11월 24일 지구로 무사히 귀환했다.
‘프라하의 봄’으로 불리는 체코의 자유화운동이 소련의 탱크에 무참히 짓밟히고 80여 일이 지난 1968년 오늘 소련군이 체코를 점령한 가운데 체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열린다. 자유화 운동을 지도했던 두브체크 공산당 서기장 등 개혁파들이 친소보수파 당원들에게 호된 비판을 받았다. 두브체크는 이후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해임되고 공산당에서 제명된다. 21년 뒤인 1989년 12월 체코의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 연방의회의장으로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죽은 자식 나이 세기란 말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사람이 죽은 뒤에 약을 짓는다는 뜻으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 한다. 그리고 죽은 뒤에야 청심환을 찾는다는 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이란 말도 있다. 일을 다 그르친 뒤에 아무리 뉘우쳐 봐야 이미 늦었고 아쉬워해도 소용이 없다는 내용의 속담들은 여럿 있다. 중국 전국책에 나오는 고사 가운데 망양보뢰(亡羊補牢)라는 귀에 익은 격언이 있다. 양을 잃고 나서야 우리를 고친다는 말이다. 말 잃고 마구간 고친다는 실마치구(失馬治廐)도 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실우치구(失牛治廐)도 있다. 또 늦은 밥 먹고 파장 간다는 속담과 벌겋게 닳아 오른 솥에 물 붓기라는 말도 있다. 마음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 해서 그 일만 하다보면 반드시 재앙이 따르거나 병이 생기기 쉽다. 미리 미리 예방하지 않으면 병이 난 뒤에 약을 써도 효험이 없는 것이 하나의 이치이기도 한 것이다. 굿이 다 끝난 다음에 장구 치는 것이 소용없는 것처럼 경각심을 우리는 가져야 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방과 대책을 세우는 현명한 마음 자세에 대한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란 말이 있다. 엎지른 물
총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7%를 넘을 때 고령화 사회라고 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9월 26일 발표한 ‘올해 100세가 된 사람’은 1천201명으로, 2011년 927명보다 29%나 늘었다. 통계청은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2030년에 1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이렇게 고령화 사회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노인 문제를 개인만이 아닌 국가의 책임이라고 규정하고 2008년 7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시작했고 더불어 요양보호사라는 자격증을 신설했다. 요양보호사는 고령이나 노인성 질병 등의 사유로 일상생활을 혼자서 수행하기 어려운 노인 등에게 신체활동 또는 가사활동 등 양질의 요양보호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현재 안산시에만 요양병원 1곳과 재가시설 28곳, 요양원 96곳이 있고, 그곳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는 최소 500명을 넘는다. 이들은 노인복지법에 따라 전문교육기관에서 이론과 실습을 포함 240시간을 이수하고 시험에 응시해 시·도지사가 발급하는 국가공인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이런 전문가들이 우리의 부모님을 집이나 의료시설, 요양원에서 돌봐주고 책임져준다니 얼마나 다행이고 안심이 되는가.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35일 앞으로 다가왔다. 유력 후보들은 나름의 정책행보를 이어가지만, 대다수 유권자가 볼 수 있는 건 후보자에 대한 이미지뿐이다. 유권자들이 후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미디어뿐이다. 현대 정치를 미디어정치라 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지에는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현 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인 노암 촘스키와 미디어 정치경제학의 권위자 에드워드 허먼은 일찍이 여론조작의 위험성을 설파한 바 있다. 이른바 ‘선전모델’이 그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미디어의 선전 시스템은 언론의 체내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언론은 이미 자유시장경제의 논리와 반공주의 같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언론은 특정 권력집단의 이해와 정치적 의제를 대변하고 강화하는 여과장치이자 선전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새로운 현실이자 실재라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아르의 주장도 있지만,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다. 이미지가 실재로 각인되는 순간 후보의 진정성을 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런 미디어의 환경 속에서 각 후보들의 정책적
1492년 8월 3일, 출항을 앞둔 콜럼버스의 가슴은 요동쳤을 것이다. 당시 그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서쪽 항로를 이용해 인도에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다보면 엄청난 부(富)를 가져다줄 향료와 금의 본고장인 인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배를 타고 한참을 가다보면 낭떠러지가 나와서 세상의 끝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세계관을 가졌던 시절이다. 따라서 입증되지 않은 서쪽 항로는 신천지를 여는 것이자 목숨을 건 모험의 출항이었다. 선원들도 세상 끝으로 간다는 불안감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원자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범죄자들의 죄를 사면해 선원으로 충당할 정도였다. 콜럼버스는 배 3척을 이끌고 항해를 시작한 지 2개월이 조금 지난 10월 12일, 바하마제도에 도달했다. 육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이를 구세주의 섬, 곧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쿠바와 아이티 등을 탐험하고 귀국한 콜럼버스는 약속대로 여왕으로부터 신세계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됐다. 꿈과 용기는 있었지만 재산도 지위도 없던 콜럼버스는 첫 항해를 해군제독의 지위로 출발하더니 돌아와서는 부왕으로 벼락출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