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 일반 시민들이 듣기엔 조금은 생소한 단어지만, 지방분권이 우리 생활과 지역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우리 모두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방분권이 성숙된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민주주의의 발전과 지방자치의 뿌리를 확고히 내리기 위해서는 완전한 지방분권이 이뤄져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지방분권은 지방에 활력을 심어주고 지방의 발전을 통해 국가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분권의 역사를 보면 2000년도에 본격적인 지방분권이 시작돼 12년이 지난 지금 시민단체와 학계 등을 중심으로 꾸준히 지방분권 운동을 전개하고 있고, 이에 일정한 성과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방에는 여전히 결정권 없이 중앙의 그늘 아래 예속돼 있다. 중앙의 소극적인 자세와 부처 이기주의로 실질적인 분권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방재정의 중앙정부 의존이 갈수록 높아져 세원 없는 지방정부, 권한 없는 지방정부가 돼 도시 경쟁력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필자가 안산시장이 된 지도 2년3개월이 지났다. 공직에 있기 전 시민으로서 바라본 시와 그 수장인 시장은 많은 권한과 힘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장 취임 이후 의
서울대 농대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일대를 떠난 시점은 2003년의 일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폐허로 방치된 이곳은 하나도 변함이 없다. 시민들은 옛 정취를 추억하며 이곳을 찾기도 하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엄격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가 떠난 이곳은 적당히 손을 보고 공원으로 지역주민들에게 개방되었어도 괜찮음 직하지만 10년 가까이 도심 속의 음지로 방치되고 있다. 얼마 전 한 사진동호회 회원이 서울 농생명대 캠퍼스로 잠입해 촬영한 사진을 동호회 홈페이지에 올리자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이곳에 어떻게 들어갔느냐며 방법을 묻는 질문이 줄을 잇기도 했다. 서울 농생대 부지가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면서 우범지대로 전락해 청소년들의 탈선지역으로도 전락하고 있다. 본보 보도에 의하면 농생명대 울타리 2.1㎞ 중 최소 13개 이상의 큰 구멍이 뚫려 있으며, 구멍 안쪽으로는 사람이 자주 다닌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지역주민들은 서울대 농생명대가 있을 당시의 분위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야말로 젊은 대학생들이 붐비는 활력 넘치는 대학가였다고 한다. 대학이 떠나고 지역경제는 나락으
식당에서 노부부와 아들, 며느리, 손자로 보이는 가족이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아들과 며느리, 손주는 서로 한마디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노부부만 할일 없이 텔레비전에 눈길을 주고 있다. 이런 풍경은 이제 낯선 것이 아니다. 길을 걸으면서, 차 안에서, 화장실에서, 심지어는 학교수업 시간에도 몰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고 있다. 스마트폰 중독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중독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란다. 컴퓨터를 이용한 인터넷은 집안이나 사무실, PC방에서만 할 수 있지만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교육청이 지난달 도내 초등학교 3~6학년생 53만6천여 명, 중고생 91만5천여 명 등 145만1천여 명을 대상으로 스마트폰 이용습관을 조사한 결과, 66%가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초등학생이 47.6%, 중학생이 75.9%, 고교생 77.2%가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루 평균 사용시간은 1~3시간이 45%로 가장 많았고, 3~5시간이 18%였다. 그런데 5시간 이상 사용한다는 학생도 10%나 됐다. 매우 걱정스럽다.…
흔든다 아주 작은 먼지 하나를 흔든다 먼지가 앉은 나비 날개를 흔든다 나비가 앉은 꽃잎을 흔든다 꽃이 잠자는 화분을 흔든다 화분이 놓인 탁자를 흔든다 탁자가 놓인 바닥을 흔든다 바닥 아래 지하실을 흔든다 지하실 아래 대지를 흔든다 대지를 둘러싼 지구를 흔든다 지구를 둘러싼 허공을 흔든다 허공을 둘러싼 우주 전체를 호흡이란 말이 있다. 호흡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자신이 호흡을 하고 있는지 호흡을 하고 있기에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호흡이 어떤 것으로 방해를 받았을 때 비로소 절박감과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호흡의 존재가치를 끝없이 인정하게 된다. 작은 숨소리란 바로 호흡의 소리다. 그 호흡하는 숨소리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자 생명의 쳇바퀴를 돌려가는 것이다. 숨소리가 다른 사물의 숨으로 숨소리로 전이된다. 그것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우리가 살아있어야 바로 모든 생명체의 존립이 이어지는 것과 같다. 흔들고 흔들린다는 것은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공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함기석 시인의 정신의 건전함이 드러난다. 귀담아 듣지 않으면 듣지 못할 미세한 숨소리나 우주와 연결하는 끈이고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공존케 하는 끈이다. 너의 호
1980년 오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기소된 야당지도자 김대중 씨에게 사형이 구형됐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은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을 김대중 일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로 조작해 김대중 씨와 문익환 목사 등 20여 명을 연행해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사형이 구형된 후 스즈키 젠코 일본 총리가 최경록 대사에게 김대중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이 문제가 내정간섭으로까지 비화돼 한국과 일본 간에 마찰을 빚기도 했다. 사형 확정 후 독일 미국 일본 프랑스 등지에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 등이 김대중 씨 구명운동에 나서자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1982년 12월 김대중 씨를 석방했다. 23년 후인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96년 오늘 전남 해남에서 익룡 발자국 화석이 전남대학교 허 민 교수가 이끄는 종합학술연구팀에 의해 발견됐다. 해남 우항리 고생물 화석지는 해남읍에서 진도방향으로 2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퇴적층은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약 8천300만 년에서 8천5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연속적인 수평층리가 잘 발달된 정교한 퇴적층군을 형성하고 있다. 1998년까지 계속된 발굴 작업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달린 새발자국 1천여 점과 익룡 발자국 300여 점 그리고 정교한 공룡의 발자국 500여 점이 발견됐다. 이로써 해남은 익룡, 공룡, 새발자국 화석이 한 지역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이 되었고, 공룡의 환경을 연구하는 데 있어 보존가치가 큰 지질학적 퇴적명소로 알려지게 됐다. 해남 우항리 지역의 화석과 퇴적층은 천연기념물 제394호로 지정된 데 이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중구삭금(衆口?金)’이라는 말이 있다. 뭇사람의 말은 쇠같이 굳은 물건도 녹여낸다는 뜻이다. 또 세 사람만 우겨대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는 속담도 있다. 그만큼 여러 사람이 떠들며 주장하는 여론이 아주 무섭다는 의미다. 사람들의 말이 많아지고 또 그러한 말들이 다양한 견해나 의견의 형태를 띤 여론으로 표출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민주주의란 모든 것이 주권자인 국민 대중의 여론을 밑바탕으로 해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여론이란 민주주의가 생동할 수 있게 해주는 활력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지향하고 있는 국가의 운영이 민주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견이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반영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의견이 충분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국민과의 소통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그만큼 국민과의 의사전달을 비롯해 제반의 것들이 소통되지 않고 불통, 즉 일방적인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국민들은 한정된 커뮤니케이션 매체와 대중적인 언론을 통해 접하는 정보를 전해 듣고, 더러는 출처나 근원이 정확하지 않은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정방폭포 인근에 낯선 이름의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서복전시관’이라 붙여진 현판으로 미뤄 서복이라는 인물을 조명한 전시관임이 분명한데, 서복은 고대 중국인이다. 알려진 대로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나머지 꿈은 불로불사(不老不死)였다.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고, 더 이상 성취할 것이 없는 시황제였지만, 죽음만은 피할 수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시황제는 영생을 보장하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천하 각지와 외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 무렵 시황제 앞에 도(道)에 정통한 방사(方士)임을 내세운 서복이 나타났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서불(徐市: ‘서불’로 읽는다)로 불리기도 하는 서복(徐福)은 시황제에게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는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한다”고 상주한다. 이를 크게 반긴 시황제는 60척의 배에 동남동녀 3천명을 비롯, 5천명이 넘는 장인들을 태워 보냈는데 서복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개념상 사기를 당한 것이다. 또 당시 선단의 규모가 그 정도였다면 한반도 혹은 일본 등 어느 곳에 정착해서…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103주년이 되는 날이다. 가을보다는 겨울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요즘인데, 국가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바친 만 30세의 뜨거운 피를 가진 청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구를 겨눴을 때도 이런 차가운 바람이 불었을까. 100여 년 전 그 날의 안중근 의사를 다시금 기억해보고자 한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검은 점이 7개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는 응칠이라는 아명으로 불렸다. 아버지 안태훈이 세상을 떠난 후에 안중근은 교육운동을 시작하고,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 당하자, 안중근은 더 이상 온건 노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병에 합류했다. 1909년 초,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는데,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진다. 유명한 ‘대한국인(大韓國人)’과 손바닥 인장이 찍힌 모습은 바로 이때 찍은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사찰을 명목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