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로 등장한 인공지능은 다양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우리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기계의 행동은 실제 우리의 행동과 비교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가 세상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75년 전의 일이다. 1950년 수학자 앨런 튜링은 ‘컴퓨팅 기계와 지능’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기계에 지능을 부여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게 바로 ‘튜링 테스트’ 개념이다. 그는 기계가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완벽하게 파악했다. 즉, 어떤 사람이 인간과 대화 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계와 대화 하고 있는지 구별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이즈음 워렌 위버는 기계가 자동으로 텍스트를 번역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냄으로써 인공지능에 의한 번역의 역사를 예고했다. 그로부터 단 5년 만인 1956년, 인공지능은 전 세계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앞 다퉈 인공지능 연구에 들어갔다. 기술 혁명은 점점 더 가속화됐고 많은 전문가는 인공지능이 2000년대에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혁명이 그리
보험연구원이 지난해 실시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1%는 가족 간병에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가장 선호하는 간병 형태로 ‘재가서비스’를 선택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년 노인 실태 조사’에서는 건강을 유지하면서 현재 거주지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하는 노인이 87%를 상회하였다. 내년 3월부터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됨에 따라 지역사회에 적합한 돌봄·의료 서비스 모델 및 보건의료와 연계한 통합 돌봄 거버넌스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전반적인 의료·돌봄·복지 수요를 바탕으로 재택의료센터를 확산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체계적이며 통합적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초고령사회 대응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정부는 요양시설에 입소하지 않고도 내 집에서 필요한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하고 장기요양 공급 체계 전반에 대한 개편과 제도적 개선을 병행해 가기로 했다. 전국적으로 95곳에 불과한 재택의료센터를 2027년까지 250곳으로 확대함으로써 노인들이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진료받을 수 있도록 돕는 ‘재택의료’를 강화하고,…
세상에서 위험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은 연대와 포용의 적이다. 영화 ’콘클라베’에 나오는 이 대사는 지금의 우리사회에 있어 진실로 귀담아들어야 할 경구이다. 이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그릇된’ 확신이라는 말이 된다. 한국의 선관위를 중국과 북한의 해커들이 조종하고 있다는 음모론, 대한민국에 현재 반국가세력, 종북 빨갱이들이 판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등이 그것이다. 얼마나 위험한지는 지난 서부지법 난동 사태에서 확인한 바 있다. 폭동을 일으킨 주범 젊은이들에게 정신교육으로 ‘콘클라베’를 감상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대(大)감독 스탠리 큐브릭(1928~1998)은 자신의 1971년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청년 알렉스(말콤 맥도웰)에게 루도비코라는 갱생 프로그램을 적용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사지를 의자에 묶어 놓고 눈을 감지 못하도록 눈꺼풀에 장치를 해놓은 채 역사 영화를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일종의 세뇌이다. 한국에서 요즘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극우 파시스트들을 보면 이렇게라도 강제적으로 의식을 개조하고 싶게 만든다. 극단은 극단을 낳는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된다. 그런 일
가까운 이웃부터 낯선 이까지, 우리는 타인의 선택과 행동을 관찰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특히 공적인 위치에 있는 인물들에게 쏠리는 관심은 유독 강렬하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 사소한 언행까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회적 담론으로 변한다. 문제는 이 관심이 일정한 선을 넘어설 때다. 호기심이 감시와 통제의 형태로 변질될 때, 타인의 삶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대중이 공유하는 ‘공적 자산’처럼 취급된다. 그 원인을 찾으려면 인간 심리의 깊은 층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거울삼아 자신을 평가한다. 비교는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열등감이나 질투로 이어진다. 공인의 삶이 더욱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구나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동경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흔들릴 때 은밀한 안도감을 느낀다. 성공한 이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자신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특히 공인의 삶은 대중이 공유하는 ‘공적 서사’가 되기에, 성취는 찬양의 대상이 되며 실수는 철저한 반면교사로 소비된다. 관심이 감시로 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감정의 투영이다. 우리는 단순히 공인을 관찰하는 것이 아
지난 연휴에 나는 네일 아트샵에 갔다. 아직도 네일 아트를 여성의 사치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지나치게 긴 손톱을 붙여서 일상생활조차 불편하게 하는 네일 아트를 항상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보면 나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제 나는 한 시간 동안 손톱관리를 받는 동안 손톱의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손톱은 우리 신체 중 최말단에 있어서 등한히 여기기 쉽다. 그러나 손톱의 색상, 모양, 강도 등은 우리 몸의 건강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손톱이 잘 부러지거나 갈라지면 노화나 영양결핍을, 흰 반점이 생기면 손톱 무좀을 의심할 수 있다. 검은색 세로 줄무늬가 생기면 피부암의 가능성이 있고, 둥글게 파임이 보이면 철분 부족이나 심장병 또는 갑상선 기능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가로로 파임이 생기면 당뇨병이나 순환기 질환이 의심된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손톱이 닳도록 일을 하시느라 번번히 손톱을 돌아보지 못하며 살았지만, 손톱도 명색이 톱 중의 하나라서 때로는 앙큼한 자존심을 세울 줄 안다. 딱히 위협하려는 요량은 아니지만 얕보았다가는 날카로운 톱에 할퀴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즉, 손톱의 존재는 우리 신체
한 편의 시와 시조는 그 사람 정신적 부활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라는 시조는 만고의 충신 성삼문의 푸른 혼으로 지금도 내일도 서슬 퍼렇게 살아 있을 것이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왕명을 맡아보던 예방승지 성삼문은 임금의 인장(印章)인 국새를 안고 통곡을 한다. 그 뒤 성삼문은 세조와 그 일당을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역모 죄로 한강 백사장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때 성삼문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절개를 낙락장송에 비긴 시조를 남기고 갔다. 이것이 인문학 정신이요 문학의 정의이다. 문학은 어떤 형태로 나타내든 결국은 자기 삶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종(種)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아 쿠랑은 말했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 걷는다는 것은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인간은 걸으면서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기도 한다. 아침 산책길에서 본다. 길에 떨어져 있는 고목나무의 부러진 가지를. 나무는 지난밤 시간의 무게를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각종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공해에는, 미세먼지와 같은 공해 문제도 있고, 자동차와 같은 소음 공해도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정치권에서 발생하는 공해에도 시달려야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소음 공해와 정치적 공해가 합쳐지는 모양새다. “헌법 재판관들을 처단하라”, “"공수처, 선관위, 헌법재판소, 불법과 파행을 자행하고 있다. 이 모두 때려 부숴야된다. 쳐부수자!", "지금 윤석열이 온갖 거짓말을 하고 잔꾀를 부리고 어느 신부님 말씀대로 'X랄 X광'을 하고 있지만 윤석열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등등의 말들은 정치 공해와 소음 공해가 합쳐진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진보, 보수 각 진영의 적극 지지층들은 자기 진영의 이런 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시원한 ‘사이다 발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중도층들은 이런 발언을 들으면 정말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동아시아 연구원 측의 조사(동아시아연구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월 22일부터 23일까지 18세 이상 1514명을 대상으로 웹 조사를 실시,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52%P.)에 따르면, 현
지난 기고문을 통해서 개인간 금전거래시에도 차용증을 충실하게 작성하고 채무불이행시 신속한 집행을 위해서 약속어음공정증서를 작성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간에 종종 큰 금전을 대여하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그 소유 부동산이나 제3자 소유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해당 담보물건의 등기사항전부증명서를 꼼꼼히 확인해 근저당권 설정이나 압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시세와 비교하여 추가적인 담보여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통상 시세의 70% 정도를 기준으로 해당 부동산의 근저당권의 채권최고액의 합계액이 이를 초과하면 해당 부동산에는 더 이상 담보여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금전거래는 통상 민사소송을 통해서 해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변제기에 이르러 채무자가 자신이 변제능력이 없음을 자인하는 경우에는 실제 민사소송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러한 경우 채권자는 채무자가 금전대여 당시 실제 변제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자신의 변제능력이나 변제방법, 대여금의 사용용도를 기망하여 돈을 빌렸다는 것을 이유로 사기죄로 고소를 하기도 한다. 대법원의 판결을 살펴보면 타인으로부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1392년 조선이 한양에 개국하고 3년후 경복궁을 건립하면서 정문을 세웠다. 세종 때 정문을 광화문으로 명명하여 오늘에 까지 이어진다. 광화문 앞 거리는 육조(六曹)거리 라고 불리우고 양 옆으로 조선시대의 중심지였다.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국정이 논의되고 시장이 열렸다. 지금은 육조거리가 세종로거리로 지명이 바뀌어 정치의 광장이 되고 있다.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곳에서 탄핵의 찬⦁반을 둘러싸고 함성소리가 장안을 가른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지만 주장하는 목소리는 상반된다. 이제 우리는 가뿐 숨을 멈추고 광화문으로부터 들려오는 역사의 소리를 들어보자. 광화문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허물어지고 1865년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복원된 광화문이 다시 허물어지질 위기를 맞은 것은 일제시기였다. 일제는 경복궁 경내에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광화문을 철거하려고 하였다. 이때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생명이 조석(朝夕)에 절박하였다. 네가 이 세상에 있다는 기억이 냉랭한 망각 가운데 장사(葬事) 되어 버리려 한다” 이것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목소리였다. 1922
요즘 직장을 그만두거나 옮기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한다. 곧 퇴사를 앞둔 지인 K씨의 사연을 소개해본다. 50대 여성인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회사에서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점점 버겁다고 했다. 이직조차 순탄치 않아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어느날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다 문득 깨달았다고 했다. 자기 또래의 여성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최근 들어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언제까지 회사에서 버틸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한 후 해결책을 마련하려는 모습이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직장을 다니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던 그였다. 그러나 현실이란 벽 앞에서 ‘직장’이라는 조직을 졸업할 때가 됐다는 걸 그는 결국 인정했다. 그가 퇴사 후 제2의 직업으로 삼기로 결정한 일은 다소 의외였다. 바로 장례지도사. 고인의 마지막 길을 경건하게 배웅하는 의미있는 일이긴 하나,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서다. 솔직히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과 울부짖음을 바라보는 것도 버겁고, 차갑게 굳은 고인과 단둘이 한 공간에 머물 자신도 없다.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