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12월 초에 일본 혹가이도 아사히카와(旭川)시를 다녀왔다. 수원사진작가 일행과 함께 ‘한·일 사진작가 교류 10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머무는 1주일 내내 엄청난 눈이 내렸다. 왠지 모르게 눈이 쌓인 겨울 들판이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간 돈독히 정을 쌓은 탓인지 도착 다음날 시작된 환영만찬과 함께 행사는 자못 진지했다. 몇 달 전에 취임했다는 서른 아홉의 젊은 니시카와(西川)시장을 비롯한 마츠오까(松岡)정장, 노다(野田)한일사진교류회장 등 많은 사진교류회원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쇳덩이로 만들어진 ‘차가운 카메라’로 맺어진 한일사진작가들의 ‘뜨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한 자리였다. 수원화성축성200주년 촬영대회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간 서로 오가며 다져진 결과였다.
사진은 사물을 찍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에 투영된 자신의 마음을 찍는 것이다. 그 곳에 머무는 동안 눈발이 날리는 들판을 누볐다. 물론 일본 사진작가도 함께였다. 정다운 마음을 담아서인지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는데도 풍광이 전혀 황량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엔 겨울 들판에 ‘무슨 소재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내 나의 온 몸과 마음이 열렸다. ‘구릉의 마을’이라는 비에이(美瑛)쵸의 오솔길, 다양한 곡선의 구릉, 빈 집과 빈 창고, 언덕위에 외롭게 서 있는 나무 한그루, 삐죽삐죽 솟아나오듯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이 모두 정다웠다.
예술은 표현이다. 표현되지 않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구체적으로 ‘표현된 무언가’는 예술작품이 된다. 사진은 삼라만상과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창(窓)이다. 만물은 작가의 관심과 애정을 반긴다. 관심과 애정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무례한 일인지도 모른다.
커다란 망원렌즈를 카메라에 달고 어떤 위치에서 어떤 렌즈와 어떤 앵글로 촬영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일본 작가들이 앞장선다. 이 지역에서 작품 활동을 한 유명한 사진작가 마에다신조(前田)가 촬영했다는 포인트를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무엇을 찍을까’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작가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 내 마음의 눈이 뜨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환희가 나도 모르게 넘쳐흘러 비에이쵸의 겨울들판은 결코 춥지가 않았다.
예술은 근원적으로 존재를, 실질적으로는 삶을 그 지평으로 삼는다. 예술가는 감각적인 직관의 힘으로 세계를 강도 높게 느낀다.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감각적인 이미지를 직접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거기에서 예술이 탄생된다.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를 구성하는 행위, 곧 이미지를 만드는 것 그 자체다.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生成)에 있다. 사진은 결과로 나온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진을 있게 만든 생성이 중요하다. 카메라로 찍어내는 행위는 대상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복제개념이 아니다.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시각적 증거물을 만드는 행위다.
‘사진의 마을(寫眞의 町) 히가시카와’(東川)는 6천여 명에 불과한 작은 읍이다. 운전기사를 자청한 후쿠다(福田) 아사히카와시 사진연맹 회장 산하에 20여 개가 넘는 사진작가 단체가 활동 중이라고 한다. 8백여 평의 철근콘크리트로 된 사진전용전시관이 10년 전에 세워질 정도니 그 열도를 알만하다. 사진예술이 작은 읍지역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는 확증이 강하게 다가왔다.
예술은 우리 삶의 깊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효되고 그 예술정신이 쉴 새 없이 번지고 자라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예술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창조적인 생산이다. 예술문화가 결합할 때 고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다. 아름다운 시각예술의 총아로 인식되고 있는 사진은 작가가 보는 것만큼만 만들어 진다.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사진작가가 추구하는 결정적 순간이란 찰나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시간적 순간’이 아니다. 사물의 의미가 작가의 내면과 만나는 ‘심리적 순간’이다. ‘결정적 순간’이 포착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피사체를 보고 ‘바로 이거다’라고 느끼는 순간 작가는 행복감에 젖는다. 영혼의 해방감을 느끼고 눈을 다시 연다. 사진, 그것은 더 넓은 객관의 지평과의 만남이다. 눈 내리는 하늘과 눈 쌓이는 땅의 조화로운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행복과 기쁨과 희열을 모두 가졌던 사진 기행이었다.
김 훈 동 <수원예총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