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한창 깨가 쏟아져야 할 신혼의 신부가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능력과 위신을 가진 사람인데 혼수감이 적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 사납다면서 신랑이 혼수에 대한 불평을 터뜨릴 때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아픔과 상처 때문에 이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아주 딱한 내용이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신랑의 결혼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정말 신부를 사랑해서 결혼했는지 아니면 혼수감을 기대하고 결혼했는지 의문스러웠다. 사람을 사랑하는 결혼이어야지 혼수감을 사랑하는 결혼이라면 문제가 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남자가 있는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키도 크고 나이도 먹었는데 하는 짓은 어린아이와 같다면 아무도 이런 사람을 정상인으로 보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때 일본의 수용소에 있는 영국과 미국의 포로 2만명중 8천명이 사망했는데 그 대부분이 영양실조 때문이 아니고, 질병 때문도 아니고, 과로 때문도 아니고 살아나갈 희망이 없다는 절망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용기도 주고 좌절도 준다. 희망도 주고 절망도 준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기분 나쁠 때가 있다면 그건 바로 멸시 받을 때이다. 혼수감이 적다고 인격을 무시당하고 얼마나 많은 구박과 멸시를 받았겠는가. 좌절과 절망을 주는 말을 얼마나 들었겠는가.
사람들은 겉치레와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고 그 가려진 참모습을 백안시 하는 잘못을 범할 때가 있다.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함과 그 진가를 알지 못하고 간과하다가 놓치고 나서야 후회한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를 살면서 삶이라는 수업을 한다. 그러한 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즐거워하고, 고통 받는 수 만 가지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 수업이 끝나는 시점이 되면 자신의 삶에서 부족했고 아쉬웠던 부분을 후회하게 된다.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제안된 천동설은 1천400여 년간 태양계의 운동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으로 존속되어 왔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이는 「두 가지 세계관에 관한 대화」라는 논문을 통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하고, 모든 천체가 그 주위를 공전한다’는 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지구가 우주에 정지하고 있는 태양의 둘레를 자전하면서 공전하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갈릴레이는 그 논문으로 교황청에 의해 로마 이단심문소로 소환되었고, 마침내 교황청의 압력에 굴복하여 지동설을 부인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갈릴레이는 사면을 받아 석방되면서 “그래도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후 로마교회는 360년이 지난 1992년에서야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맞는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교황청은 천동설의 오류를 인정하고 교회의 잘못을 회개한다고 발표했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알량한 자존심과 체면, 권위의식 때문에 고집불통이 될 때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도자들이 자신의 과오와 허물을 공개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드나드는 것보다 어렵다. 그러나 그 용기가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이 아닐까?
국민들은 완벽함보다는 진실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용기 있는 지도자가 많을수록 이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지도자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다’ 정말 멋지고 위대한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반성해야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