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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희칼럼] 유무상통 그리고 역지사지

남북정상회담 盧 “이질 실감” 對 북한 이해노력 부족 인정
10·4 정상선언 준수자세 돌입 ‘1민족 2체제’ 가능성 넓혀야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3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중 오전 회담을 마치고 수행원들과 오찬을 갖는 자리에서 꺼낸 말이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고사 성어이다. 북측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하자는 뜻이다. 노 대통령 자신이 이질 체제의 벽을 실감했다는 고백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이 소식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오후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역지사지란 말은 맹자 이루(離婁)편에 나오는 역지 즉 개연(易地 卽 皆然: 처지를 바꾸면 다 그렇게 했을 것)에서 유래한다. 고대 중국에는 하우와 후직이라는 전설적인 성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태평시대에도 백성에게 사소한 잘못이나 어려움이 생기면 이를 모두 자신들의 부덕 때문이라 여겼다. 난세에 살았던 공자의 제자 안회는 안빈낙도하면서 도를 이뤘다. 훗날 맹자가 이들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한 말이 바로 ‘역지 즉 개연’이다.

남측 사람 대부분은 북한을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나오는 가장 흔한 말이 ‘개혁과 개방’이다. 남측이 북한의 개혁이나 개방을 말하는 것은 북한의 ‘유교적 사회주의 체제’를 무시하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이 회담 중 개성공단을 꺼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은 “개성공단이 어찌 성공이냐? 남측이 정치적으로만 이용하고 있다”고 역정을 냈다. 개혁이나 개방은 북한 스스로의 선택사항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으로 똘똘 뭉친 폐쇄된 사회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조선왕조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해서 도입한 경국철학이 주체사상이다. 대륙세력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해양세력인 일본과 미국 같은 주변 강국에 의해 다시는 농락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집단표상이 주체사상으로 정리된 것이다. 북한은 여기에 유교식 가부장제를 첨가했다. 숨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하룻밤 더 묵었다 가시라”고 말한 데서 유교적 흔적(붕우유신)을 찾을 수 있다.

임기 말의 노 대통령은 사실 북한 땅을 밟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대북 정책에 대해 ‘대북 특검’을 선택했고, 이로 인해서 북한과 남측의 김대중 지지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요즘 베이징 6자회담을 고리로 북· 미 관계는 ‘견원지간’에서 ‘대화의 상대’로 급변하니 방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기다 대선정국에 대한 전략적 판단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걸어서 북방한계선을 넘어갔고, 이 이벤트는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 상황임을 세계에 알리는 성과를 거뒀다. 마침내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10·4 정상선언’을 낳았다. 이는 두 지도자의 통 큰 결단의 산물이다.

6·25전쟁 이후 양측간엔 ‘우리끼리’ 많은 합의가 있었다. 최초의 합의는 1972년의 ‘7·4공동성명’이다. 박정희는 영구집권 기도에 대한 국내외 민주세력의 저항이 거세지자 중앙정보 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밀사로 파견, 김일성 수상과 회담하고 이 성명을 채택했다. 이 성명의 정신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나 양측 모두 이를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도 한반도 비핵화선언(1991년)과 남북기본합의서(1992년)를 채택했는데, 비핵화선언만은 북측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이유로 파기했다. 북측은 이후 경제난을 감수하면서 미사일과 핵 실험에 성공, ‘무서운 소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여기까지의 대북 외교는 반공정부의 업적이다. 반공정부도 민족 문제라면 화해의 길을 걸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어떠한 이념도 민족을 우선할 수 없는 것이다(김영삼).

평화주의자인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 중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의 아들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좌하고 한반도 통일의 초석일 ‘6·15 공동선언’을 창출했다. 이 선언은 남측보다 북측이 더 금과옥조로 섬긴다.

이번 ‘10·4 정상선언’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방안을 강구한다는 표현이 들어 있다. 북측은 평화보다는 통일을 더 집착한다. 남측에서는 ‘6·15 선언’을 평화·통일 세력만이 기념할 뿐, 반공 또는 의북(疑北)세력은 철저히 외면한다.

북한이 저 넓은 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상대를 비난하거나 배척하는 태도는 사대사상의 발로이다. 북한이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남측의 책임도 일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0·4 정상선언은 ‘1민족 2체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선언을 준수하자면 진정한 역지사지(In a person’s shoes)의 자세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이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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