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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백범의 비극

정행산 객원논설위원

어제, 6월 26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白凡) 김구 선생의 서거 59주기였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일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백범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고,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로도 대한민국의 정체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백범의 신념은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아니라 ‘남북 상호의 수정과 양보로써 건설되는 통일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 2월 9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공산당 단독정부를 구성해놓고 있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발족과 동시에 20개 조항으로 된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인민군대’를 창설했다.

이처럼 남한지역에 앞서 이미 북한지역에 공산당 단독정권이 수립된 상황에서 백범의 ‘남북 통일체 건설’의 꿈은 무망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1948년 4월 19일 백범은 38선을 넘어 결연히 평양으로 향한다.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의는 철저히 소련 군정의 레베데프 민정청장이 세운 각본대로 진행됐다.

대표자 연석회의와 그 후 있었던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담’ 모두 북한 사회주의 정권의 정통성을 제고하기 위해 소련 당국이 백범의 이름과 진정성을 악용한 것이었다. 백범이 소련의 속임수에 말려든 까닭은 ‘지금 민족 앞에 놓인 문제가 너무 크다’는 상황인식과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범은 당시 눈앞에 닥친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옳은 길을 가야 한다는 그의 비장함은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백범은 결국 현실정치에서 패배했다. 그의 실패는 국가공동체를 이끄는 뛰어난 정치가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인 ‘현실에 근거한 이상’의 중요성을 성찰하게 한다. 현실로부터 괴리된 이상과 명분은 공허하며 최악의 경우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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