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와 일제 강점하에서 민족해방, 국권회복,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힘쓴 애국지사는 일일히 매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단재는 민족주의 사상가,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서 전인적(全人的) 역할을 수행한 분이다. 그는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군 어남리 도리미에서 농촌 선비 신광식과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풍양조씨와 결혼하였으나 할아버지 신성우로부터 학문을 익혀 주자학의 대인(大人) 소리를 들었다. 1905년 26세 때 합시(合試)에 입격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지만 “관직은 나아갈 바가 아니다” 하여 바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취임해 시론(時論)과 사론(史論)을 통해 민중 계몽과 배일운동에 힘썼다.
이후 그는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주력했는데 31살 때였다.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는 자는 은사(隱士)이며 굴복하는 자는 노예이며 격투하는 자는 전사(戰士)이니, 우리는 이 삼자 중에 전사의 길을 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여 꼿꼿이 앉아 세수를 하는 바람에 늘 옷이 젖었다는 일화가 있다.
1928년 5월 8일 유맹원(劉孟源)이란 가명으로 중국으로 재입국하려다 체포돼 대련 감옥에 수감됐다. 투옥 중에도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등 역사학자로서의 열정을 저버리지 않았다.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옥중사하니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는 생전에 “내가 만일 죽으면 시체가 왜놈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후손을 위해 충북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 상당산(上堂山) 기슭 고두미 옛 집터에 암장되었다.
묘비는 만해 한용운이 벌석(伐石)하고, 위창 오세창이 ‘단재 신채호지묘’라고 서각(書刻)한 것을 신석우가 몰래 가져다가 세웠다고 한다. 장례 비용은 신석우 200원, 송진우 50원, 방응모 30원, 여운형 30원 등을 모아 충당했다니 그 우애 또한 본받을 일이다. 올해로서 단재 서거 72주년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