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無窮花)가 피기 시작했다. 무궁화란 말은 16세기 초부터 나타나는데 당시의 한자어는 ‘목근화(木槿花)’였다. 무궁화는 햇빛을 받을 때 온 생명을 다해 피었다가 해가 지면 낙화와 더불어 생을 마감한다. 이러한 하루살이는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덧없을 상징하지만 행복의 절정에서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교훈을 준다. 무궁화는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지만 그 다음날에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이같은 거듭 피어나기는 일신지미(日新之美), 즉 나날이 새로워지는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그래서 하우담(夏候湛)은 그의 ‘조화부(朝華賦)’에서 “아아 신령한 나무의 아름답고 기이함이여, 진실로 쌓인 양기의 순수한 정수로다.”라고 노래하였다.
무궁화가 다른 나무꽃과 다른 것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 무렵에 꽃을 피우는 점이다. 몇몇 시인은 때놓친 개화라며 실기(失機)에 비유했지만 우리 나름으로는 독자성과 차별성으로 해석할만 하다. 옛날 당나라 어느 여왕이 동지 섣달에 곷??피라고 기도를 하자 다른 꽃들은 모두 피었으나 무궁화만은 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우리 한민족이 오만한 당에 굴복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고려 때 문장가 이규보는 그의 막역한 친구 문(文) 아무개가 ‘무궁(無窮)’이라 주장하고, 박(朴) 아무개는 ‘무궁(無宮)’이 옳다며 화답을 요청했을 때 서로의 아집이라며 ‘근화(槿花)’라고 언급한 바가 있었다. 조선을 근역(槿域) 삼천리라 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굳어진 것은 한말인 1907년 윤치호가 애국가 후렴에 썼고, 1925년 10월 25일 동아일보에서 ‘조선 국화 무궁화 내력’이라는 해설 기사를 게재한데 이어 안창호가 국수(國粹)운동을 전개할 때 무궁화를 국화로 주창하였기 때문이다. 또 독립운동가이면서 교육자요 언론인인 남궁 억이 1918년 강원도 홍천 모곡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전국에 묘목을 보급한 것도 큰 몫을 했다. 무궁화의 대표 품종인 백단심(白丹心)은 꽃잎이 하얘서 때묻지 않은 깨끗함을 나타내고 진홍빛 화심은 태양처럼 뜨거운 정열을 나타낸다. 무궁화는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