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다. 7월 26일 양측은 5가지 의제 선정에 합의했고, 곧이어 협상이 시작되었다.
5개항의 의제는 첫째 회의 의제 채택, 둘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 지대 설정, 셋째 정전 실현을 위한 구체적 협정, 넷째 포로협정, 다섯째 양측 관계 제국 정부에 대한 건의사항(정치회담 개최문제) 등이었다.
양측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의제는 둘째항인 군사분계선의 설정이었다. 유엔측은 “휴전협정 체결 시까지 전투를 계속한다”는 원칙 아래 ‘접촉선’을 주장했고, 공산측은 ‘38도선’을 주장했다. 공산군 대표 남일은 “38선을 쌍방의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쌍방이 38도선에서 각각 10㎞ 씩 물러나서 그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하자”고 했다. 그러나 유엔측은 이를 거부하고 우월한 해군과 공군력을 내세워 보상을 요구하면서 휴전협정 체결시의 접촉선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럴 즈음 ‘개성사건’이 발생했다. 개성사건이란 개성지역에서 양측 간에 생긴 크고 작은 마찰 사건으로, 1951년 7월 16일 유엔군 병사들이 판문점을 향해 사격을 가한 것을 공산측이 문제 삼은 것인데 이후 14차례나 개성사건이 어어졌다. 문제를 삼은 것은 유엔측 1회, 공산측 14회였다.
결국 개성사건은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유엔군사령관 릿지웨이는 9월 27일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고, 공산측은 10월 7일 유엔측 제의를 받아들였다. 릿지웨이로서는 군사분계선 설정과 관련해 유불리를 따진 끝에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결과로서는 북측에 개성을 내주고 말았으니 두고 두고 이쉬운 일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때 개성사건을 극복하고 ‘접촉선’을 관철시켰더라면 오늘날의 휴전선과는 다른 군사분계선이 설정되었을 것이다.
금강산 사건에도 불구하고 개성 관광은 계속되고 있다. 개성은 말이 없다. 하지만 세계인은 개성을 주목하고 있다.
이창식(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