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인권운동의 대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을 기억한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보다 정확하게 80년대 대학가에서 운동권 노래로 불렀던 ‘우리 승리하리라’는 흑인 영가풍의 노래 때문이다.
전(全) 생활영역에서 천대받던 흑인들을 위한 비폭력 인권운동에서 숙연하게 불렸던 노래. 우리 모두가 온 마음으로 믿기에(deep in my heart), 서로 손 맞잡고 나아가며(walk hand in hand), 지금의 두려움을 떨치고(not afraid), 마침내 언젠가 승리할 것이라(We shall overcome someday)는 가녀린 바람의 노래.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는 건국 이래 미국 번영의 근간이었다. Roots(1977년) 그리고 The Color Purple(1985년) 등의 영화를 보면서 흑인들의 희생에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으며, 한편으론 그 희생에 기반하여 안락을 누리는 미국 주류사회의 야만에 분개하곤 했었다.
미국 흑인의 한결 같은 가녀린 바람. 이제 새로운 미국의 대통령으로 흑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가 취임함으로써 그 일부 이루어졌다면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국외자임에도 나는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더욱이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는 흑인인 오바마가 유일 패권국가인 미국 행정부의 수장, 아니 전 세계 정치의 최고 지도자가 된 쾌거를 오랜 주류의 야만을 청산하는 하나의 중대 사건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주류와 비주류의 분리는 철저히 고착되어 나타난다.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는 비주류의 희생을 교묘하게 강요한다. 그러기에 비주류의 불만은 증폭되고 결국 기존 질서를 전복하는 하나의 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파괴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해 주류가 빈번히 활용하는 전략이 우상화이다. 주류는 비주류의 극히 일부를 주류에 편입시켜 우상으로 조작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비주류가 이 우상을 쫓도록 함으로써 불만을 해소케 한다.
미국에서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흑인 슈퍼스타가 바로 전형적인 우상들인 것이다. 비주류 우상이 횡행하는 미국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언젠가 우리 승리하리라는 그 하나의 ‘언제가’이지 않을까?
물론 행정수반이라는 대통령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자리가 주류의 대표적 정점임은 분명하기에 미국의 흑인, 전 세계의 흑인, 나아가 주류로부터 배제된 모든 억눌린 사람들 모두에게 이제까지의 아픔을 풀어주는 ‘하나의 씻김굿’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제 그 흥분을 가라앉히며,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오바마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내 바람은 간단하다. 그의 대통령 취임을 하나의 씻김굿으로 느끼는 모든 억눌린 사람들이 보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이들을 위한 국정수행 또한 세계전략을 가질 것을 바란다.
또 미국의 국가 위상에 걸맞게 그의 관심은 전 세계의 억눌린 사람에게 향하기를 진정 바란다. 아버지가 케냐 출신이며, 또 그 자신이 어린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자랐기에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못사는 나라와 그 민중에 대해 잘 알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앎에 걸맞게 유력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진정한 역할을 찾고 제대로 그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을 기대한다.
잘 알다시피 오바마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분명 흑과 백의 피가 반반 섞인 혼혈인이다. 한데 백인 사회에서는 그를 백인이 아니라며 배제한다. 백인 중심의 기득권 계층이 혈통 근본주의에 입각하여 나와 나 아님의 구분에 지나치게 폐쇄적인 결과이다. 반면 분명 백인의 피가 섞여있건만 흑인 사회에서는 그를 흑인으로 수용한다.
비주류이기에 주체적으로 배제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포함할 수도 있으련만 그를 수용하는 비주류의 포용은 인상적이다.
오바마에게 바라는 나의 기대를 적으며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비주류의 포용 그리고 그 지혜를 오바마에게서 기대한다. 누구를 위한다는 편향성으로만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립되는 상대를 배려하여 늘 도덕적 정의를 세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