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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조의 수원 도시 건설 그리고 오늘

공권력에 짓밟힌 생존권 ‘소통의 시대’ 를 기억하자

 

수원은 18세기말 국가적 사업으로 개발된 신도시이다. 원래 수원은 화성의 송산 인근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의 백성을 팔달산 자락으로 이주시켜 형성된 도시가 오늘날 수원인 것이다. 송산에서 팔달산 자락으로 옮긴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정조(正祖)의 지극한 효심에 기인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묏자리인 영우원(永祐園, 서울 전농동)이 탁월한 길지가 아닌 초라한 형색이기에 정조는 늘 가슴 아파했었고, 당대 명당으로 손꼽히던 송산으로 천장(遷葬)을 결행했던 것이다. 그 결과 송산에 살던 백성들은 소개(疏開)되어 팔달산 인근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전제 군주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역시 지극한 효심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수원을 옮기게 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당시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송산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군사 요충지였다. 하지만 새로이 요구되는 삼남으로의 교통 중심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다소 규모가 작았다. 또 험준한 지세로 접근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정조는 한양 중심의 권세가를 견제하거나 대체할 새로운 세력의 형성을 희망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요구에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수원이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정조의 명을 받든 이가 무관(武官) 조심태(趙心泰)였다. 무관의 일반적 단순우직(單純愚直), 그리고 전제 군주의 명(命)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팔달산으로의 이주가 무척 강경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주는 결코 무리하게 강행되지 않았다. 우선 가옥 규모를 고려한 공정한 이주비가 지급되었다.

또 추수 등을 이유로 이주를 머뭇거리는 백성을 위해서는 상당한 말미도 주었다.

특히 이주 후의 안정적 정착을 위해 조세를 감면하였으며, 상업 진작을 위한 자금 지원도 이루어졌다. 심지어 정조의 순행이 임박했음에도 주군에 대한 충정만을 앞세워 백성의 여망을 외면하지만은 않았었다.

최근의 용산 참사를 떠올린다. 여섯 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다. 공권력의 강경 진압이 불러온 참사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정부 여당에서는 철거민들의 과격함이 불러온 참사라 했다. 참사 발생 이후에도 정부 여당은 철거민의 아픔에 직면하여 위무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일부 폭력성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을 뿐이다.

또 순진한 철거민을 배후에서 부하 뇌동하는 전국철거민연합의 사악성만을 집중적으로 성토하였던 것이다.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이 '떼잡이'였던가, 그리고 같은 아픔을 공유하기에 동참했던 이들이 그저 폭력성만을 추구하는 전인격적 파탄자였던가?

참사의 원인은 비교적 단순했다. 먼저 자기 이익만을 탐욕스럽게 관철하려는 자본이 우선 존재하였다. 그리고 자본의 탐욕으로 거주와 생존의 권리를 박탈당했기에 최소한의 요구를 주장하는 철거민들이 있었다.

자본과 철거민 사이의 인내와 타협이 해결의 기본 방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 관철에 일방적으로 편드는 공권력이 있었고, 이후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돈만 횡행(橫行)하였고, 사람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는 야만만이 있었다.

광교산에서 흘러온 온 물줄기가 완만하게 휘돌며 연못을 이루고, 잠시 머물렀던 물줄기는 화홍문(華虹門)을 통해 성안으로 스며든다.

연못에 연한 큼지막한 바위 위에 버드나무를 쫓아 온갖 꽃을 완상하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 있다. 무작위(無作爲)의 물줄기 그리고 순(順)한 지세와 조응(調應)하는 어울림이 탁월하다.

특히 정자 옆에 자리한 암문(暗門), 비록 규모가 작기에 겨우 한 두 사람 드나들 정도지만, 성안과 성 밖의 소통을 위해 마련되어 더 한층 방화수류정의 성가(聲價)를 높인다.

자연과 어울리며 늘 백성과 소통하던 정조대왕 그리고 백성의 편에서 정사를 추진하던 사려 깊은 무관 조심태, 방화수류정에 오르며 속절없이 그들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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