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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단비였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은, 여러 가지 죽음과 관련된 사건으로 메말라가던 우리의 가슴을 단비처럼 촉촉이 축이셨다.

마치 정글에서나 있을 법한 죽음들로 처참하였던 우리들에게 정말 극적 반전을 가져다 준 것이다.

연쇄살인범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는 여러 명의 무고한 피해자들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어떻게 납치되어 살해되는 것인지 발견하게 되었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잠시 동안 사형제 폐지 논란에 다시 한 번 휩싸였다.

그렇게 많은 순진한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살인범에 대해서도 생명 박탈을 감행할 수 없는 것인가?

다시금 온 국민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일부 인권단체와 국회의원들은 인간의 생명이란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반면 인터넷 조사에 응한 국민의 반 이상과 한나라당은 무기한 연기되어 오던 사형을 당장에라도 집행해야 한다고도 하였다.

누가 옳은 것인가? 국민들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한편 환자의 생명 연장을 놓고 의료계와 환자 보호자 측의 법적 논쟁도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바로 이것은 안락사, 즉 존엄사에 관한 논의이다.

병원 측은 현재 인위적 의료행위로라도 끝까지 생명권을 연장시켜야 한다는 입장이고 보호자 측은 그와 같은 생명의 연장은 환자의 의사에도 반하는 것이기에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죽음에 대한 논쟁이다. 과연 인간은 본인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어디까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용산사건 역시 무고한 희생자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로 인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개발’이란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 나아가 생명마저도 담보되어야 하는 것인지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었다.

소위 철거 대상이 되는 지역에 있어 사법권이란 무주공산이란 것. 철거 대상 지역 어디에도 정의란 존재키 어렵다는 점이 다시 한 번 조명되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개발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죽음 역시 우리의 마음을 한 없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으며 더욱이 걱정스러운 점은 문제가 되는 재개발이 서울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확대 될 것이란 전망이다.

이들 사건들은 모두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폭력적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외관상의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나의 목숨이 타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반의사적 폭력인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일개 개인 사이코패스에 의해 생명이 박탈되는 경우도 있겠으며 동시에 국가의 권력이나 의료전문가의 결정에 의해 생명권이 좌우되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경우에라도 일단은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이런 논의가 진행된다는 것인데, 이는 큰 문제이다.

심지어 허무하기까지 하다. 허나 이 와중에 마주치게 된 추기경님의 선종은 죽음에 대한 전혀 다른 각도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

5일의 장례 기간 중 내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의 평화로운 모습. 그는 주검조차도 아름다운 영적 존재였다. 그동안 많은 혼란으로 상처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주셨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주셨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서너 시간 씩 줄을 서서도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며 체온을 나누었던 많은 조문객들. 그리고 쇄도하는 장기기증 서약. 바로 이것을 두고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그는 이미 우리의 마음에 부활하였고 바로 이 같은 통합과 용서의 힘이 대한민국에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불의에 저항하던 용감함과 가장 마지막 순간에까지 자신을 ‘바보’라 칭했던 겸손함, 그리고 여전히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을 그에게서 본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치유의 원천이 되며 귀감이 되고 있다. 피곤하고도 좌절되는 순간순간에 그래도 그와의 이별은 죽음조차도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누구나 두려워했을 마지막 순간 역시 무한한 편안함과 안식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셨다. 남은 나날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하루를 살아낼 용기를 바로 ‘그’로부터 축복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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