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시각 자료를 쉽게 찾고 연구하기 좋은 시대가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10여년 전만해도 책이나 도록이 아주 중요한 자료였다. 그래서 집이 더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애지중지 책과 도록(圖錄)을 서가에 고이 보관했다. 자료가 많아질수록 활동공간은 좁아지고 집은 더러워졌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환경이 변했다. 굳이 책이나 무거운 도록은 보관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책이나 도록은 보관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집 더러워지고 이사갈 때 아주 힘들다. 자료를 덜 보관하니 집이 한결 깨끗해졌다. 주변도 깨끗해지니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10년 전 ‘거장의 숨결’이라는 전시를 큐레이팅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거장의 숨결’은 디지털 복제기술을 이용해 세계적 명화를 실물 사이즈로 복제해 전시하는 세계 명화전이었다. 15세기 르네상스 이후 20세기 초의 미술까지 약 100여 점의 세계 명화를 선정해 서양미술사를 보여줬다.
한 달만에 작품선정과 작품설명, 그리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책도 쓸 수 있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책은 한 권도 참고하지 않았다.
전시될 작품이 소장된 미술관의 사이트 검색과 Web gallery of Art라는 사이트를 주로 참조했다. 르네상스 미술에서 낭만주의 미술까지는 Web gallery of Art를 참조했고, 사실주의 미술에서 20세기의 미술은 그 작품이 소장된 미술관의 홈페이지 컬렉션을 검색했다. Web Gallery of Art(www.wga.hu)는 서기 1천년부터 19세기 중반 리얼리즘까지의 미술가들과 작품 2만5천여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시간이 지나면 동시대의 미술로까지 확장해 나갈 것이다.
과거에는 저명한 작가가 쓴 책이 가장 신뢰할만한 참고자료였다. 그러나 요즘은 해당 작품을 소장한 기관의 관계자가 작성한 자료가 가장 신뢰할만한 데이터가 됐다. 작품에 관련된 가장 최신의 자료를 홈페이지에 올려놓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이 책 저책 뒤지며 자료 찾고, 찾은 자료를 칼로 잘라내 저장하는 지저분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림에 관한 글 쓰는 일 중에 제일 하기 싫은 일의 하나가 이미지 찾고 정리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인터넷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 주고 있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정교한 이미지 파일이 제공된다면 더 일하기 좋은 환경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 미술을 기술할 때는 여간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다. 우선 한국미술에 관한 시각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곳도 없을 뿐더러 자료가 있다 해도 쓸만한 이미지를 구하기란 아주 어렵다. 국가문화유산포탈이 있지만 원하는 자료의 검색도 어렵고 그나마 제공되는 이미지의 크기가 강의용, 연구용으로도 쓰기가 어려운 것들이 많다. 자료의 형태도 중구난방이다. 한 곳에서 체계적으로 정리,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각 기관에서 만들어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국가의 자산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이미지를 접하고 연구하고 사용할 수 있다면 그 부가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이미지 자산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왕에서부터 사대부, 아녀자, 심지어는 기생에 이르기까지 시서화(詩書畵) 즐긴 나라이다. 이런 나라는 아마 세계에 유례가 드물 것이다. 조상들의 만든 이미지 문화유산을 잘 정리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유용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야기하는 이미지란 단순히 그림이나 조각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미술이나 건축 등 모든 장르의 이미지를 말한다.
이미지는 미술인들만의 자산이 아니다. 국민 모두의 자산이다. 시각 자료는 연구, 강의만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품개발이나 국가 홍보, 게임 개발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국가의 보고(寶庫)다.
/박우찬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