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1일, 갑판에 투표소가 설치됐다.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선적한 밀가루를 싣고 케이프 혼을 돌아 서울로 가는 항해 일정은 한 달 남짓,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대한 컨테이너선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수평선을 가르며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어떤 날 해는 이물에서 떠서 고물로 지고, 어떤 날 달은 좌현에서 떠서 우현으로 진다. 항해를 한다는 것은 해와 달과 별을 향해 나아가는 것, 수평선의 막막함을 나침반 삼아 한없는 그리움 속을 헤매는 것, 끊어질듯 이어지는 희미한 고향 소식 한 자락 기다리는 것.
그런데, 지난주 위성 팩스로 날아온 소식은 전혀 새로웠다. 항해중인 선원들도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우리들은 너무 놀랐다. 서울을 떠나온 지 6개월, 고향에 대한 기억은 그리움과 망각의 중간 어디쯤을 헤매고 있었는데 돌연 대통령 선거라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선장은 투표에 대해서 일찍이 간결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선거의 공정성 때문인지 극도로 절제된 표현으로 투표 방법에 대해서 간략하고 명확하게 설명을 했다. 1등 항해사인 김모씨가 선장 보좌역으로 옆에 서 있었다. 그는 투표하는 방법을 직접 선보이며 착오가 발생하지 않게 꼼꼼하게 챙기고 있었다. 선장의 설명 중에서 미흡한 부분은 1등 항해사가 보충설명을 통해 보완했다. 30여명 선원들은 부동의 자세로 선장의 말을 들었다. 배에서 선장의 말은 법이다. 그러나 선거에 있어서만큼은 선장도 육지의 법을 존중하고 있었다.
드디어 투표 날이다. 배에서의 생활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여기서의 하루는 23시간이기도 하고 25시간이기도 하다. 시차 때문에 한없이 늘어지는 하루를 어쩌지 못해 간혹 선원들 간에 불상사가 일어나지만 어쨌든 견디기 어려운 것은 권태로움이다. 명태를 따라 다니는 트롤선이라면 일희일비 긴장을 놓을 수 없겠지만 몇 개월씩이나 남회귀선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화물선들은 늘 남아도는 시간을 적절히 처리하는 게 필생의 과업이다. 그러니 투표에 참여하라는 방송은 애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초저녁에 투표소가 차려진 상갑판에 모여 있었다. 선장은 잘 다린 제복을 차려 입고 우리들 앞에 섰다.
“오늘은 우리 배에서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날이다. 모든 절차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정한 바대로 진행될 것이며 여러분들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선택을 투표하면 된다. 이미 숙지한대로 실드 팩스 사용법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여러분의 투표는 철저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것이며 투표의 비밀은 영원히 지켜질 것이다. 그 외에 궁금한 사항은 투표 참관인인 1등 항해사에게 문의하기 바란다. 이상.”
문득 참다랑어 등빛처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 상공에서 우리의 투표를 기다리는 통신위성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선상 투표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을까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이 든다. 이나마 선상 투표를 할 수 있는 것도 전 세계 160여 나라 중 불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 하니 새삼 내 나라에 대한 뿌듯함이 솟아오른다. 드디어 차례다. 얼마 만에 해보는 투표이던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투표대에 용지를 펼치고 선다. 망망대해 바다 한가운데서 희고 깨끗한 종이에 찍는 동그라미 하나, 그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이번에 처음 실시되는 선상 투표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다. 선상에서나 육지에서나 선거는 모두 중요하지만 그동안 재외국민과 더불어 선거의 사각지대였던 선상에서도 선거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비록 선상 선거를 하는 선원의 수는 1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그 상징성은 숫자로 논할 바가 아니다. 선상에서 치러지는 선거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참정권을 실현하고, 직업상의 이유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서 배제됐던 선원의 인권적 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나라 밖 어디에 있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된 것도 선상 투표의 중요한 의의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