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는 가을이 깊다. 이제 막 노란 옷을 입기 시작한 잎 속에 쪼글해진 은행을 품고 있는 나무가 화석의 날들을 품으며 직립의 고행을 꿈꾸고 있는 듯 신비롭다.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아직은 덜 익은 잎을 지상으로 떨구기도 하지만 가을의 깊이만큼 갈 길이 바빠진 태양도 제 몫의 계절을 다하느라 서두르긴 마찬가지다.
30여 년 전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집 앞 아름드리 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마치 노란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펼쳐져 있었다. 발을 딛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펼쳐진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카메라에 담고 결혼사진 앨범에 끼우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짝꿍의 말에 의하면 나서 자라며 쭉 보았지만 이처럼 많은 양의 노란 잎이 한꺼번에 쏟아진 건 처음 같다며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 징조라 했다. 그 후 오랜 세월 시댁을 드나들면서 그날처럼 많고 고운 빛의 은행잎이 쌓인 것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유리문 밖 은행나무를 보면 그래서 더 정겹고 훈훈한지도 모른다. 살면서 많은 우여곡절도 있고 삐걱대기도 했지만 이만큼 살았으면 잘 살았지 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칭찬도 한다. 단칸방 사글세부터 시작해 아이들 낳아 기르고 크게 모나지 않게 사람도리 해가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중간쯤 자리에서 살 수 있게 해준 짝꿍이 고맙다. 때론 아들을 둘 키우는 것이라고 투정도 하고 앙탈도 부리지만 큰 웃음으로 넘기고 받아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아이가 커서 결혼 정년기에 들었다. 어떤 상대를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집 장만을 하는 일이 더 큰 걱정이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마음에 맞는 사람 만나 살면서 자식 낳아 기르고 그때그때 필요한 살림 하나씩 장만하면서 살림을 늘려가는 일이 진짜 사는 재미있고 행복이라고 말해 보지만 요즘의 현실하고는 동떨어진 말이라며 아이는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남자가 결혼하려면 첫 번째 조건으로 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가 능력 있어 집도 있고 갖출 것 다 갖춰 배우자를 맞이하면 좋겠지만 직장생활 몇 년 해서 집 장만을 한다는 것은 무리다. 본인의 능력보다는 부모에 기대어 시작하겠다는 심산이다. 물론 능력 있는 부모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만 물려받은 재산 없이 빠듯하게 살면서 자녀들 공부시키고 얼마 남은 돈 다 털어서 자식들 주고 나면 정말이지 노후준비란 없는 현실 속에서 집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자식을 외면할 수도 없고, 그 자식 하나에 올인 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분수에 맞는 배우자 만나 양가 축복 받으며 서로 어울리는 생각과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혼수여야 하는데, 사회에 대한 체면과 이목이 젊은이들을 시작부터 휘청거리게 한다.
은행잎 하나를 결혼사진 옆에 끼우며 행복해하고 비록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서로 보듬고 아끼면서 작은 살림 하나 장만하는 일에도 이마를 맞대어 고민하고 그렇게 살림을 늘리면서 사는 것 또한 다 갖추고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보람된 일임을 젊은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태양이 서두르는 것은 또 다른 계절을 준비하기 위함인 것처럼.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한국문인협회 회원 ▲안견문학상 대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