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초로 기억한다. 입주를 결정하려는 기업체 관계자들과 찾은 개성공단은 햇발이 따사로웠다. 국경을 넘어갈 때 외국을 방문하듯 입국절차를 밟은 것 외에는 국내 여느 공단과 다르지 않았다. 월경절차로 소비한 시간을 제외하면 여의도에서 버스로 1시간 남짓에 불과한 거리였다.
1998년 11월 처음으로 열린 금강산은 완연히 달랐다. 기자단에 속해 꿈에만 그리던 금강산을 찾는 여정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흥분했었다. 차가운 동해바다를 거쳐 북한 땅인 장전항으로 들어선 새벽은 몹시도 을씨년스러웠다. 11월이라는 계절도 그랬지만, 장전항에 줄지어 선 적갈색의 북한 군함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금강산과 배를 오가는 길 양옆에 늘어선 북한 군인들의 눈길은 매서웠다.
하지만 금강산을 찾은 지 10년 만에 다시 방문한 북한 땅, 개성에서의 반나절은 권태로울 정도로 한가로웠다. 유명 중소기업인 시계 제조업체를 찾았을 때는 생각보다 빠른 북한근로자들의 손놀림이 눈에 들어왔다. 관계자는 “값싼 노동력 덕분에 세계시장에서 중국의 저가제품과 경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의류 생산업체는 남쪽 생산현장과 너무도 흡사한 제조과정을 마련해 이곳이 북한 땅이라는 생각을 놓친 채 안내원의 뒤만 따랐던 기억이 새롭다. 다만 기계소리와 작업소음 이외는 들리지 않았다. 낯선 방문객들에 대한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근로자들은 잡담조차 하지 않았다. 또 기업의 관리자가 근로자의 눈치를 본다(?)는 느낌은 생소했다.
우리 측 관계자와 근로자들만 이용하는 식당에서 식사 후 식당 옆에 세워진 전망대에서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우리 측 관계자의 설명에 이어 출현한 북한 측 미녀 안내원은 영어와 중국어까지 섞어가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노동당사무실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방문한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는 마치 종합상사 헤드타워 같았다. 양측 관계자들은 이념적·정치적 사안보다는 경제적·투자적 관점을 우선하는 듯 보였다.
2013년 4월, 개성공단의 문이 닫히고 있다. 남북 간 긴장감이 높아질 때마다 부침(浮沈)을 거듭하면서도 명줄을 이어온 개성공단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과 같은 기적적 사건이 없으면 개성공단은 그 운명을 다하게 된다. 찬란했던 2008년의 햇살을 다시 보게 될 날은 언제일까.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