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하다.
그 이름 세 글자로 귀한 지면을 더럽혀야 하나. 어지럽다.
그러나 해야겠다. 그 황망한 사태가 벌어진 후 내가 본 가장 짧고도 적확한 반응은 “윤창중. 자진해야 한다. 그것이 자네가 선택할 마지막 기회이다”였다. 한국 문단의 기라성 같은 시인과 소설가를 배출한 강원고등학교 문예부의 스승인 최돈선 시인의 일갈이다.
또 하나. 최근 페이스북에서 독설미학(毒舌美學)의 정수(精髓)를 선보이고 있는 홍성식 시인은 패왕(覇王)과 우미인의 예를 들며 이렇게 갈한다.
“…/못난 놈. 저 하나 살겠다고 함께 일 해온 주위를 욕보이고, 딸 또래 여자애까지 ‘이상한 여자’로 몰아가는 이런 것들을 데리고 무슨 정치를…./김재규가 박정희를 쏘던 1979년 늦가을 밤. 김은 철몰라 찧고 까불던 차지철을 지칭하며 이렇게 일갈한다. ‘각하, 저런 버러지 같은 새끼와 정치를 합니까?’/내 보기에 쪽은 윤창중이 차지철보다 더 팔고 있다. 나라 쪽, 각하 쪽, 청와대 쪽, (전직)기자 쪽, 사내 쪽. 아니다. 마지막은 아니구나. ‘논어’에 따르면 ‘자신을 위해 자신을 변명하는 건 군자의 법도가 아니’기에.” 이미 사내가 아니므로 사내의 쪽을 팔 주제조차 못 된다는 이야기일 터.
이 일을 두고 정치권이 책임 공방으로 소일하고 ‘진실의 문아 열려라’ 수준의 농(弄) 따위나 주고받으며 ‘세월이 약이겠지요’를 부르지는 않으리라. 시골 서생인 나 같은 사람도 대한민국 당면과제가 엄중하다고 느끼고 있는데 중앙에 계신 어른들의 정세 판단이야 이보다 더 명확하리라 믿고 싶다. 갈 길이 멀다.
법적인 문제는 국제법이든 국내법이든 엄중한 잣대에 맞게 처리하면 된다. 법치주의 아닌가.
그런데 이건 어찌할 것인가.
주군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도 부족할 자리에 있는 자가 일신의 안일을 위해, 또는 순간적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주군을 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깨갱했다. 다 떠나서 참 못났다. ‘읍참마속(泣斬馬謖)깜’도 안 된다.
난중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일 새벽 출동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썼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자기 집으로 도망간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걸었다.’
일벌백계(一罰百戒). 위기에 처한 ‘박근혜 호(號)’에게 주는 이순신 장군의 고언이다.
최정용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