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수원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곳은 으레 역광장 시계탑이었다. 그곳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의 미학을 즐기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얼마 전 서울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외국손님과 함께 수원의 랜드마크(landmark)를 중심으로 관광할 예정이니, 랜드마크를 소개해 달라는 것이다. 순간 혼란스러웠다. 50년 넘게 수원서 생활했지만 랜드마크가 언뜻 떠오르지 않는 것은 필자만의 기억은 아닐 것이다.
랜드마크란 특정지역을 돌아다니다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일컫는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그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과 조형물로 의미가 확장됐다. 파리 에펠탑, 뉴욕 자유의 여신상, 로마 콜로세움,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서울의 남대문처럼 전통적인 상징물도 있지만 현재는 영국의 ‘테이트 모던’처럼 낡은 시설, 장소를 리모델링하여 랜드마크로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테이트 모던’은 템즈강가 높게 굴뚝이 치솟은 건물로 1947년 건설된 화력발전소로 1970년대 3차례 유가파동으로 문을 닫으면서 20년 동안 도심의 흉물로 ‘미운 오리새끼’ 신세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낡은 발전소를 철거하고 미술관 신축계획을 세웠다. 스페인의 쇠락한 바스크에 세워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1997년 개관 후 대성공을 거두면서 ‘멋진 외관’을 가진 미술관을 짓자는 의견들도 쏟아져 나왔지만 그들은 버려진 공간을 ‘재활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149개팀 가운데 뽑은 당선작 역시 화려한 디자인과 첨단 기술을 활용한 설계가 아닌, 기존 모습을 유지한 설계로 처음엔 반신반의였다.
‘테이트 모던’이라는 새 이름을 단 발전소는 연간 500만명이 다녀가는, 명물 미술관의 하나가 되었다. 관람객 규모로는 파리의 루브르, 런던의 대영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이어 4번째이다. 흉물로 전락했던 발전소가 영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농업의 메카였던 수원은 전통과 첨단,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화성은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를 상징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제 세계적인 IT 글로벌기업으로 수원시민들의 자랑이다. 그러나 수원의 랜드마크라는 말이 가슴 깊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년까지 지방행정연수원, 국세공무원교육원, 국립식량과학원을 포함한 10개의 공공기관 지방이전으로 수원에는 220만㎡가 넘는 땅이 남게 되는데, 이에 대한 긴 안목의 구상은 그래서 더 절실하다.
전국 꼴찌 수준인 수원의 실업률은 한일합섬, 대한방직, SKC 등 대규모 공장이 떠난 곳에 아파트만 들어선 근시안적인 결과를 대변하고 있다. 템즈강 관광객 유치를 위한 공공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었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사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3대 성당인 세인트폴 성당, 밀레니엄 브리지, 셰익스피어센터와 연계하여 이곳은 세계에서도 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수원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적, 지리적 이점, 세계적인 기업이 있는 복 받은 고장이다. 시민들의 창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공공프로젝트를 통해 ‘테이트 모던 미술관’ 못지않은 세계적인 랜드마크를 탄생시키는 일은 ‘전통과 첨단이 공존하는 조화로운 도시’를 실체화하는 출발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