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셨다. 내리는 눈을 보고 기뻐하면 청춘이요, 걱정하면 노년이라 했다. 어느 쪽인가, 스스로 되묻는다.
눈을 보면 생각나는 두 가지. 그 첫 번째는 이 시(詩)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어지러이 밟지 마라/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반드시 뒷사람이 따를지니.’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했다는 서산대사의 가르침이다.
해마다 1월이면 살아온 발자국을 뒤돌아본다. 앞길을 가늠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돌아보면 어김없이 어지럽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반성은 늘 정수리를 친다. 모골(毛骨)이 송연하다. 이래서야 후배들이 따라오는 것은 고사하고 제 고깃덩어리 하나 제대로 끌고가지 못할 형상이다. 영혼의 결이 빛나기는커녕, 주름마다 때뭉치다. 하지만 신발끈을 다시 묶는다. 비록 ‘눈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은’ 맹인부부가수처럼 지난 생(生)은 어지러웠으나 남은 삶은 길고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반성은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품목이므로.
또 하나는 시실리아 출신의 샹송가수 아다모(Adamo)의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다. 가사를 번역하면 이렇다.
‘눈이 내리네/오늘 밤 그대는 오지 않을 테지/내 마음은 검은 옷을 입네/이 비단과 같은 행렬/모든 것은 하얀 눈물 속/가지에서는 한 마리 새가 저주하듯이 울고 있네/그대는 오늘 밤 오지 않을 테지/절망이 나에게 외치네/아직도 눈이 오고 있네/태연하게 오고 있네/눈이 내리네/오늘 밤 그대는 오지 않겠지/모든 것은 절망적으로 하얗다/슬픈 확신/추위와 부재/이 증오할 만한 고요함/하얀 고독/그대는 오늘 밤 오지 않겠지.’ 김추자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이렇게 두 가지 생각이 버무려지면 새로운 ‘그 무엇(et was)’이 오롯이 피어난다.
‘미래는 태연히 올 것이고 길목마다 돌아본 발자국은 또 삐딱할 것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높으신 분들 덕분에 신상정보가 다 털리고 AI에 감염됐다고 날개 달린 생명들이 떼죽음을 당해도, 살아내야지. 그것이 바람보다 빠르게 눕고 빠르게 일어나는 민초들의 숙명,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