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입적한 월하스님은 한국불교의 종가인 불보사찰 영축총림 통도사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 선장(禪匠)이었다.
스님은 불제자의 기본 도리와 품성에 기초한 엄격한 수행생활을 해나가며 종단 발전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스님은 구한말 경봉스님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통도사를 지켰던 구하스님의 법을 이었다. 1933년 강원도 유점사에서 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운수납자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통도사로 돌아와 구하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수제자가 됐다.
어릴 적 고향 부여 집 근처의 고란사란 절에서 스님들을 보면서 "스님들의 생활이 퍽 고상해 보이는 데다가 `아무나 이런데 와서 사는 것도 아니고 어째서 이런데 와서 사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18살에 `나도 절에 가서 절 생활을 해봐야 되겠다'고 결심"한 게 출가의 계기였다고 한다. 이 때 속가 부모님이 올라와 세번이나 끌려가는 경험을 했지만 출가의 결심을 막지는 못했다.
1944년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이후 수행생활과 더불어 종단행정에도 관여했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에서부터 총무부장, 총무원장,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조계종 종정까지 종단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56년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스님은 1970년에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 보광전에 기거하며 늘 통도사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후학양성에 힘썼다. 이후 1994년에는 종단개혁의 깃발이 오른 뒤 종정의 자리에 올라 종단 어른으로 역할을 다했다. 1998년 종단사태후 2001년에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영축총림 수장으로, 종단의 어른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스님은 "부처님도 도둑을 제도하려면 같이 도둑질하면서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라고 했다"며 중생의 생활속에서 자비심을 심어주는 중생교화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불제자들은 마땅히 불성을 밝히는 노력으로 자신의 성품자리를 찾고야 말겠다는 대발심을 일으켜야 합니.그래서 삶속에서의 실천을 통해 마침내 부처님과 같이 대자유인이 되는 길을 묵묵히 가야합니다"
스님은 최근 설법에서 "무엇을 도와주었다거나 해주었다는 생각도 없이 어려운 이들의 힘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보시의 공덕"이라면서 "물질이 없다면 마음이라도 힘이 되어야하며 오히려 이 마음은 더 강력한 힘이 된다"고 강조했다.
스님의 승과 속의 구분없는 대중교화의 마음은 자신의 문집 「노천묵집」에도 잘 나타나있다.
"正法不分出在家 無量衆生皆佛芽(정법은 재가와 출가를 나눌 것 없이, 한량 없는 중생들 모두 부처의 싹이 있네)
스님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것뿐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내세우는 생각조차 없애는 게 진정한 하심(下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나라고 특별한 것도 없고 혼자 따로이 밥상을 받는 것은 표본도 아니라"며 대중들과 함께 최근까지 공양을 같이 했다.
스님은 설법을 통해 저마다 솔선수범해서 자기 할 일을 충실히 다하는 삶을 역설했다.
"공무원은 공무원의 직분을, 승려는 승려의 직분을, 국민은 국민의 직분을, 대통령은 대통령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바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맑게 정화하는 길입니다."
스님은 불지종가(佛之宗家)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통도사의 전통을 살려 상하의 위계를 존중하고 계율을 지키며 화합을 중시하는 가풍을 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