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향마을에는 스물 두 집이 윗마을과 아랫마을에 흩어져 있었다. 동갑내기 넷 그리고 몇 살 터울 위아래 아이들까지 하면 열 명이 넘었다. 학교 끝나면 아버지 눈치보고 도망쳐 나와 어둠이 내려 코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쯤 ‘밥 먹어라~’하고 고성능 육성 스마트폰으로 부를 때까지 확실하게 놀았다. 개울을 뒤져 가재 잡는 일도 재밌었다. 서로 누가 큰 놈을 잡느냐 시합이 된다. 다 모아놓고 불을 집힌다. 빨갛게 구워진 가재를 나누어 먹는다. 잠시 후 물고기를 잡는다고 한 아이가 그물 양쪽에 나무를 끼워 그걸 들고 물 가운데서 물가 풀이 있는 쪽으로 몰고 나온다. 그러면 나머지는 우르르 몰려가 풀을 흔들고 발로 밟아 물고기를 망으로 몬다. 두세 마리라도 걸리면 모두 환호한다. 짬뽕도 인기종목이다. 물렁물렁한 고무공을 나무막대로 치는 시골스타일야구다. 다만 투수는 없고 타자가 하늘을 향해 던지고 떨어지는 타이밍에 맞추어 쳐내는 거다. 그런데 이게 나뭇가지가 얇아 프로선수도 치기 쉽지 않을 거다. 운동신경이 둔한 내게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같이 어울리고는 싶고 그러면서도 내 타석이 되면 왠지 잔뜩 긴장되는 그런 거였다. 어쩌다 한번 제대로 치면 형들이 그런다. ‘니가 어쩐 일이냐...’ 뭐 그래도 기분은 최고다. 그런 날엔 아버지의 ‘밥 먹어라’ 소리도 기분 나쁘지 않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없었던 때였다. 이런 경험이 먼 훗날 동장이 되고 부시장이 되었을 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요즘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좀 미안하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학교 가고 방과 후에는 야간자율학습, 학원, 숙제로 파김치가 되어 늦게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에도 ‘빨리 일어나’란 불호령에 마지못해 눈을 뜨고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는다. 아주 가끔 친구들과 영화 보러가고 야구배팅하고 농구하는 정도가 그들 놀이의 전부다. 친구들과 다양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만나고 교류하는 기회가 너무 적다. 이 아이들이 커서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상황을 접하게 될 때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걱정이다. 미래사회는 불확실성이 더욱 클 것이라 하는데...
얼마 전 남양주 진접에 다녀왔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둔 어머니 41명이 코업(COOP)이란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해서였다. 처음엔 단 두 분이 아이 돌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끼리 서로 아이들을 돌보아 주면 어떨까’ 생각하다 그럼 인터넷카페에 올려보자 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들 몇 분과 자리를 같이 했다.
처음엔 우리아이가 다른 집에 갔다 다치면 어떻게 하나, 반대로 다른 집 아이를 돌보다 싸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수많은 의심과 걱정에 모두가 망설였다고 한다. 그런데 2년여가 지난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단다. 얼마 전 갯벌체험에서의 일이다. 어느 엄마가 같이 못가고 아이만 보냈는데, 그 아이가 길을 잃어 미아보호소에 맡겨져 엄마한테 전화가 왔단다. 그 때 아이 엄마의 대답이 황당하다. ‘아이는 알아서 보호자 찾아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두세요.’라고 했단다. 같이 따라간 회원엄마들이 알아서 잘 돌 보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가 혼자 수퍼에라도 갈라치면 몇 번이고 사람 조심하고 차 조심하라는 게 요즘 보통 엄마의 모습이라면 이는 참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남양주에서 이사 가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한다고 한다. 모두의 표정이 너무도 밝다. 누가 무슨 문제라도 있을라 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회원들간 정서적 끈이 마치 굵은 칡덩굴처럼 단단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대체 뭘까. 과연 돈, 물질 중심의 복지정책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공동체 엄마들은 아이가 좀 더 커서 손이 덜 가게 되면 지역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계획이란다. 혼자만 알던 아이들은 형, 동생들을 서로 챙기기 시작했단다. 아이들이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체득해 가는 모습이 너무 기특하단다.
‘나’를 넘어 ‘우리로 뭉친 그들’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