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향각은 창덕궁의 후원 주합루 서쪽에 있으며, 왕실도서관 단지의 포쇄시설로 건립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대 왕의 물품을 보관하는 어제각의 역할까지 하였으나 구한말(舊韓末)에는 양잠소가 설치되는 등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서향각의 좌향은 주합루의 서쪽에서 동향하고 있는데, 이는 주합루가 주요 건물이고 서향각은 부속건물이기 때문에 같은 방향을 하지 못하였다. 신하가 임금에게 절을 올릴 때 국왕은 남향을 향해 앉고 신하는 측면 동서에서 왕의 측면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이를 곡배(曲拜)라 한다. 그리고 건물 배치도 같은 개념으로 하게 된다.
서향각의 평면은 정면 8칸, 측면 3칸으로 외측에 복도를 둔 2중 공간이며, 내부는 방과 대청마루로 구성되고 보조공간인 퇴칸은 복도로 되어있다.
건물 한 칸 길이는 퇴칸이 155㎝, 내부 칸은 248㎝이기에 전통 단위로 환산하면 퇴칸은 5자(尺) 내부 칸은 8자로 보여 이를 환산하여 기준척(영조척)을 산정하면 31㎝가 된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에는 정조시기 영조척은 30.8㎝로 알려져 조금 다르나, 공사 당시 현장에서 자(尺)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건물별로 오차가 생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향각의 정면이 8칸으로 짝수인데 건물에서 짝수를 사용하는 것은 흔한 사례가 아니다. 동서양 역사의 주요건물들은 모두 홀수 칸을 사용한다. 짝수 칸일 경우 정중앙에 기둥이 위치하게 되어 출입이 안 되며, 기둥 상부에는 외부로 뺄목 등이 나와 현판을 걸 수가 없으므로 짝수보다는 홀수를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향각은 38평 큰 건물이며 양식은 초익공을 사용한 위계가 있는 건물로 창건 당시 명필로 유명한 조윤형이 글을 편액으로 걸 정도로 중요도가 있었다.
그런데 정면을 짝수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번 추정해보자. 첫 번째, 주합루가 주요 건물이고 서향각은 부속건물이니까 측면으로 배치하고 위계를 낮추기 위해 짝수로 하였을 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언덕에 위치하는 관계로 배면 언덕으로 확장은 한계가 있어 최대한 앞으로 나온 결과로 보인다. 즉, 주합루의 선보다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배치하고 뒤쪽은 언덕을 최대한 흙을 파내어 배치한 것이 짝수가 되었을 가능성이다.
현재 한 칸의 길이는 8자인데 이를 조정하여 7칸 또는 9칸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9칸일 경우 한 칸의 길이가 7자를 해야 하는데 7자는 너무 작아 쓸모가 없고, 한 칸 길이를 9자로 하여 7칸으로 하면 대청을 한 칸으로 해야 하는데 그러면 너무 작아 쓸모가 없어 8칸은 대지 형평상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건물은 짝수 칸으로서 중심 칸은 없지만 현액(현판)을 걸었고 이 부분이 중심 칸처럼 보이기 위해 재미있는 기법들을 사용한 점들이 보인다.
대청이 있는 중앙 2칸을 3칸처럼 보이기 위해 남쪽 방 2칸 중 하나를 외부에서 대청처럼 입면을 구성하였다. 그래서 건물 외관만 본다면 이 건물이 짝수 칸이라는 것을 쉽게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높은 수준의 디자인이 되어 있다. 그러나 정면 계단은 두 개로 각각 대청마루 앞에 위치하고, 방을 대청처럼 보이는 부분에는 계단이 없어 균형이 맞지 않아 어색하게 느껴진다. 굳이 균형을 깨트리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은 방(房) 앞에 계단설치를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방은 사생활을 존중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 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계단을 두 개가 아닌 한 개만 하였다면 오히려 홀수 칸의 맛이 더 우러났을 것으로 보인다.
서향각의 건축적 특징은 궁궐의 침전 건축처럼 2중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공간을 최대로 크게 하고자 8칸으로 하였지만, 홀수 칸처럼 보이기 위해 방의 퇴칸부분을 개방하여 입면이 대청의 퇴칸처럼 만들었다. 그 결과 입면 상 안정감을 보이고 있어 쉽게 짝수 칸의 건물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이런 기법은 한국건축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뛰어난 기법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