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편지
/나희덕
오래된 짐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사랑이 발명한 두 사람만의 언어를
어둠 속에서도 소리 내어 읽곤 했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해도
나는 이제 그 깜박임을 알아볼 수 없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처럼
내게는 더 이상 너의 피가 돌지 않고
온몸이 눈이거나
온몸이 귀가 되어도 읽을 수 없다
오래된 짐꾸러미 속으로
네 편지를 다시 접어 넣는 순간
나는 듣고 말았다
검은 포도알이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보내온 편지를 본다. 탱탱하고 달달했던 우리의 언어들은 이제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러니까 우린 편지를 두고 행간의 깊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렸다. 서로가 서로를 허우적대지 않는 시간이 찾아와버린 것이다. 건너에서 네가 별별 신호를 보내와도 나는 환해지지 않고 너도 나를 찾지 못한다는 것. 우린 이제 떠도는 먼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허공을 나는 새의 울음을 내며 우주의 먼 곳까지 날아가 닿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우린 마침표처럼 무덤처럼 검은 포도알 굴러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관계를 증언하는 객체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언어를 해독하는 방식이고 존재의 방식이다. 관계는 이렇듯 방향을 수정하며 생을 옮겨 적고 있다.
/김유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