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나무
/정우영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의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 정우영 시집 ‘집이 떠나갔다’ / 창비시선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오랫동안 이곳저곳 걸어 다닌 나도 모르는 ‘지구의 기억을’ 시간마다 ‘켜켜이 새겨’ 두고 있다. 내가 지나온 마흔여섯 해보다 저 여린 생강나무의 세계가 더 크고 깊다는 것이다. 집은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인데 그 집이 떠나갔다. 내가 기댈 수 있는 집 또는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들, ‘내 길 끊기듯’ ‘모든 자취 사라’진다 해도 ‘생강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느린 시간’을 지나가고 있을 것이니, 그것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그 ‘시간 속으로’ 조용히 ‘접어든다.’ 나도 그 시간 속으로 따라 들어가 본다. /김은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