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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독일의 낭만주의, 그리고 아이러니

 

새벽녘, 먹빛 수평선 위에 무겁게 앉아 있는 구름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의미로써 곧 세상을 온통 덮을 것 같이 보이지만, 곧 해가 뜨고 대기가 마르기 시작하면 구름은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 구름 안에 내포된 무거움과 가벼움이 예리한 층을 이루며 바다 위에 묵직하게 드리어져 있다. 무언가가, 너무나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감동에 벅차오르다가도 그것은 결국 오리무중의 안개일 뿐이라는 좌절에 부딪치기도 한다.

이 작품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1809년 작 ‘해변의 수도승’이라는 그림이다. 이 압도적인 대기와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수도승은 고작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자연이 우리보다 훨씬 광활하고 압도적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과연 그 안에서 삶의 이유까지 포착해낼 수 있을 것인가.

프리드리히는 죽음과 맞닿아 있던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로 그는 이 시기 낭만주의 회화작가로서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예술사에서 낭만주의가 도래한 이후 한 인간의 불행과 공포 그리고 우울은 고귀한 예술적 소재로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가 일생 치러야했던 고통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가 7살 때 천연두로 죽었고 이어서 그의 두 누이도 병으로 죽었으며, 그의 남동생은 그와 함께 놀다가 물에 빠진 그를 구하기 위해 죽었다. 프리드리히는 신앙심이 매우 깊은 인물이었으며, 이 모든 고통을 종교적 신념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낭만주의가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 일찍 발현되었던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분야는 단연 문학이었으며, 낭만주의 회화는 낭만주의 문학과 철학의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발흥했다. 또한 자연과 종교는 독일의 낭만주의와 불가분한 것이었는데, 종교개혁 이후 개개인이 신과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신앙이 널리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통일 국가가 일찍 형성되지 못하고 봉건체제에 머물러 있었던데 비해, 계몽주의 사상과 주변국 프랑스에서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은 독일의 지성인들을 깨웠고, 곧 그들은 갑갑증을 느꼈다. 현실에 발을 둘 곳 없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광적인 독서모임의 열풍이 불었고, 이들은 처음에는 성경과 종교적인 서적을 탐구하다 곧 철학과 문학으로 영역을 넓혀갔다고 한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에게 영향력을 준 주요한 인물들 중에서 철학자 노발리스라는 이가 있었다. 그는 현실의 세계를 초월한 이상세계를 가시화시킬 수 있는 시적 표현과 상징적인 구성이야말로 예술의 진정한 종착역이라고 여겼다. 프리드리히의 작품에 등장하는, 때론 휘몰아치고 때로는 무겁게 짓누르는 대기의 모습은 모든 현실을 뛰어넘는 세계와 다름 아니다. 인간의 직관과 감성은 인간의 키를 훌쩍 넘어 저 멀고도 높은 곳에서 큰 운동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편, 이 시기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독일의 지성인과 예술인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매우 지대하면서도 모순적인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초기 집권 시절에는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의 수호신으로 여겨졌지만, 독재자로 인식된 뒤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등극했다는 소식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에 대한 헌정곡인 교향곡 3번의 제목을 ‘보나파르트’에서 ‘에로이카’로 고쳐버린 반면, 괴테는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의식을 지녔던 예술가였다. 나폴레옹은 이처럼 유럽 대륙 전체를 자유와 이성이 존중되는 통합적인 체계에 대한 열망으로 일렁이게 했다가, 곧 그 열망이 무산된 이후로는 뜨거운 민족주의와 애국심으로 달구게 함으로써 대륙을 조각내 버렸다.

낭만주의가 인간의 직관과 신념을 고귀하게 여겼던 사조이니, 외부의 어떤 세력과도 타협하지 않는 스스로의 길, 내 민족의 길을 구축하고자 했던 이들의 심정 속에 자연스럽게 깊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한 인간이 구축할 수 있는 내면세계가 바다와 같이 드넓고 드라마틱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온전하게 진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며, 이 점은 역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이는 오늘날까지 뜨겁게 이어지고 있는 낭만주의에 관한 맹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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