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산책] 고애자(孤哀子)가 되어

 

 

세상에는 겪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를 여의면 고자(孤子)라고 하고 어머니를 여의면 애자(哀子)라고 한다. 지난달 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나는 그 깊은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다.

 

고자(孤子)의 말뜻은 외로운 자식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내가 의지할 곳을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이제 나의 절대적인 지지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상실감에 휩싸이곤 했다. 애자(哀子)의 말뜻은 슬픈 자식이다.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지금까지 많이 울었고, 때 없이 눈물이 났다. 내가 받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내가 해드린 것은 너무나 없었다. 이제 갚을 길 없는 빚을 진 슬픔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

 

우리 세대의 많은 부모가 그랬겠지만, 나의 부모님도 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다. 아버님은 식민지의 백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만주를 오가며 목수로 성장했고, 인정받는 대목으로 성공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다음에 아버지를 기다린 것은 독재정권의 전횡이었다.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바뀌고, 양옥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창업한 작은 공장이 성공을 거두는 행운을 누렸지만 의협심이 유달랐던 아버지는 반골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고향에서 손꼽히는 반골이었던 아버지는 술 좋아하고, 배포가 맞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 뒷감당을 다 떠맡은 사람은 어머니였다.

 

공장을 경영하고 직원들을 관리한 것은 열일곱 살에 마을 이장을 맡아서 관공서에 출입했던, 필체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주문을 받고, 기일에 맞춰 출고하고 수금하는 일까지 어머니의 몫이었다. 수시로 애를 먹이는 직원들을 다독이고, 술집에 쓰러져 있는 기술자를 찾아다 공장을 돌리는 것도 어머니였다. 직원들의 근무일과 작업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서 임금을 지급하는 것도 어머니였는데, 놀랍게도 어머니는 글자를 몰랐다. 학교를 다닌 적도 없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만의 장부를 가지고 계셨고, 어머니만 아는 기호로 장부를 썼다. 하지만 그 장부는 별 소용이 없었다. 가장 정확한 장부는 어머니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토록 총명하고 불가사의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어머니가 어느 해부터 방금 한 일들을 까먹고, 사람들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웃 마을로 놀러 간 내가 밤늦게 돌아오지 않으면 그 마을을 다 뒤져서 나를 찾아냈던 어머니였다. 아무리 늦어도 이웃 마을까지 자식을 찾으러 오는 사람은 우리 어머니뿐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게 그렇게 창피해서 종일 공장에서 일하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나를 찾아온 어머니에게 심통을 부렸다. 그렇게 챙겼던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진저리를 치며 절대 같이 묻히지 않겠다고 했던 남편과 손자의 이름을 호명할 때면 섭섭함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이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은 고애자(孤哀子)가 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외로움과 슬픔이며, 이 외로움과 슬픔의 힘으로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