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 단원구에 위치한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가협회) 사무실은 알록달록한 컨테이너들 사이에 있다. 컨테이너는 4.16 꿈숲학교, 4.16합창단 사무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벽면에는 노란리본 그림, 피아노 건반 모양과 아이들 그림으로 단장한 모습이었다. 이곳은 활동가나 시민들을 맞이하기 위해 꾸며 놓은 장소다. 그중 녹슨 회색 컨테이너에서 한 유가족이 경기신문 취재진을 맞이했다. 4.16생명안전공원을 지키고 있는 2학년 6반 고(故) 신호성군의 엄마 정부자 씨다.
◇ 함께 떠난 수학여행 전국 곳곳에 흩어져
2021년 1월 문재인 정부 당시 검찰 세월호 특별수사단은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을 ‘혐의 없음’으로 결론 지었다. 정 씨는 당시 특수단 수사결과에 규탄하며 삭발식을 감행했다. 약 3년 전 강단있는 모습과 달리 현재는 앙상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박근혜 탄핵 이후 통증이 밀려오듯이 왔다. 쓸개 제거 수술을 시작으로 잇몸도 다 주저앉아서 시술을 받았다. 그래서 오른쪽 얼굴에 멍이 들었다”며 “마음 아픈 게 하나둘 몸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엄마 아빠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며 얼굴을 매만졌다.
정 씨는 가협회 활동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아이의 환영이 계속 보이고 방에서 아들이 흥얼거리며 의자에서 흔들거리는 모습이나 아침에 ‘엄마’하고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며 “밤만 되면 베란다에서 하교하는 아들을 기다렸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었다. 집에만 있을 순 없겠다 싶어 가협회 부모들과 동행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 씨는 연단에 서서 마이크를 들며 시민들에게 스스로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엄마이기에 삭발식도 두렵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두려운 건 없었다. 일단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엄마이기에 4년 전 삭발식도 두렵지 않았다”며 “그때의 감정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은 (희생자) 아이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304명의 희생자 중 일반인 희생자들은 인천 추모관에 있다. 단원고 선생님들은 대전 현충원에 안치돼 있다. 그 중 단원고 학생 205명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안산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365일 시끌벅적 했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참사 특별법에 따라 정부와 안산시가 단원구 화랑유원지에 4·16 생명안전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 문정부는 참사 10주기를 맞춰 추모공원을 약속했지만 현재 공간은 잡초들로 무성하게 뒤덮여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공사 착공을 미뤘는데 이후 자재값 상승 등을 이유로 참사 특별법 당시 편성된 예산을 초과했기 때문이다. 공원 건립 사업 착공 시기는 사업적정성과 재검토를 이유로 기간이 연장된 상태다.
정 씨는 “10주기를 맞춰 올해 완공 후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기억식을 하기로 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며 “10월 달에는 공사가 들어간다고 하니 이번에는 안산시가 실수 없이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활동을 하면서 외로움이 있었다. 다른 엄마, 아빠가 외부 활동을 하는 동안 공원부지에서 혼자 소외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안산시에서 첫 삽을 못 뜨니 시민들과 유가족들이 함께 기억식을 진행했다. 전국에서 생명안전나무를 보내줬다. 생나무를 안산 땅에 심는데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이 한 번에 사라졌다”고 했다.
그는 제주에서 온 나무를 만지작거리며 “제주 흙이 안산과 달라서 잘 자랄까 걱정했는데 무럭무럭 자라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라며 미소를 띠었다.
공원 건립에 부정적인 시선도 쏠렸다. 일부 지역 주민들은 납골당이라는 이유로 가협회 활동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에 가협회는 생명안전공원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토론회를 통해 지속적인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후 안산 지역 주민과의 간담회를 열고 공원 건립 개요에 대해 설명했다.
정 씨는 “안산은 우리 아이들의 고향이다. ‘세월호 도시’라는 슬픈 프레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아이들이 그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아있는 가족들이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늘의 별이 된 아들에게 엄마가 던진 말
호성이는 2014년 5월 20일 엄마의 품에 돌아왔다. 정 씨는 “천으로 가려져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해수부에서 호성이가 발견된 위치가 적힌 종이를 줬다. 애 아빠가 어딘가에 숨겨 아직 보진 못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객실에 신발장과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었다. 배가 뒤집어지면서 물건으로 인한 타박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를 수습한 후에 목을 보니 기억자로 상처가 나 있었다”면서 “아이를 찾은 후 미수습자 부모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도망치듯이 나왔다”고 말했다.
정 씨는 “참사 이전 호성이 한테는 호찌, 막둥이, 뚱이 등 애칭으로 불렀다”며 “호찌는 여자는 안쪽으로 걸어야 한다며 다 큰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집안에 힘든 일이 있다면 아들에게 푸념하듯이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하늘로 간 뒤 많이 미안했다. 호성이가 떠나는 길에 제대로 떠나지 못하고 뒤돌아보고 있을까 봐 걱정”이라고 말을 흐렸다.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정씨는 숨을 돌린 뒤 입을 열었다.
“호성아, 우리 아들이 떠난 지 10년 되었네. 호성이 방도 그대로 있고 사망 신고도 안 돼 있고 너 핸드폰도 그대로 있고 보험료도 그대로 나가고 있다. 근데 너만 없어. 엄마가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봐. 그거라도 붙잡고 있어야 엄마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붙잡고 있다. 엄마가 너무 붙잡고 있어서 너가 못 가는 건 아닐까 생각도 들어. 아들, 엄마 보다시피 씩씩하게 잘 살고 있어. 걱정 하지말고 새로운 엄마 아빠가 있으면 거기서 다시 태어나도 괜찮아. 오래 오래 살다가 얼굴 한번만 보여줘 아들. 보고 싶다. 우리 호찌 사랑해.”
[ 경기신문 = 임혜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