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밤에 귀가를 위해 내리막 도로를 운전하는데 갑자기 ‘펑’하는 굉음에 차를 세웠다. 이미 차는 정상적인 주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덜컹거리고 있었다. 겨우 갓길에 주차하고 살펴보니 오른쪽 바퀴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 이물질에 타이어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일단 차를 옆으로 옮기고 보험사 긴급출동을 불렀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 끝에 긴급출동 기사가 도착해 차를 살피고 있는데 경찰 패트롤카가 왔다. 정신없는 와중에 대뜸 음주측정기를 들이밀었다. 차가 어떤 상태인지 살핀 후에 하자고 하니 막무가내였다. 결국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공무집행 중이니깐.. 비상타이어로 교체하고 현장을 벗어난 후, 다음날 앞바퀴 두 쪽을 모두 교체한 뒤에야 상황이 종료되었다.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상황이 종료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찰의 대응이 못내 아쉬웠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선후가 어긋났다는 느낌이었다. 수습을 돕고 난 이후 음주측정을 해도 될 문제였다. 화투패를 거꾸로 치는 경우가 어디 경찰 뿐이랴? 5월 10일로 취임 1년을 지난 윤석열정권. 대한민국의 지난 1년은 말 그대로 나락을 향한 폭주였다. 내리막길에서 질주하다 펑크가 났다. 일단 안전조치를 한 후 사고수습을 해야 할 상황에 음주측정기부터 들이대고 윽박지르는 꼴이다. 지난 1년 대한민국의 무역적자 600억 달러, 부자감세와 경기침체로 재정적자는 깊어지고 금융위기까지 우려되는 상황, 그런데 입만 떼면 전 정권 탓이요 야당 때문이란다. 취임 1년이 지나도록 불어대는 나팔이 똑같은 타령뿐이라면 이건 나팔수를 잘못 뽑은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노래 한 곡 부르고 돌아오니 길거리마다 역대급 방미외교라며 자화자찬 현수막이 나붙었다. 나가기만 하면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던 어떤 분 왈, “영부인이 옆에서 탬버린까지 치지 않은게 다행스러웠다” 느닷없이 찾아온 기시다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만 남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말 안해도 알아서 사죄로 이해해주고 난제가 생기면 먼저 해법까지 마련해주니 일본 입장에선 ‘우리 윤석열대통령’이다. 그러니 일본언론들은 “총리가 더 확실하게 사죄표명을 했어야 한다. 국내반발을 무릅쓰고 관계회복을 밀어부친 윤대통령을 배려했어야 한다”고 되려 걱정해주었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노총 강원건설지부 양양, 속초, 고성을 맡았던 3지대장 양희동 씨는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온몸에 불을 질렀다. “먹고 살려고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습니다. 억울하고 창피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긴채. 현해탄과 태평양을 넘나들며 배려가 넘치던 대통령은 건설노동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건폭이 근절될 때까지 엄정 단속하라”는 대통령의 하명이 불러온 무리한 수사가 빚은 참사였다. 대통령은 알고 있었다. 수렁에서 헤어날줄 모르는 지지율에 특효약은 북한때리기와 노조때리기 두가지 뿐이라는 것을.. 외교가 파탄지경이 되고 나라경제가 거덜이 나면 죽어나는 것은 가장 힘없는 노동자, 서민계층일 뿐이다. 정권의 폭주가 이어지는 한 벼랑끝에 몰린 노동자의 존엄사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아. 이제 겨우 1년이 지났다니, 아니 4년이나 남았다니. 이 찬란한 봄날에 나는 절망하고 있다.
책을 쓰고 책을 만들고 책을 알리는 책문화 현장의 최전선에 있다 보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난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출판저널’ 편집부 책상에는 출판사에서 만든 새로 출판된 도서들이 쌓이는데 손님처럼 도착한 책들을 검토하다 보면 책은 시대를 기록하고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점을 실감한다. 최근 출간된 책 중에서 ‘세계를 이끈 경제사상 강의’에서 유독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한국은 진정한 선진국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이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기 어려우면 구체적으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인가? 우리나라는 경제강국인가?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 어려운 질문일 수 있겠다. 첫 번째 질문, 우리나라는 강대국인가? 이 책을 쓴 경제사상가 김민주 저자에..
인천시가 재외동포 지원을 위한 전담 기구인 재외동포청 유치에 성공했다. 8일 유정복 인천시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재외동포청을 인천에 유치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이다. 다만 본청 소재지는 인천, 통합민원실통합민원실인 ‘재외동포 서비스지원센터’는 서울 광화문에 두는 것으로 결정됐다. 물론 인천 본청에서도 민원업무를 볼 수 있다. 인천시는 전체 직원 151명 중 서울 광화문 통합민원실에 배치될 인원이 20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소재지가 확정된 직후 인천시는 6월 5일 인천에 들어서는 재외동포청의 차질 없는 출범과 안정적인 업무개시를 위해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먼저 10일 이내로 청사가 들어설 곳을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청사 위치로 거론되고 있는 곳은 송도 미추홀타워나 글로벌캠퍼스, 영종·청라 등지다. 시는 자체적으로 ‘웰컴센..
2012년 8월 10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그 이후에도 적지 않은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독도를 방문했다. 이번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의 독도 방문도 여기에 포함된다.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독도를 방문할 수 있고, 이것이 특별한 뉴스가 될 이유가 없다. 마치 어떤 정치인이 부산이나 제주도를 방문했다고 뉴스가 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번 기사다 일본 총리의 방한 때, 윤 대통령이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해 한마디도 따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민주당의 주장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민주당은 집권 경험이 있는데도, 이런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도를 “실효 지배”를 하고 있다. 우리의 경찰이 독도를 수비하고 있고, 독도에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도 다수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일본은 안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은 어떻게든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일본이 수시로 독도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도, 독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기 위해서다. 이런 차원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궤변”에 대해 우리가 반발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우리의 반발이 심할수록, 분쟁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전 세계에 쉽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일본은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오히려 바랐을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민주당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은 집권을 3차례나 했었고,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일본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그 의도에 말리지 않기 위한 외교를 펼쳤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이런 주장을 이해하기 힘든 이유다. 현재 전 세계에는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국가들은 많다. 미국과 캐나다의 영토 분쟁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머차이어스 실 아일랜드(Machias Seal Island)를 두고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 지역은 해산 자원이 풍부하고 중요한 뱃길이 지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미국과 캐나다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다. 현재 이 지역은 캐나다가 “실효 지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안달이 나는 측은 미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캐나다가 먼저 이 문제를 거론하지는 않는다. 항상 실효 지배를 하는 국가는, 해당 지역이 분쟁지역으로 인식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분쟁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국가가, 전쟁과 같은 무력 분쟁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해당 지역을 상대 국가에 넘겨 준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 정권이 독도 문제에 있어 일본에 양보하려 든다든가 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외교부가 일본의 독도 망언에 정식 항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국내 정치판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2022년 2월 24일,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이 군사적 충돌로 확대되면서 대러 무역에 많은 장애 요인들이 발생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대규모 경제제재가 쏟아져 나오고, 대러 제재에 동참한 한국까지 ‘비우호국’ 명단에 포함되어 현장에서 체감하는 긴장 수위는 더욱 높아만 갔다. 미국과 유럽의 지속적인 제재 강화, SWIFT 차단 및 물류 보험 중단 등 날마다 악화되는 현지 상황을 접하면서 만일’이라는 최악의 상황인 ‘퇴로’(退路) 확보에 대한 대비까지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비즈니스센터(GBC) 모스크바 사무소 역시 비상근무 체제로 돌입했다. 경기도 중소기업, 현지 한국 기관 및 러시아 바이어 등 가용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6개월간의 실시간 동향 보고, 향후 대책 마련과 대응을 위해 진땀을 뺐다. 하지만 “위기는 곧..
2023년 봄 대한민국은 정치 현수막으로 거리 곳곳이 더러워지고 있다. 정치라는 이름 아래 용산에서, 여의도에서 평행선을 그으며 극단으로 치닫는 이전투구식 싸움판이 시민의 생활공간 속으로 파고들어 적나라하게 재연되어 펼쳐진다. 현수막이 차지한 곳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나 국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자리를 잡을 공간이 없다. 독선과 아집, 공격만이 우뚝 서있어 타협과 양보를 뿌리로 하는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가끔식 정제된 표현도 보이나 아주 적은 숫자에 불과하다. 현직 대통령은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이고, 야당은 ‘돈봉투에 쩐’당이다.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군사문화적 잔재와 선과 악으로 세상을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 ‘낙인찍기’식 프로파간다 전술이다. 현수막 홍수 속 시민들은 눈에 강제로 들어온 문구를 수동적으로 읽고 화가..
개전 2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소모전으로 이어지며 ‘인내심 싸움’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배후지원 세력인 서유럽은 단일대오 실종으로 ‘반러연대’가 흔들리고 있는데다, 전쟁장기화로 인한 탄약· 미사일 등이 고갈 상태에 이르러 전쟁양상은 미국 등 서방이 원하는 방향대로 굴러갈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뜻밖의 수혜(미국의 동북아 집중도 저하, 러시아의 중국 의존 제고)를 입고 있는 중국이 종전 내지 휴전을 위한 중재 의사를 비추고 있는 것은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전황과 정세 변화는 서방의 입장에서 ‘플랜B’ 준비와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미국은 먼저 희망적 사고를 버리고 냉혹한 실상을 깨닫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리 우크라이나가 발버둥을 쳐도 러시아군을 패퇴시키거나 극적인 돌파구를 만들 수 없는 중과부적의 실상이다. 미국의 희망은 우크라이나 군이 푸틴을 밀어붙여 푸틴으로 하여금 평화협상무대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지만, ‘반러연대’의 흔들거림 등으로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중립화란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는 협상장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중국의 역할이 주목받는다. 전쟁 수혜국인 중국은 유럽과 드리워진 펜스를 고치려고 노력해왔다. 무역, 투자, 첨단기술 습득을 위해서는 유럽과의 일정한 관계유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을 가진 중국이 오랜 앙숙이던 사우디와 이란을 성공적으로 중재하듯 우크라이나전 마저 독자적으로 중재에 성공한다면, 중국은 평화와 하모니에 헌신하는 이미지를 휘날리게 되고, 미국은 ‘쇠퇴 국가’ 이미지를 심어주게 될 것이다. 이에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미국은 냉전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에 벌어졌던 1967년 6일 전쟁과 1973년 중동전을 구소련과 합동으로 종전시켰던 전례를 다시 들추어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비슷한 만큼 러시아의 자리에 중국을 집어넣으면 그림이 그려진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종전을 위해 일시적으로 나마 중국에 손을 내밀어 공동중재자 역할에 나서는 것이다. 중국을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중국 견제에 주력해온 미국 정책당국자들의 입장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전쟁 장기화로 인한 손실보다 이득이라고 본다. 동시에 우크라이나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가적 자존심이 상하지만 ‘밀리언 다이얼로그(Meliandialogue)’의 교훈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밀리언 다이얼로그는 부상하는 아테네가 약소국가 밀로스 섬에 장군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밀로스 섬 주민 1500여명을 몰살시킨, 가슴 아픈 약소국의 설움을 상징하는 단어다. 국제 사회에서 힘이 판치는 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보면, 러시아의 현 점령지를 인정하는 선에서 휴전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이다. 아울러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보다 적극 지원하는 것은 고심의 한 수다. 올해 안으로 종전 노력이 배가된다면 우크라이나 재건문제가 숨은 이슈가 될 것이고, 우크라이나 재건 시장 참여를 위해서는 일정한 기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군사적 지원은 불가피한 조치이다. 전후 재건 시장 참여는 반도체 수출 저조로 힘들어진 우리 경제를 또 다른 차원에서 일으킬 수 있는 영양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1885년 연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중국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혔다. 아버지 최우삼은 약관 20세에 고종으로부터 연변의 도태(道台. 오늘의 도지사)로 임명된 큰 인물이었다. 그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운산이 차남이다. 중국사람들 보다 중국말을 더 잘했다. 운산은 그 탁월한 능력으로 중국의 고위인사들과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청나라의 토지정리 사업을 도왔는데, 그 때 능력을 높이 인정받았다. 그 대가로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실은 그 땅이 쓸모 없는 황무지여서 큰돈 들이지 않았다. 운 좋게도 소유지 여러 곳에 도시가 생기면서 땅값이 치솟았다. 이십대에 연변갑부가 된 것이다. 1908년, 운산은 자신의 여러 소유지 가운데, 사람 살지 않는 한 시골로 조모, 부모, 형 진동 등 4형제와 그 가솔들과 함께 이주했다. 두만강 건너 고향 함경도 온성의 최씨집안 친인척과 지인들을 불러들여 신한촌(新韓村)을 세웠다. 이 마을이 바로 봉오동(鳳梧桐)이다.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둥지를 튼다는 전설이 작명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초거대 농사와 목축업에 더하여 국수, 콩기름, 비누, 성냥, 술, 과자 등 생필품 공장을 차렸다. 제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신한촌 전체 농사의 1개월 수입 보다 공장의 하루 수입이 더 컸다. 소를 한번에 500두씩 러시아 군부에 납품했다. 20세기 초, 운산은 조선 최고의 부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만주 일대에는 수많은 비적들이 준동했다. 운산은 그 도적떼를 압도했다. 당시 동북3성의 사령관 장작림(張作霖. 1875~1928)과 특수관계였다. 이는 운산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당시 그 지역에서 왕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신한촌의 치안을 위하여 운산이 자경단(自警團)을 운영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치안대도 군인들처럼 무장하고 상시적으로 훈련을 하는 전사들이었다. 운산은 또한 러시아 연해주에 드나들면서 거기서 활동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으며, 그들을 적극 지원했다. 안중근 이상설 등도 대상이었다. 3.1만세 운동 이후, 특히 북간도로 넘어오는 청년독립운동가들이 급증했다. 운산은 그들을 모두 받아들여 제대로 된 독립군으로 양성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으며, 천문학적인 재산을 쾌척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독립운동 전투장면들은 특정인물들을 지나치게 신비화함으로써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후손들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사실(史實)들을 과장하거나 축소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왜곡은 실은 목숨 바쳐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고 일신의 영달을 포기한 청년독립군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 중 한 사례가 봉오동-청산리 전투다.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붙은 러-일전쟁에서 승자가 된 후 일본은 파죽지세로 종횡무진했다. 그러한 일본군을 상대로 과연 장군들 소수의 역량과 열혈청년들의 정신력만으로 이길 수 있었을까. 이 상식적인 문제제기는 그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없었다. 그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봉오동에서 수천 명 규모의 대한북로독군부에게 참패한 것이다. 일본 수뇌부는 충격을 받았다. 이어진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이 설욕하려다가 궤멸당한 봉오동 전투의 연장전이었다. 이 전투의 총사령관은 최진동, 총참모장은 최운산 형제였다. 그 독립군들은 운산이 러시아에서 구입하여 지급한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싸웠다. 그리고 운산의 소유지인 십리평이라는 지역에 신흥무관학교 못지 않은 훈련소를 설치 운영했다. 들어가는 모든 예산과 비용은 운산의 사재로 충당했다. 이 전투에서 최운산 장군 휘하, 1연대장은 김좌진, 2연대장은 홍범도였다. 이승만에게 발탁되어 초대 정부의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겸했던 이범석은 이 훈련소의 교관이었다. 운산은 일본과 싸우다가 순국한 독립군 유가족들 돕는 일도 독립운동하듯 했다. 그 일은 부인 김성녀 여사의 몫이었다. 운산은 해방을 한 달 앞두고 평양에서 1945년 7월, 61세에 그 위대한 인생을 마감했다. 빈번한 옥살이와 고문후유증 탓이었다. 다수의 혈맹동지들은 전사하고, 병사하고, 밀정에게 낚이어 끌려가 고문사하고, 아사했다. 그의 7남매도 힘들게 연명하면서 북한과 중국, 남한에 흩어져 대를 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창공의 별과 같은 우당 이회영家, 석주 이상룡家, 왕산 허 위家에 비해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운산家의 대하드라마 가족사가 통째로 독립운동사였음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어서 널리 알려지길 빈다. 추신:최봉우는 5.16 직후 선친의 서훈신청 하라는 정부의 통지서를 받고 상경했다. 1961년 어느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담당 공무원이 돈봉투를 요구한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아구통을 맞고 쓰러졌던 그 자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것이다. 운산의 서훈이 완료된 건 그로부터 장장 16년이 지난 1977년이었다. 그것도 만주에서 독립운동했다는 증거만 제출하면 주는 흔한 등급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이 정권을 잡았으니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명예를 높여드리기 보다는, 되는대로 다수에게 훈장을 주어 리더십의 친일색깔을 희석시키는 계기로 활용하려는 분위기가 대세였을 것이다.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공무원들은 그 분위기에 편승, 겁도 없이 그렇게 뇌물을 챙겼던 것이다. 운산의 후손들은 죽을 고생하면서도 그 큰 명예를 붙들고 신산고초를 겪으며 험산준령을 오르내렸다. 봉오동 역사 바로잡는 큰 과업을 운산의 장남 최봉우의 5남매가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세워서 수행하고 있다. 쉽지 않지만, 책도 내고, 학술세미나도 하고, 봉오동 방문도 하며 의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최성주 대표(장손녀)가 가족을 대리하여 이끌어가고 있다. 이 단체에 관심 갖고 후원하는 일은 명예로운 일이다. 깊이 생각해보면, 실은 오늘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경기도 여·야·정이 ‘천원의 아침밥’ 확대를 위한 예산 투입에 잠정 합의하면서 이 사업에 관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부천시는 관내 모든 대학이 ‘천원 아침밥’ 사업에 참여하는 전국 첫 지자체가 됐다. 민주당은 ‘천원의 아침밥’ 혜택의 범위를 노동자들과 고3 수험생들에게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국민 호응도가 높은 이 사업은 ‘포퓰리즘 우려’라는 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경기도 여·야·정이 정밀한 ‘선택과 집중’으로 협치의 성공 모델을 창출해내기를 기대한다. ‘천원의 아침밥’은 아침 식사 결식률이 높은 대학생에게 양질의 아침밥을 1000원에 제공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청년층의 아침 식사 결식률을 줄이고 쌀 소비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시행이 추진돼왔다. 학생이 한 끼에 1000원을 내면 정부가 1000원을 지원하고 학교가..
나 나탈리야 파우스토바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애잔하고 신비로운 음률 때문일까. 러시아의 오래된 자장가 한 곡에 매혹되었는데, 해석된 가사를 보고 흠칫 놀랐다. 1절은 세계의 모든 자장가처럼 ‘자장 자장, 잘자라 아가야’ 분위기인데 2절로 가면서 확 바뀐다. (2절) 테레크강은 바위 따라 콸콸 흐르며/ 탁한 파도가 철석 거리네/ 나쁜 체첸족이 강변을 따라 기어오며/ 칼날을 가는구나/그러나 네 아빠는 노련한 전사/전장을 누빈 불굴의 전사(후략) (3절) 너도 알겠니 그 때가 올 거야/ 싸움의 날이 찾아올 거야/용감하게 말 등자에 발을 걸고/손에 총을 쥐거라/내가 전투용 안정에/비단으로 수를 놓아주마(후략) 인생이 고해라도 자장가만은 평화로워야하지 않나. ‘ 아가, 나쁜 놈 잡기 위해 칼날을 갈자, 싸움의 날이 오면 총을 쥐거라’ 라니. 돋보기를 대보자. 노랫말 속의 카자크(Cossacks/ 혹은 코사크)는 전쟁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러시아를 수호해온 군대 이름이다. 아이가 성장해 카자크가 돼 달려가 싸울 전쟁 적수는 러시아 남쪽의 체첸 공화국. 러시아와 체첸은 왜 싸우는가.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 짚어보자. 기원 후 880년대, 유목민들이 산발적으로 살던 땅에 북유럽의 바이킹족이 남하,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점령해 ‘키예프 루스’를 세운다. 998년, 키예프 루스는 몽골 침략으로 멸망하고 북쪽의 모스크바 대공국이 성장, 1721년, 러시아 제국이 된다. 20세기 넘어오면서 러시아는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1904년의 러일 전쟁, 1905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부른 참사인 피의 일요일, 1917년 2월 혁명, 1918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간의 러시아 내전 등...... 러시아에 불어닥친 혁명 바람은 1917년, 레닌이 이끈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탄생시킨다. 유럽 동구권 등 주변 국가도 소련의 위세에 끌려 공산화된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대적한 냉전시대에 소련 경제는 갈수록 추락했다. 1982년, 당권을 잡은 고르바초프가 경제 살리겠다고 시작한 개혁, 개방의 불꽃은 주변 위성국으로 튄다. 그들의 민주화, 독립요구에 불을 붙인 것이다. 결국 1991년, 15개 위성국이 차례로 독립에 성공했는데, 체첸 공화국은 예외였다. 체첸이 가진 6천만 톤 규모의 석유, 카스피해와 흑해의 연결지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익, 독립시 주변국에게 미칠 파장 등을 셈한 러시아가 ‘체첸만은 절대, 절대 독립 불가!’를 고수한 것. 18세기부터 러시아의 침략으로 만신창이 되어온 체첸인의 복수심과 독립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둘은 1990년대에 두 차례에 걸친 전쟁, 끔찍한 테러와 인질극 ,그에 대한 단죄 등,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전을 계속해왔다. 소강된 것은 푸틴이 대통령이 되면서 강행한 체첸 초토화 작전 때문이었다. 체첸의 독립을 이끌던 지도자 대부분이 죽거나 감옥에 갇혔다. 그렇다고 체첸인 모두의 독립의지까지 말살할 수는 없었을텐데, 지난 2월, 체첸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위해 국가 근위대를 파견해주었다. 체첸의 수장 ‘람잔 카디로프’가 친러시아쪽이며 푸틴의 최측근인 까닭이다. 우크라이나와 동병상련일 체첸의 급변신이 기막히다. 제국주의의 탐심, 전쟁의 그림자가 오랫동안 세상 모르는 러시아 아기들의 요람에 드리웠던 것도 기막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