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실 블랙핑크가 어떤 친구들인지, 그들의 노래가 어떤 경향성을 지니는지 잘 모른다. 근데 아마도 그건, 내 나이 대의 사람들 대다수가 그럴 것이다. 그냥 BTS급의 세계적 인기를 지니고 있는 팝 그룹쯤으로만 알고 있으며 국내만큼, 아니 국내 이상으로 인기가 높다는 것을 바람풍으로 들은 정도일 것이다. 레이디 가가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레이디 가가가 브래들리 쿠퍼와 나온 2018년 영화 ‘스타 이즈 본’보다는 바브라스트라이잰드와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나왔던 1976년 영화 ‘스타 탄생’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스타 이즈 본’은 ‘스타 탄생’을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블랙 핑크와 레이기 가가는 뮤지션들이다. 이쪽 방면의 아티스트들은, 영화인들보다 더, 대통령이 됐든 대통령 할아버지가 됐든, 아무리 그들이 부탁한다 한들 자기가 싫으면 안 하는 성향의 인물들이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블랙 핑크는 그 좋다는, 아니 단박에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는 UN공연도 마다했다고 한다. 그들의 스타성은 실로 하늘을 찌른다. 오랜 기간 이쪽 업계를 관찰해 온 사람으로서 한미 정상회담에 블랙 핑크 – 레이디 가가 공연이 ‘주요 의제’처럼 됐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지금의 정부가 그저 ‘깜짝 쇼’를 하려고 혈안이 돼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놀라운 점은 블랙 핑크 급 스타들의 공연을 즉흥적으로 유치하려 했다는, 그 무모함에 있다. 이들의 스케줄은 2~3년 전부터 예약을 걸어도 될까 말까이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 필요성이 요구되거나 해야 한다. 그것도 본인들이 싫으면 한 번에 ‘까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들을 섭외하기까지는 매우 정교하고 디테일한 계획과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대통령실이니까,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보다는 대체 이 공연의 계획과 입안 과정의 실체, 그 진실은 무엇일까. 정말 질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인이 그토록 원했던 일일까. 진실로 그것이 알고 싶다이다. 다 떠나서 블랙 핑크와 레이디 가가는 대체 무슨 죄인가. 한국의 정치가 이상적인 수준에 도다르지 못하는 이유는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대통령, 문화적인 국회의원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그저 이용하려고만 한다. 연예계 셀럽들과 사진을 찍고 유명세에 편승해 표 한 장 더 얻으려는 천박한 심성 외에는 다른 게 없어 보인다. 정치가 문화적이 돼야지 문화를 하위 개념으로 깔보는 시선으로는 정치가 문화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얻기가 힘이 든다. 정치가 문화적인 것이 되는 데는 천부적이거나 타고난 감성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 역시 끊임없는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교육의 과정이 뒷받침되면 모두 어느 정도는 미술을 알아보는 식견과 음악을 취향 대로 골라 듣는 귀가 열린다. 혹은 영화가 갖고 있는 그 안의 메시지를 읽어 낼 수가 있다. 또다시 화제가 되고 있는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 하급 킬러 한희성(구교환)은 주인공 길복순(전도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모순 덩어리예요. 우리는 그 모순 너머의 진실을 찾아야 해요.” 정치는 모순과 이율배반의 원천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정치인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구동하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앞장서는 것이다. 적어도 문화 행위라고 하는 것이 늘 그런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정치인들이 잘 알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정친인들은 볼거리 이벤트에 앞서서 자신이 할 일들부터 잘 챙겨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수차례에 걸쳐 얘기하는 것이지만, 영화에 관한 법률 이름이 아직도 ‘영화와 비디오에 관한 법’이다. 지금 세상에 비디오가 남아 있는가. 아직도 VHS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회의원은 입법을 하는 사람들인 바, 그렇다면 자신들의 책무를 다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이다. 일종의 직무유기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다니기에는 시간이 턱도 없이 부족할 것이다. 안되면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봉준호가 세계적인 감독이고 그가 K-컬처를 이끄는 사람이라는 판에 박힌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든 ‘기생충’이 왜 미국의 아카데미나 프랑스의 칸에서 주목을 받았는지, 그 영화가 한국을 넘어 세계 사회에 어떤 얘기를 던져 주고 있는지 성찰하는 얘기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앞으로 봉준호를 만날 계획이 있다면 그가 만든 새 영화가 에드워드 애슈턴이 쓴 SF소설 ‘미키 7’을 토대로 한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박찬욱 감독을 언급하려면 왜 그가 지금 베트남 작가 비엣 타인 응우엔이 쓰고 퓰리처를 탄 소설 ‘동조자’를 7부작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지 정도는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의전팀이 그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사전 보고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 정부는, 안타깝게도, 그 같은 문화 수준을 기대하기 힘들다. 실로 암담한 일이다. 사람들이 점점 심하게 자조적이 되어 간다. 블랙 핑크 논란은 좌절감까지 느끼게 한다. 나라가 이렇게까지 가야 하겠는가.
-할매요, 강아지 사셨네요? -하도 적적해서 똥개 두 마리 키울라고. -한 마리구만요? -집에 한 마리 더 있어. -본래 개 안 키우셨잖아요? -영감탱이. -아이고, 할아버지를 똥개라고 하시면... ㅋㅋㅋㅋ -두 마리 다 내가 밥 안 차리주만 안 먹고 굶응께.
“6·25 때 우리를 위해 피 흘린 형제의 나라를 이번엔 우리가 돕자” 지난 2월 6일 발생한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참사로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튀르키예에서만 45조 원이 넘는 경제적 피해가 발생하는 등 끔찍한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즉각 구조대와 의료진를 파견했고 성금과 구호물품도 보냈다. 지방정부, 기업, 복지단체, 종교계와 국민들도 성금과 구호물품을 현지에 전달하고 있다. 의류와 식품, 담요, 텐트, 매트리스, 침낭, 의료용품 등은 물론 이동식 세탁차와 급식차, 임시주택 컨테이너도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해운사인 HMM은 구호물자 무상수송에 나섰다. 한국이 보낸 성금과 구호물품이 지진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에 튀르키예 정부와 국민들은 지진 희생자..
우리가 정치를 접하는 것은 미디어를 통해서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대통령, 국회의원의 메시지가 정치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미디어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실, 당의 대변인을 통한 메시지를 주로 전달한다.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하였으나 못내 억울함에 부실기업을 떠맡은 기분이라 말했다. 당시 민주당 박지원 대변인은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이 책임져야 하나”라고 비판하였다. 한 줄의 논평이 정확하게 폐부를 찔러 상황이 정리되었다. 2000년 총선 패배로 자민련이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한 후 이인제가 JP를 향해 “서산에 지는 해”라 비난하자 JP는 “지기 전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겠다”라고 답했다. 날 선 비판에 대한 멋진 화답이다. 정치논평 중 생활언어로 정착한 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내로남불, 정치 9단, 총체적 난국을 들 수 있다. 헌정사상최장수(4년 3개월) 대변인을 지낸 박희태 전국회의장이 그 주인공이다. Naeronambul은 뉴욕타임스 2021년 4월 한국정치 뉴스에 영어단어로 표기되었다. 1996년 국회본회의장에서 한 말이 언론을 통해 회자되면서 생활언어로 정착된 경우다. 총체적 난국도 1990년 경제위기에 대한 이승윤부총리의 영어(total crisis) 표현을 옮겨 이야기하면서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박희태는 당대변인 문화를 창시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대변인중에 명대변인으로 보수, 진보에서 박희태, 박지원의원이 각각 꼽힌다. 이낙연 전 대표도 점잖고 중후한 언어로 대변인에 5차례 선임되었다. 박희태 대변인처럼 촌철살인이나 박지원 대변인처럼 유머러스하게 핵심을 찌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독설, 험담 없는 언어로 대변인의 품격을 만들었다. 정치인의 언어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고 노회찬 의원이다. 2004년 KBS심야토론에서 주장한 “삼겹살 불판 갈자”는 비유는 정치변화의 당위성을 대중적 언어로 구사한 명언으로 평가된다. 그는 또 정치인, 대선후보들의 민생투어란 말을 적나라하게 꼬집었다. 민생은 우리의 삶인데 어떻게 투어(관광)의 대상이 되느냐면서 선거 때나 서민의 삶을 이야기하는 태도에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 요즘엔 대변인의 언어가 거칠고 생경해졌다. 정치가 실종되어 극한대립을 하다 보니 자연스런 결과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부터 정제되지 않고 거친 표현이 많자 대통령실홍보팀은 뒷수습하기 바쁘고 여당의 대변인은 야당의 공세에 맞대응하면서 품격 있는 언어가 사라졌다. 대통령실의 대변인은 공식적 입장을 주로 말하고 당의 대변인이 정치적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작금의 상황엔 그게 허용되지 않는 듯하다. 새삼스레 JP와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고급스럽고 여유 있는 언어가 아쉽다. 22년 12월 윤관석, 윤재옥 두 의원이 공동위원장으로 있는 국회선플위원회는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는 국회의원에게 선플상을 수여하였다. 고교, 대학생 300명으로 구성된 청소년 선플 SNS기자단이 국회 회의록에 기록된 언어를 분석하여 수상자를 선정하였다. 모처럼 듣기 좋은 소식이었다. 이념적 지향점이 다르고 대립과 갈등이 깊어진 정치현실이지만 혐오와 비난의 언어를 자제한다면 서로 협의할 수 있는 폭이 커진다. 정치는 혁명이 아니기에 서로 다른 입장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인정은 언어로 표현된다. 지금은 물러난 선배정치인들의 여운과 품격 있는 정치언어를 한 번쯤 되돌아보도록 권하고 싶다.
뉴스가치의 요소들 기자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취재하고 뉴스화한다. 그렇다고 세상만사 모든 일이 뉴스가 되지는 않는다. 기자의 눈에 뉴스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은 뉴스가 되지만 어떤 일들은 전혀 보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뉴스화 결정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뉴스가치론(news value)’이다. 대중들이 알 만한 가치가 있고 또 기자가 알릴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어떤 일이 뉴스로 알려지는 데에는 공중과의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해당 사건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거나 관련된 인물이 유명하며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면 뉴스화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뉴스가치’에는 영향성, 저명성, 희귀성, 인간적 흥미 등의 요소가 있다. 그러니까 뉴스에는 이런 뉴스가치 요소가 최소한 하나는 있는 것이다. 최근 유명 쇼핑호스트가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고 있다. 홈쇼핑방송을 진행하면서 음식을 먹기도 하고, 생방송 중에 비속어를 사용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보도에는 어떤 뉴스가치적 요소가 있는 것인가. 쇼핑호스트의 공인성(公人性) 우선 영향성이다. 쇼호스트라고도 불리는 쇼핑호스트는 홈쇼핑방송에 출연하여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판매를 촉진하는 전문직업이다. 다른 상거래와 다른 특이한 것은 ‘방송을 통하여’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방송은 동시에 넓은 지역으로 전달되는 특성이 있어서 시청자들의 생활과 다양한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저명성이다. 쇼핑호스트는 ‘방송을 통해’ 상품에 대해 설명을 하여 시청자들의 구매를 돕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쇼핑호스트는 방송시간이 축적되면서 시청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고 유명해진다. 시청자들이 알아보는 셀럽(celebrity)이 되는 것이다. 또 한 요소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탈성(逸脫性)이다. 홈쇼핑방송을 통해 판매되는 상품의 종류는 의류나 보험에서부터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식품류의 경우에는 음식을 조리하고 시식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식품류 상품 판매 프로그램이 아닌 시간에 화면에 등장하는 쇼핑호스트가 음식을 먹으면서 방송을 진행하는 행위를 보고 시청자들은 당황하지 않았을까. 또 다른 방송에서 비속어 사용을 들으면서 시청자들은 또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쇼핑호스트는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판매를 촉진하는 전문가이고, 시청자들의 상품 선택 결정에 영향을 미지는 방송인이다. 특히 ‘방송’을 통해서 유명해지고 더욱 저명해진다. 즉 강한 공인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방송 시청과 상품 소비의 양면성을 지닌 방송수용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쇼핑호스트는 직업적 자기정체성 인식에서 공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공적 마인드 제고를 기대한다.
1. 광고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티브이와 잡지와 온라인에서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는 메시지들. 그 현란한 세 치 혀에 설득되어 필요도 없는 물건에 돈을 쓸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싸기는 하다. 멀쩡히 잘 사용하던 기존제품에 싫증을 느끼게 만들고 새 물건을 구입하도록 부추기는 일종의 요물이니까. 밤을 낮 삼아 아이디어 짜내는 광고인들이 이런 평가를 들으면 억울할지 모른다. 하지만 광고사에 아로새겨진 업보가 분명하다. 특히 2차 산업혁명이 증기기관차처럼 질주하던 19세기 중엽 이후가 그랬다. 미국과 유럽의 광고산업 규모가 커지고 광고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허위와 과장을 써서라도 물건만 팔고 보자는 판매지상주의가 도를 넘은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이 광고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을 불러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1850년대 미국 대중신문은 수익의 3분의 1 이상을 광고수익으로 벌어들였다. 이런 재정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광고는 신문발행인들에게조차 일종의 ‘필요악(必要惡)’ 취급을 받았다. 광고의 이러한 처지는 순수 예술과 명백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음악, 미술, 문학 등은 오랫동안 문화적 귀족의 반열에 오른 존재였다. 반면에 광고는 저 높은 무대를 향해 경배를 드리는 하층민에 불과했다. 그만큼 광고와 예술의 간격은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2. 19세기 말이 되자 사건 하나가 벌어진다. 광고가 순수 예술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것이다. 빅토리아조(朝) 라파엘 전파(前派)를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 경. 당시 영국 최대의 광고주 피어스 비누가 그의 회화작품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그림 1>이 밀레가 그린 원본이다. 나무 둥치에 앉은 금발의 미소년이 눈을 들어 비누거품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은 1886년 ‘아이의 세계(A Child 's World)’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밀레는 (훗날 해군제독이 되는) 자기 손자를 모델로 한 그림을 윌리엄 잉그램에게 팔았다. 신문사 경영주였던 잉그램은 이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밀레의 작품을 자기 신문에 전면화보로 실었다. 이 시기 영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 신문에 실린 멋진 그림을 오려내어 액자 형태로 벽에 거는 걸 좋아했다. 거품(Bubble)이라 이름을 바꾼 밀레의 그림을 게재한 신문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충분한 효과를 본 잉그램은 2,200파운드를 받고 작품을 다시 피어스 비누회사 소유주 토마스 배럿에게 판매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장사의 귀재로 불리던 배럿이 이 그림을 광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그림 2). 순수 회화를 천박하기 짝이 없는 광고에 사용한 이 행위는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당시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던 금기를 깨트렸기 때문이다. 두 그림을 한번 찬찬히 비교해 보시라. 별달리 고친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원본의 위쪽, 비누거품 좌우로 ‘피어스 비누(Pear’s soap)’라는 상표명을 추가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의 왼쪽 신발 아래 (거무스레한 색깔의) 비누를 살짝 배치했다. 토마스 배럿은 막대한 광고비를 투자하여 영국의 모든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노출시킨다. 순수 예술과 상업 광고를 결합시킨 이 최초의 사건은 대중들의 폭발적 주목을 끌었다. 피어스 비누가 경이적 판매고를 달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곤경에 빠진 것은 원작자 밀레였다. 왕립학술원 회장까지 지낸 이 초일류 화가는 고귀한 예술혼을 돈 몇 푼에 팔아먹었다는 조소와 비난을 뒤집어쓴다. 자기 그림을 광고에 쓰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들은 밀레는 (물론)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소유권을 사들인 바렛의 시도를 막지 못했다. 에버렛 밀레는 1896년에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영국의 유명 신문들에는 밀레의 ‘부도덕한’ 행위에 분노하는 독자 투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3.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배리 호프먼은 예술과 광고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근대 광고의 탄생 이래 둘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는 거다. 예술은 삶의 진실을 관통하는 최고급 창조의 소산이었다. 그에 반해 광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건만 팔아치우면 된다는 조잡하고 부정직한 행위였다. 하지만 광고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난다. 산업 자본주의 난숙(爛熟)에 따라 광고와 순수 예술의 엄격한 경계가 무너진 것이다. 미학자 볼프강 하우크는 자신의 책 ‘상품미학비판’에서 그 이유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의 무제한적 식욕이 상업적 파괴력을 얻기 위해 순수 예술의 대중적 공감능력을 무서운 속도로 흡수했기 때문이라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대중 사회에서 차지하는 광고의 위상이 자연스레 높아진 것이다. 수준급의 회화 작품이 광고에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이 흐름을 선도한 것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의 유럽이었다. 스위스의 고기통조림 회사 '율리우스 매기 앤 시에(Julius Maggi & Cie)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911년 이 회사는 이탈리아의 석판화 대가 레오네또 까삐엘로를 초빙해서 광고포스터를 만든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빨간색 정육각형 패키지의) 통조림 '쿠브(Kub)' 포스터는 유럽 예술계에 일대 충격파를 던진다. 아래에 “K에게 물어보세요(Exiger le K : Ask the K)"라는 독일어 슬로건이 쓰인 까삐엘로의 작품이 있다. 이 포스터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는 파블로 피카소다. 그가 대상물을 기본적 입체 형태를 전환시켜 재창조하는 입체파의 대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12년에 그린 ‘바이올린과 포도(violon et raisins)’가 유명하다. 같은 해 화가는 입체파 작품을 하나 더 그린다. ‘포스터가 있는 풍경(Paysage aux affiches)’이다. (그림 4). 그런데 이 작품에는 매우 희귀한 형상이 포착되어 있다. 광고를 자세히 살펴보시라. 화면 왼쪽 아래에 정육각형 입체로 묘사된 선화가 하나 보일 거다. 그 안에 무슨 글씨가 적혀있는가? ‘Kub’다. 즉 당시 판매되던 ’쿠브' 통조림의 패키지를 그려 넣은 게다. 천하의 피카소까지도 자기 작품에서 특정 제품 브랜드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조금 믿기는 어렵지만, 광고역사가 핀카스는, 심지어 피카소가 참여한 큐비즘(Cubism)이란 명칭이 통조림 쿠브(Kub)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4. 광고와 순수 예술이 경계선을 허물고 본격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싹을 틔운 팝아트(pop art)가 일등 중매쟁이 역할을 한다. 이 새로운 대중예술(popular art)은 하위문화인 만화, TV콘텐츠, 영화포스터 그리고 광고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변형시켰다. ‘작은 금발 폭탄(That little blonde bomber)’이라 불린 메리 웰스 로렌스가 광고에 음악, 패션, 팝아트를 접목시킨 대표적 크리에이터였다. 광고와 예술의 밀월은, 오일쇼크가 세계를 지배한 1970년대에는 조금 잠잠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예술계를 선도하던 유명 팝아티스트들이 대거 광고와 관계를 맺는다. 이들이 광고에서 예술적 이미지를 빈번히 차용한 것은, 광고야말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본질을 보여주는 가장 이상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고를 작품 속에 도입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광고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작업을 통해 예술이란 존재가 일상적 삶과 동떨어진 곳에 고고하게 존재하는 범접불가 영역이 아님을 폭로하려 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의 압솔루트(Absolut) 캠페인이다. 투명한 유리병의 이 스웨덴 산 보드카가 미국에 첫 수출된 것은 1981년이었다. 4년이 흐른 후 보드카 수입회사 CEO 미셀 루가 자기 친구이자 초절정의 인기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부른다. 광고에 사용할 압솔루트 병을 좀 그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워홀은 6만 5천 달러를 받고 광고 그림을 만든다. 그리고 이 작품이 세상을 뒤흔들게 된다. 워홀로부터 시작된 예술가들과의 공동작업은 갈수록 범위를 넓혀갔다. 전설적 그래피티(Graffiti) 미술가 키스 해링이 만든 압솔루트 캠페인(그림 6)은 광고의 예술적 성취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1990년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일생동안 인종차별과 동성애 박해에 대하여 저항한 사회 운동가였다. 전통 예술의 귀족주의를 무너뜨리고 일반인들도 예술을 즐기고 누려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귀결이 광고제작 직접 참여였다. 흥미로운 것은 해링이 만든 압솔루트 광고 시리즈가 대중에 공개된 것은 그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숨은 스토리가 더욱 화제를 끌고 압솔루트의 인기를 상승시켰다. 5.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광고와 예술의 관계는 최고 수준으로 격상된다. 광고가 오히려 예술을 도구화시키면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위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대중의 천시를 받던 광고가 거꾸로 대중문화에 영감을 부여하면서 유행과 패러디를 이끄는 진원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92년 발표된 화가 조지 로드리그(George Rodrigue)의 ‘푸른 개(blue dog)’ 시리즈가 상징적이다. 광고주는 역시 압솔루트 보드카. 로드리그는 자신의 광고 일러스트레이션에 늘 ‘푸른색 개’를 등장시켰다. 이 작업을 통해 광고와 예술의 독특한 혼종(hybrid)을 탄생시킨다. 그는 자기가 만든 광고를 회화의 자격으로 갤러리에 전시했다. 이 전시 이벤트는 광고와 예술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리며 당대 미술계의 화제를 집중시켰다. 글을 마치려 하니, 문득 다시 19세기가 떠오른다. 온갖 수모 끝에 세상을 떠난 존 에버렛 밀레 말이다. 그의 사후 소설가 메리 코렐리는 자기 작품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화가를 비난했다. “나는 밀레가 피어스 비누의 거품을 부는 작은 녹색 소년을 그릴 정도로 스스로를 타락시킨 순간, 예술가로서 명성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고 확신해. 어떻게 광고에 예술을 팔아먹을 수 있어?” 상상을 해본다. 광고에 대한 멸시와 폄하가 일상적이던 그 시절 사람들이 오늘날 광고가 예술과 맺은 관계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기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릴 게다. 두 장르가 유전자 결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유로이 쌍방을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와 예술이 펼치는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이 일 년 내내, 사시사철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시대가 온 것이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국회가 30일 현역의원 전원이 참석하는 전원위원회를 가동하며 ‘선거제 개편’ 움직임에 본격 나섰다. 전원위는 모든 국회 의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법정시한인 4월 중에 여야 합의로 단일한 수정안을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정치개혁특위를 통해 3개안이 마련돼 있다. 1안은 도농복합식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병립형 비례대표제, 2안은 개방명부식 대선거구제와 전국·병립형 비례대표제, 3안은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되 권역별·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여야와 국회의원 개인별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과연 합의를 이뤄낼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게 사실이다. 승자독식 방지 등의 명분을 내세우며 김진표 국회의장이 시동을 건 선거제 개편은 시작 단계부터 국회의원 증원 방안이 여론의 거센 비..
2022년 11월 30일은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이날 공개된 인공지능 채팅로봇인 쳇지피티는 바로 인간의 일상과 인간관계,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꿀 게임체인저로 등극했다. 출시된 지 단 두 달 만에 쳇지피티의 월 사용자수 1억을 돌파했다. 쳇지피티가 가장 먼저 판을 뒤흔들어놓고 있는 분야는 아이러니하게도 기술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역으로 여겼던 예술분야다. 화가와 음악가들은 경악하고 있다. 이미 AI가 그린 그림이 미국의 공모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쳇지피티를 개발한 오픈AI가 내놓은 ‘달리2’와 미드저니AI연구소가 내놓은 ‘미드저니’에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를 고흐 화풍으로 그려줘’라고 요구하면 30초만에 그려준다. 음악AI에 ‘연인을 잃은 사람을 위한 슬픈 발라드풍 노래를 만들어 줘’라고 요구하면 그럴듯한 가사까지 붙인 노래를 작곡해준다. 당혹스럽기는 언어를 다루는 문예창작학과의 강의실도 다르지 않다. 학생들은 쳇지피티라는 이 낯선 경쟁자가 어디까지 자신의 미래를 위협하게 될지 짐작하지 못한다. 교수들은 당장 학생들이 제출한 작품의 어디서 얼마까지를 쳇지피티가 써준 것인지 알기 어렵다. 문학이 직면한 당혹스러움은 쳇지피티가 인간 고유의 문자언어를 기반으로 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주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인간은 언어로 역사를 갱신해왔다. 언어로 만든 신화와 전설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언어로 정한 법률로 질서를 유지하고, 언어로 과학과 기술을 개발하고 전승해왔다. 그런데 순식간에 세계의 수많은 언어를 모두 학습하고 사용하는 쳇지피티가 출현했다. 며칠 전에 내가 몸담은 학교에서 쳇지피티 특강을 연다는 공지가 떴다. 소설전공 학생들과 같이 들으려고 바로 신청했는데 어느새 마감이었다. 대형 강의실로 바꾸고 추가신청을 받는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공지가 뜨자마자 마감이었다. 쳇지피가 몰고 올 변화는 우리가 어떤 상상을 하던 상상 그 이상일 것이 분명하다. 지금의 교육체계와 인간의 일상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인류의 문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언어의 새로운 사용자의 출현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진 영혼의 집이라고 하는 말이 더는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 세계가 새로운 언어사용자의 출현에 긴장하는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언어 현실은 어떤가. 온갖 무논리와 혐오로 가득한 언어들이 크고 작은 언론을 도배한다. 가장 역동적인 청년들의 나라였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주춤거리고만 있다. 반면에 지나간 역동의 시대를 다 살아낸 노인들은 30년, 40년 전에나 통했던 비이성적인 언어에 기대어 기득권을 움켜쥐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스프 리플렉스』, 현직 내과의사인 소설가 김강이 쳇지피티3.5의 출시에 맞추어 내놓은 소설책의 제목이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신생아가 무엇이든 반사적으로 움켜쥐는 생존본능을 가리키는 의학용어다.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모든 부를 움켜준 노인들이 노인들의 표로 권력을 획득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한국의 근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모든 장기를 인공으로 교체한 노인들은 130세가 되도록 살며 움켜쥔 부와 권력을 내놓지 않고, 청년들은 한탄한다. - 노인들이 신 같아요. 그런 청년들에게 세상을 지배하는 노인들은 말한다. - 자네들도 언젠가 늙을 거 아닌가. 아직은 쳇지피티가 쓰지 못할 이야기를 담은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읽으며 쳇지피 시대를 거꾸로 가는 한국사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탐욕과 망상과 사치와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지혜의 원천이다. 만일 네가 진심으로 정욕을 극복하고자 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정욕에 지배당할 때가 있더라도 너에게는 정욕을 이겨낼 힘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부가 단번에 말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고삐를 내던지지 않고 계속 잡아당기면 말은 언젠가는 서게 되어 있다. 정욕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싸움터에서 백만 군대에 이기는 자보다 위대한 승리자이다. 모든 타인을 이기는 것보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 훨씬 낫다. 타인과의 싸움은 언젠가는 질 때가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기는 자는 영원한 승리자로 남을 것이다. (법구경) 남을 자기 자신처럼 존경하고, 자기 자신을 이기며,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야 말로 인애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높은 가르침은 없다. (공자) 젊은이여! 유흥이나 사치 등의 온갖 욕망의 만족을 멀리하라. 설사 온갖 욕망을 완전히 물리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뒤로 미루면 미룰수록 커지는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관능의 향락을 절제하고 미룸으로써, 네 즐거움은 더욱더 풍성해진다. 즐거움이 수중에 있다는 의식은 그 향락에 의해 채워진 감정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왜냐하면 즐거움은 욕망의 만족과 함께 당장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칸트) 사람의 마음속에 사는 정욕은 처음에는 거미줄 같지만, 나중에는 굵은 동아줄처럼 돼 버린다. 정욕은 처음에는 남과 같다가, 다음에는 손님처럼 되고, 마지막에는 그 집의 주인이 되어버린다. 방종은 죽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것은 집 밑을 흐르며 얼마 안 가 집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수맥과 같다. (블래키) 나의 간절한 소망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것,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그 진실을 사랑함으로써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말하는 것, 성미가 급한 사람을 인내심으로 대하는 것,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 속에서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이것이 바로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법구경) 모든 인간의 삶은 정욕의 강화가 아니라 약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시간이 그러한 절제와 노력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질서도 의미도 마비되고 행복의 추구만을 하는 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을 한데 묶는, 그리고 만물 앞에서 스스로 영장으로 책임을 지던 그런 생각은 다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저 본위가 되어버렸다. 사실상 우리는 하나의 세계를 잃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이 어지러움이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인류가 멸망을 면하려면 가슴속에 하나의 세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의 통일성을 믿는 사상이 나와야 한다. (함석헌)/ 주요 출처 :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회주의적 도시는 계획된 도시이다. 국가는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면서 사회주의적 이념을 공간에 투영한다. 사회주의적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 중심에 광장이 있고 기념비나 동상, 문화시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도시와 반대로 사회주의적 도시는 금융시설이나 소비를 위한 쇼핑센터보다는 문화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적 도시 설계자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식민시기 최초의 기업도시를 만들었던 흥남은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건설되었다. 고급시설을 갖춘 일본인 거주지는 구역으로 나뉘어 등급에 따라 거주했다. 이를 ‘흔히 보는 도시의 모양과 다른 소련식 신흥도시였다’고 기록한다. “흥남은 20년도 안 되는 사이 흥남부(府)로 되고 인구 약 18만 명의 함남도 제1의 대도시로 되었다. 일본인 인구는 조선 전체에서 제3위이고 물동량은 하루 1만 톤에 이르렀다. 쇼와(昭和)초기부터 동양 제일의 화학공장이 생겨난 것은 대 수력 발전에 의해 풍부하고 싼 전력이 개발된 것과 더불어 일본 질소 노구치(野口)사장의 강렬한 의욕과 젊은 기술진의 총결집 나아가 개발을 지원하는 자금원이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공장의 부대설비로는 스스로 건설한 조선제일 병원을 비롯하여 학교 우체국 관청 사무소 경찰 집회소 대 체육관등이 있었다. 사택은 수세식 변소와 증기남방 까지 완비하는 등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공장 도시로서 종합계획 하에 건설되었다.” 해방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전쟁으로 함흥-흥남은 폐허가 되었다. 특히 흥남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후 함흥-흥남의 공장복구에는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이 참가했다. 공장의 복구와 신설에 소련기술자들이 참가했고, 함흥-흥남의 도시건설에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동독도시기술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통역으로 참여했던 2019년 출간된 신동삼의 저서 『함흥시와 흥남시의 도시계획』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동독인들은 함흥의 중심거리와 일부의 살림집을 건설하고 철수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고 함흥을 체제 선전을 위한 ‘로동계급’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함흥-흥남은 화학공업 중심지로 산업시설이 밀집해 있어 근로자들이 많다. 이러한 특성으로 소 도시 계획과는 예외로 대규모 화학공업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도시는 1980년대 형태를 갖추었다. 1980년대 도시중심에는 대극장과 함께 광장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도시중심에 있어야 할 김부자 동상은 동흥산 언덕(반룡산)에 위치해 있다. 함흥-흥남은 일제강점기부터 반체제 세력인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으로 ‘지방주의’ 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해방 후 김일성은 이러한 세력과 권력을 다투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사회주의 화학공업도시로 계획된 함흥-흥남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거쳐 현재는 물류유통의 중심지로, 해양과 대륙을 잇는 동해안의 중요한 도시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