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다시금 우리 사회의 절체절명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루에 수 천 명의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코로나는 내년 대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동안 현 정권은 이른바 K 방역의 우수성을 홍보하면서 그나마 일정 수준의 지지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이것도 더 이상 먹히기 힘들 것 같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K방역이란 것은, 우리 국민들의 높은 민도와 의료진들의 헌신적 노력에 의한 것이지, 정부 덕분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현 정부의 코로나 초기 대응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백신 도입이 늦었고, 마스크 부족 사태 등을 생각하면, 정부의 초기 대응도 칭찬받을 수준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접종률도 국민들 덕분에 단시간 내에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위드 코로나도 높은 접종률 덕분에 실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인데, 만일 백신을 좀 더 일찍 도입했더라면 위드 코로나도 조기에 실시할 수 있어 자영업자들의 손해를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도 성립할 수 있다. 조기에 위드 코로나를
진정한 예술 작품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서 그와 예술가가 한 마음이 되고, 나아가서는 그와 예술가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접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는 작용을 한다. 바로 거기에 개개인과 타자의 분열로부터의 해방과 고독으로부터의 해방이 있고, 바로 이러한 개개인과 타자의 융합 속에 예술의 매력과 공적이 있다. 사상적 저술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견, 새로운 사상을 전달할 때 비로소 사상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와 마찬가지로, 예술작품도 그것이 인간의 삶 속에 새로운 감정을 가져다줄 때 비로소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은 인류의 진보를 위한 두 기관 중의 하나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서로의 사상을 주고받으며 또 예술작품을 통해서 단순히 현재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람들과도 감정을 주고받는다. 지식이 점점 완성되어 가듯, 바꿔말하면, 더욱 진실하고 더욱 필요한 지식이 그릇되고 불필요한 지식을 몰아내듯, 감정에 있어서도, 예술작품에 의해 더욱 높고 더욱 뛰어나며, 인류의 복지에 더욱 필요한 감정이, 그보다 저급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몰아낸다. 바로 거기에 예술의 사명이 있다. 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라는 동요가 1948년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된 이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지난 7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우리에게 불쑥 나타난 분단을 없애고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줄기차게 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남북한 분단과 갈등 상황은 지속되고 강화되는 미중 갈등 속에서 대화보다는 새로운 무기개발 등 군비경쟁 모습을 보이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내년에 출범하는 새로운 정부에게도 부담이 되는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원인은 무엇일까? 우리의 통일 노력은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박정희 정부의 선 건설 후 통일,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등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북진통일은 6.25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주장이었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이후 정부들은 ‘전쟁 불원과 북한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면서 교류협력을 통해 남북이 평화 공존하고 상호 번영하여 궁극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18년 들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하
한뎃잠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노숙(露宿)이라고 해야 쉬 이해하려나. 덮을 신문지 한 장 없이 겨울밤을 견딜 때, 한 방향의 바람이라도 막아줄 벽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지. 열아홉 살 때였을까. 혼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비둘기호 열차였다. 비둘기호 열차는 한반도의 평화만큼이나 느리고 굼떴다. 반나절이 걸려 영등포역에 도착했을 때, 혼자라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갓 상경한 촌놈에게 서울은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 같았다. 눈보라 치는 밤, 의지할 것이라곤 편지봉투에 적힌 친구의 자취방 주소뿐이었다. 그 시절에는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면 병역이 면제되었다. 5년을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는 자격증을 따기 무섭게 방위산업체에 취업했다. 철이 바뀔 무렵이면 편지를 보내오곤 했는데, 언제든 놀러 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말만 되새기며 서울행 열차를 탄 게 화근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자취방은 굳게 잠겨 있었다. 주말에도 야근을 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다. 공중전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작업 중에는 바꿔줄 수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졸지에 미아가 되어서 밤거리를
초등학교는 담임교사가 반 아이들과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중, 고등학교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조례, 종례 시간과 특정 과목 수업 시간에만 만나는 것과 다르게 초등은 전담 과목 시간을 제외한 하루 대부분을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지낸다. 단순히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온종일 소통을 해야 하기에 아이들과 담임교사의 합이 얼마나 잘 맞는지가 한 해 교육 농사의 관건이다. 담임교사가 반을 정하는 방식은 매년 2월 중순쯤 교사들의 학년 구성이 끝나면 반 아이들 명부를 앞에 놓고 랜덤으로 뽑는다. 특별한 이유로 먼저 명부를 확인하고 반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웬만하면 명부 봉투를 앞에 놓고 선택한다. 한 해의 명운이 반 아이들 명부 뽑기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하게 좋은 반, 나쁜 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와 잘 맞는 아이들이 뽑혔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서 명부 봉투를 열어보곤 한다. 작년까지는 딱히 뽑기 운이 좋거나 나빴던 적이 없다. 무난한 아이들이 무난하게 사고를 치는 와중에, 교실은 대체로 분란과 다툼의 도가니 속에서, 가끔은 행복이 넘실대는 분위기에서 간신히 간신히 굴러갔다. 우리 반이 사건 사고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
이웃에 대한 물질적 도움보다 그를 정신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진정한 자선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적 지지는 그의 인간 존엄성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잘 먹고 잘 입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면, 초라한 집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 가난을 견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하라. (성현) 너희가 자신에게 남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것까지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을 자비로운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사랑은 거기서 더 나가 너희의 마음속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현) 비방과 험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다. 올바른 재판관은 자신의 이웃을 심판하는 것과 똑같이 자기 자신도 심판하는 것이 마땅하다.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미망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너그러운 사랑으로, 그가 올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 길을 잃은 나그네가 우리를 찾아오면, 우리는 그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가? 환자에게 화를 내는 의사가 어디 있겠는가? (세네카) 바르게 살라, 화를 내지 말라. 요구하는 자에게는 주어라. 그는 너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한자를 쓰려면 확인을 해야지...” 지적하니 그는 의아한 표정이다. 저널리즘 글쓰기 강의에 제출한 리포트, ‘...여론(與論)을 무시하면 안 된다.’라고 쓴 것을 ‘輿論’으로 고쳐야 한다고 얘기해주니 그 학생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한참 보더니 “아, 글자가 좀 다르군요.” 한다. “그래도 발음은 같으니 그냥 쓰면 안 되나요?” 반문한다. 알아들으면 되지 않느냐는 항변인 셈이다. 여론 ‘여’의 한자는 수레 輿다. 차(車) 즉 바퀴 여럿인 수레를 여러 사람이 움직인다고 하여 ‘여럿’ ‘다수’의 뜻이 됐다고 푼다. 여럿이서 뭔가를 들어 올리는 그림글자 舁(여) 안에 車가 들어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여론이다. 조선시대 김정호의 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輿이기도 하다. 수레(輿)처럼 만물을 실은 땅(地)이 여지(輿地)다. 이 말은 대지(大地)나 천지(天地)의 은유적 표현이다. 모양 비슷해도 ‘그냥 쓰면’ 안 되는 이유다. 그 리포트의 與자는 ‘주다, 패거리, 따르다, 편들다’ 등의 뜻이다. 이 與論은 사전에 없다. 굳이 해석하자면 ‘(누구를) 편들거나 따르는 의견’이다. 여건(與件)이 ‘주어진 조건’ 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까? 조작 여론인 것이다.
앞서 인용한 매클루언의 말을 다시 상기해보자. “기계시대 동안 우리는 우리 몸을 공간적으로 확장해왔다. 전기 테크놀로지가 등장한 지 1세기 이상 지난 오늘날, 우리는 우리 행성에 관한 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폐지하면서 우리의 중추신경체계 자체를 지구를 품을 정도로 확장해왔다.” 매클루언에게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다. 대표 저서인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인간의 확장’이다. 미디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는 얘기다. 신체의 확장, 그중에서도 중추신경의 확장이다. 의사소통의 매개체라는 정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매클루언에게는 옷과 집도 인간의 확장으로서 미디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바깥 온도가 낮으면 몸 안의 열이 밖으로 이동해 추워진다. 특히 35도 이하가 되면 위험해진다. 이때 옷은 체온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피부의 역할을 한다. 인류의 조상은 아프리카의 더운 지역에서 지낼 때 털을 포기하게 된 후, 유럽의 추운 지역으로 이동해서는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후 사계절의 변화가 있는 지역에 상주하면서 사는 동안 진화에 의해 지금과 같은 피부를 갖게 되었다. 더울 때는 가볍고 통풍이 잘되는
고향은 지척에 있어도 오갈 수 없으니 지구의 반대편보다 더 멀리 있는 듯하다. 때로는 미움에 온 몸을 불사르다가도 때로는 술 한 잔에 목메는 날도 있다. 아니 생각하려 해도 기억을 소환하지 않고서는 나도 모르는 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 취중에라도 목 놓아 불러보고 싶은 것이 고향이다. 술이라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떠올린다. 세상살이 어려워 숫 덩이 같은 마음이라도 술 한 잔으로 해독할 수 있다며 이유를 붙여가시면서 드신다. 어떤 술을 마실가. 대부분 누룩을 발효시켜서 만든 증류이다. 알코올을 얻으려면 먼저 누룩이라는 곰팡이 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화학공장에서 나온다. 시장에 나온 것을 사다가 재료(가루)와 섞어 놓으면 곰팡이 균이 자라고 두 번째로 독에 넣고 보름 정도 지나면 술 익는 소리가 엄청 요란스럽다. 뚜껑을 열어 향긋한 냄새가 나면 잘 익은 것이고 시큼한 냄새가 나면 술도 시어져 버린다. 가마에 넣고 열을 가해 오르는 증기를 냉각시키면 관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술이다. 여기에 세신 뿌리나 오미자를 넣으면 정품보다도 더 맛있는 향기로운 술이 된다. 이 것을 서민들이 먹는 농태기(소주)라고 한다. 식량이 귀한 때일수록 술에 대한 수요가 더욱 높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폈다가 다시 접는다. 가루 같은 물결이 바위에서 솟아난다! 날아가거라 정말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희열하는 물로 부숴라. 삼각돛들이 모이를 쫓고 있는 이 지붕을. 계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거대한 바람, 치솟는 파도, 부서진 포말. 시원하고 거침없는 한나절의 해안가 파노라마다. 해변의 묘지(Le Cimetière marin). 20세기 최대의 상징주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대표작이다. 이 시를 발레리는 그의 고향 세트(Sète) 언덕에 있는 한 공동묘지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 스산한 공동묘지. 그 묵중함을 경쾌한 미로 승화시키는 이 마법. 거장 발레리가 아니면 누가 감히 이 기교를 부릴 수 있겠는가. 이 마법은 발레리의 고향 세트로부터 나왔다. 발레리의 정신적 동반자였던 세트. 그의 시의 원천이자 사고(思考)의 모태였다. “항구 근처의 비탈길과 골목길, 박물관, 고등학교, 방파제 근처의 원형교차로, 공동묘지, 등대.” 세트의 경치를 노래하기 위해 발레리가 자주 동원한 단어들이다. 자기 고향을 너무도 사랑했고 예찬했던 천재 시인. 그는 어느 날 예술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