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원 근처엔 공사현장이 많다. 아파트 재건축과 함께 낡고 오래된 집들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가끔 지나다니던 거리에서 한번 요란하게 집을 부수는걸 한번 보고 그다음에 지날 때면 건물이 아이들이 블록으로 만드는 건물마냥 착착 올라가 있곤 한다. 그 변화를 보는 재미에 산책을 할 때면 공사하는 현장들을 살핀다. 어느 아침 산책길에 본 한 공사 현장도 한창 집을 부수고 있을 때 한 번 보았는데 다시 보니 깨끗한 땅에 어느새 시멘트 바닥이 생겼다. 맨 흙이 드러나 있는 땅에 시멘트 바닥만 깔려있는 그 공터를 둘러싸고 접근금지를 위한 울타리가 있었는데 그 옆에 있는 ‘양생중’ 이라는 푯말이 눈에 띄었다. 공사판에 양생이란 말을 썼네, 무슨 뜻일까, 궁금해져서 한의원에 와서 검색을 해보았다. 어느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뜻이 ‘콘크리트 치기가 끝난 다음 온도, 하중, 충격, 오손, 파손 등의 유해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보호 관리하는 것을 일컫는다’고 한다. 큰 맥락은 사람에게 쓰이는 단어와 유사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양생은 “1. 병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건강 관리를 잘하여 오래 살기를 꾀함 2. 섭생 섭양…
"국가 지도자들이 수십 년간 쓸데없는 소리만 해왔다. 이렇게... blah blah blah. blah blah blah. 오늘의 진실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느 정치평론가가 대한민국 현대사와 기후이슈를 묶어서 함께 비판한 것 같다. 아니다. 10월 31일 영국의 글래스고에서 열리는 유엔기후협약 당사국 회의를 앞두고 18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2003년생)의 가디언지 기고문의 일부다. 모두들 알다시피, 인류사회는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서 산업화 이전 대비, 1.5°C 수준으로 지구온난화의 상한선을 정했다. 이게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다. 끝이다. 과학자들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폭우 폭염 산불 태풍 등의 연쇄적인 이상현상들은 종말론적 재앙을 경고하는 거라고 말한다. 노벨재단이 이 위대한 소녀에게 평화상을 주면 좋겠다. 금년까지 3회째 빗나갔다. 기후위기의 절박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증거로 보인다. 금년 평화상 수상자는 필리핀계 미국인 마리아 레사와 러시아의 드미트리 무라토프. 각각 두테르테와 푸틴에게 저항한 언론인이다. 나는 언론자유보다 기후위기가 백 배 더 긴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가. 결코 깡패로
1년가량 남은 퇴직을 앞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화두가 몇 년간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근근이 부어놓은 연금은 퇴직 후 아내와 생계비를 충당하기에도 벅차다. 늦게 본 아들딸은 아직 자립하지 못했다. 평생 시간만 나면 돈 안되는 일에 몰두하며 보낸터라 여유있는 노후는 언감생심, 마음 같아선 벌이를 계속하고 싶지만 늘그막에 정글로 뛰어든 선배들을 보니 버텨내기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귀촌이었다. 애초 귀촌을 생각한 이유는 솔직히 말년에 도시빈민의 삶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머무르면 이런저런 복잡한 시절 인연들에 돈 나갈 일만 첩첩인데 알량한 수입으로 팍팍한 살림 허리펴기는 진작에 가망없는 일, 최소한 텃밭이라도 일궈 생계비라도 줄이면 버는거나 다름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얼마 전 함양에 텃밭을 마련해 올해부터 매주 하루 이틀씩 머무르며 칡덩굴이 뒤덮고 있는 묵정밭을 개간하고, 농막을 짓고 농사일을 배우느라 하루해가 어떻게 뜨고 넘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태생이 도시에서 나고자란 탓에 농사일은 일자무식이다. 그래도 한 번씩 마주치는 동네분들이 살갑게 가르침을 주셔서 이제 잡초와 작물 구분은 웬만큼 할 수 있게 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그는 전두환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고 5·18 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군 수뇌부 중의 한 명이었다. 국민을 무력으로 진압한 대가는 차고 넘쳤다. 41대 내무부 장관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었고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는 13대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삶은 전두환과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둘은 육사 11기 동기였고 같은 방을 썼던 룸메이트였으며 쿠데타를 모의하고 실행했다.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을 마치면서 친구 노태우에게 대권을 물려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전두환은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퇴임 이후를 보장받기를 원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5공 청산’의 국민적 요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로 향했고, 노태우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려 했다. 전두환의 백담사 생활은 가끔 TV를 통해 국민들에게 중계되었다. 나도 승복을 입은 전두환과 이순자의 모습을 TV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전두환은 ‘세상만사를 통달하고’ 산에 의탁한 도인(道人)처럼 굴었는데 젊었던 내가 보기에도 거만하기가 짝이 없었다. ‘보통사람’을 자처하던 노태우와,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로 책임을…
폭풍이 물결을 일으켜 물의 투명함을 잃게 하듯이, 정욕과 불안, 동요, 공포는 마음을 어지럽혀 사람이 자신의 본질을 의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롭고 언제나 만족한다, 빈약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불만이요 언제나 무관심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외면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만 괴로워하거나 불안과 동요를 느낀다. 그럴 때, 그들은 불안한 듯 자문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하고, 자신들의 권한 밖에 있는 것을 늘 염려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직접 책임이 있는 일과 씨름하며, 자신의 생명은 자기완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처럼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만일 그가 자신이 진리를 지켜낼 수 있을지, 허위를 벗어날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걱정하지 말라. 네 걱정의 씨앗은 바로 네 손안에 있다.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매일 성찰하며 자신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는 그것을 교
열망보다 허망이 압도적으로 앞서는 지금과 같은 대선 상황이 있었을까? 이즈음 여론조사 결과가 심상치 않다. 대선 주요 후보들에 대한 비호감도가 각각 60% 선으로 호감도보다 대략 2배 이상 높은 것이다. 실제 한국갤럽이 지난 19~21일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야 대권주자 개별 호감도를 물은 결과 '이재명 32%, 홍준표 31%, 윤석열 28%' 순을 기록한 반면 비호감도는 '윤석열 62%, 이재명 60%, 홍준표 59%' 순으로 나타났다. 대선 국면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새 시대정신으로 지난 시절의 한계를 극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바람은 자연스럽게 대선 후보에게 투영된다. 그런데 호감도보다 비호감도가 2배가량 높다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을 접었음을 뜻한다. 요컨대 유권자들은 가장 큰 열망으로 정권 교체를 들고 있는데 여기에 부합하는 대선 후보가 없다고 본다. 이 때문에 후보들이 새 비전을 제시해도 먹히지 않는다. 이 심각한 위기는 후보들의 구태에서 온 게 아닐까? 후보들은 상대방의 부패와 비도덕성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유권자들이 자신들을 버린 지도 모르고 이전투구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오래된 편견
딴 따다다 다 따다다 다~ 딴딴 따다다 다~~ 드럼이 조심스럽게 장단을 쳐 들어간다. 플루트가 마법의 소리를 내며 합류한다. 환상적 듀엣의 하모니는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첼로와 바순, 클라리넷은 혹여나 지루할까 끼어든다. 드럼은 첫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럼 없이 반복하고 플루트는 톤을 높여 재등장한다. 하프, 기타, 바이올린, 트럼펫, 피콜로, 트롬본, 심벌즈... 이 세상의 온갖 악기가 하나씩 합세하며 오케스트라는 절정에 도달한다. 지극히 단순한 템포와 리듬.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리드미컬하고 몽환적이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기발하다. 볼레로(Boléro). 독창적인 이 곡은 기존 음악의 틀을 완전히 깼다. 라벨은 이 곡을 당대 최고의 러시아 무용수 이다 루빈시테인(Ida Rubinstein)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이 곡은 라벨이 스페인 안달루시아 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라벨과 스페인.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 라벨은 1875년 피레네-아틀란티크 주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759킬로 떨어진 서남단의 작은 마을 시부르. 이곳은 프랑스의 끝 지점이고 스페인의 시작 지점이다. 우뚝 선 피레네산맥과 푸른 대서양
만약 우리 모두의 생명의 근본이 같지 않다면, 우리가 늘 경험하는 동정이라는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군가의 분노를 진정시키려면, 예를 들어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화를 내고 있는 사람에게, “하지만 저 사람도 불행한 사람 아닌가!” 하고 말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빗물이 불을 끄듯, 곧 동정은 분노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사람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며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면, 자신이 이미 그 고통을 상대방에게 주었고, 실제로 상대방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민하거나 어려움과 결핍을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나 때문이라고 중얼거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나머지 일은 어떻게 되든 그것만으로도 분노가 사라질 것이다. (쇼펜하우어) 남을 욕하며 그와 다투고 있을 때, 너는 인간은 모두 형제라는 것을 잊고 있으며,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대신 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너는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다. 왜냐하면 네가 맨 처음 신이 창조한 선량하고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라, 몰래 다가가서 먹이를 덮쳐 물어 죽이는 야수로 변한다면, 너는 너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너는 지갑을 잃으
숲 속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본다. 부드러운 청자 빛 하늘 아래는 흰 구름이 자유롭다. 구름은 호랑이 머리가 되었다가 개의 형태이더니 바로 고양이 꼴이다. 흐르면서 변하는 게 구름이다. 변하기 때문에 눈 주고 할 일없는 사람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근자에 나는 하늘 바라보는 재미가 유별하다. 눈이 피로해도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고, 글을 쓰다 문장이 막히면 나가서 하늘을 본다. 글의 주제가 마땅치 않아도 오늘 같이 하늘을 보고 구름을 만나면서 뭔가가 머릿속에서 새롭게 뛰어내려 주기를 기대한다. 10월도 저물어 삼십 일이 되면 시월의 마지막 밤이 온다. 이 해도 60여 일 남았다. 계절은 겨울이란 고개를 넘어야 한다. 오늘도 숲의 그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의 빛(彩)을 독창적으로 표현하고자 먼 하늘을 끝없이 바라보아도 색채감에 딱 맞는 언어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이 들려오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 ‘이룰 수
지난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關東)대지진의 혼란 속에 조선인 수천 명이 일본 자경단 등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사건이 있었어요.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일어난 비극이었지요. 소문 조작을 동원한 인류의 비극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어요.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돌 무렵, 유대인 박해를 위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가짜뉴스는 여러 차례 동원되었다네요. ‘우물에 독(毒) 타기’는 전쟁사에서 오래된 고육책(苦肉策)이에요. 루마니아 지역에 있었던 ‘발라키아’ 공국의 왕 블라드 3세는 15세기 오스만 튀르크족에게 쫓기자 후퇴하면서 모든 우물에 독을 풀어 적의 진격을 늦추었대요. 20세기 들어서도 핀란드나 독일군이 적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했어요. 수년 전에는 IS가 그 짓을 해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높았지요. 요즘 본격화하고 있는 대선전이 사상 유례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가고 있군요. 정치의 품격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고, 오직 경쟁자를 죽이기 위한 살의(殺意)만이 휘 번뜩이는 위험한 게임이 벌어지는 중이네요. 가장 위태로운 행악은 ‘우물에 독 타기’ 추태예요. 문제를 내는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