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쿼녹스 /이상국 씻은 듯이, 이 얼마나 간절한 말인가 누이가 개울물에 무 밑동을 씻듯 봄날 천방둑에 옥양목을 빨아 널 듯 혹은 밤새 열에 들뜬 아이가 날이 밝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르튼 입술로 어머니를 부르듯 아, 씻은 듯이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인가 - 발견 / 2017년·여름호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에 나는 종종 이 나라 시인됨을 행복해하곤 한다. 천하의 연금술사도 어찌 번역할 도리가 없을 듯한 표현과 단어의 묘미는 한국인만이 쓸 수 있고 읽어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고유영역임에 분명하다. 화자는 ‘씻은 듯이’라는 부사어를 가지고 그 말이 지닌 감각적 느낌을 자신의 경험에 견주어 시화(詩化)한다. 갓 뽑은 뒤 개울물에 씻은 말쑥한 무 밑동을 보았는가. 천방둑에 빨아 널은 새하얀 옥양목을 보았는가.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던 아이가 열을 떨쳐버렸을 때의 후련함을 맛보았는가. 이들 정한들은 불과 몇 십 년 전 비슷한 일을 겪어온 세대들에게 한없는 추억과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씻은 듯이 맑던 비 갠 하늘과 씻은 듯이 청아하던 새소리와 통증으로 부여잡았던 환부도 결국 씻은 듯이 아물던 멍 자국들이 새삼 그리워지는 그곳, 시공을 넘…
며칠 전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코미디 영화 ‘I feel pretty’가 개봉되었다. 순간순간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이지만 영화의 내용 또한 너무 좋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게 감상했다. 주인공 르네 베넷(에이미 슈머 역)은 지하 창고에서 온라인 업무나 관리하는 뚱뚱하고 못 생긴 여성이다. 헬스클럽에서의 얼굴과 몸매도 예쁜 다른 여자들을 보며 주눅이 들기도 하였지만 살을 빼려고 마치 뭔가에 홀린 듯 열심히 스피닝 페달을 밟는다. 그러다 체중을 감당 못한 사이클 머신이 망가지면서 그녀는 발이 미끄러져 넘어져 머리를 크게 부딪친 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다.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캐릭터로 변신한 그녀는 자신은 뚱뚱하지만 아름답다고 착각하며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의 프런트 데스크 직원 자리에 서류를 접수하여 면접에서 합격을 한다. 이후 회사를 방문하는 VIP들에게 자신은 몸매와 얼굴만 믿고 일을 대충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라고 특유의 친화력과 당당함으로 자신을 홍보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미친 거 아냐? 소리를 듣던 그녀는 일관성 있는 뻔뻔한 자신감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회사 프로젝트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냄으로써 회사 내 브레인으로 자리잡게…
자공(子貢)이 스승인 공자(孔子)에게 정치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자는 세 가지로 대답했다. 정치는 ‘백성들이 먹고살게 해주어야 하고(足食), 군사력을 키워 방어를 통해 생존이 가능해야 하고(足兵), 백성들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民信)’고 대답했다. ‘한서(漢書)’에도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것’임을 뜻한다. 임금된 자는 백성을 하늘 섬기듯 해야 하지만, 백성들의 하늘은 임금이 아니라 곧 식량임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옛 성현들도 경제문제만큼은 가장 절실한 것으로 봤다. 맹자(孟子)는 또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생업을 보장하는, 즉 항산(恒産)이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 일정한 마음, 항심(恒心)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며, 그렇지 못하면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할 수밖에 없으니 사후 처벌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우리 속담도 같은 맥락이다
투계 /고성만 맨드라미가 머리를 쭉 뻗었다가 푸드득 도약하여 칸나의 대가리를 찍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 우수수 날리는 깃털 피가 튄다 야산에 깊게 팬 자동차 바퀴 신발 흙 질컥거리며 환호성 지르는 사람들 마스카라 지워진 노을이 저녁 꽃을 줍는다 - ‘투계’전문 맨드라미와 칸나의 식물 이미지에서 닭이 싸우는 과정 즉 동물이미지로의 묘사전환이 빛나는 시이다. 특히 붉은 색이 주는 주위 환기력과 역동성이 선명하다. 맨드라미는 키가 작지만 “칸나의 대가리를 찍”고 있어서 강렬한 대항정신이 느껴진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튀”는 장면은 여과 없는 싸움의 현장이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깊게 팬 자동차 바퀴”를 통해 문명사회의 거친 이미지를 걸쳐 놓는다. 이 상황에서 볼 때 세상은 아이러니하다. 평화로워 보이는 칸나와 맨드라미 꽃들에서 억압된 사회의 이면을 보고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포착해 낼 줄 아는 그가 바로 고성만 시인이다. /박수빈 시인…
먼저 어떻든 우리 사회와 국가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무언가를 행동하여야겠다는 마음을 품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면서 나는 일관되게 주장한다. 지금이 위기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의 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기회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짚어보면 큰 위로가 되고 용기가 솟는다. 본래 위기(危機)란 말은 두 단어가 합하여진 합성어(合成語)이다. 위기란 단어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합하여진 단어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기는 닥치기 마련이고 그 위기에는 기회가 들어있다. 문제는 위기 속에 깃들어 있는 기회를 찾아내어 어떻게 바닥에서부터 새 출발하느냐가 문제일 따름이다.불가(佛家)에서 쓰는 말 중에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하라’는 말이 있다. 아마 도(道)를 깨치려면 백자나 되는 외나무 막대기 위에서 앞을 향하여 한 발 내디뎌라, 그런 결단이 있어야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담긴 말일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와 나라가 당면한 위기상황에서 나는 이런 말을 되풀이하고 싶다.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조금만 편해지면 안일에…
어릴 적에 도서관에 갔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에 막 들어가서 동네 형을 따라갔다. 남산 시립도서관이다. 그곳에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빠졌고, 심훈의 ‘상록수’를 만났다. 그동안 위인전만 읽었는데, 새로운 삶을 만나는 경험이었다. 일요일이면 버스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용료는 10원이었지만, 막상 들어가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들어갔다. 공부하러 갔지만 오히려 책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늦게 도착하는 날은 오전 내내 줄을 서는 것으로 다 보냈다. 그래도 남산에 사는 나무들을 보면서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움이 됐다. 그때는 주변에 도서관이 없었다. 정독도서관도 없던 때였다. 지금은 학교는 물론 10분만 걸으면 동네 도서관이 있다. 화려한 시설과 새 책 냄새가 넘쳐난다. 내가 사는 수원만 해도 무려 19개나 된다. 2010년 8개였는데 두 배 이상 늘었다. 주변에 이렇게 도서관이 많은데, 정작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4명이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통계(2017년 국민 독서 실태조사)다. 일반 도서를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인 독서율은 성인 59.9%라고 한다. 이는 1994년 조사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저출산 여파로 학령아동들이 감소하면서 대학들도 비상이다. 수도권 대학은 그런대로 정원을 채우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지방 사립대는 심각하다. 대학정보공시에 따르면 예를들어 입학 정원 10명 중 7명도 채우지 못한 ‘신입생 충원율 70% 미만’ 대학이 2016년 12곳에서 지난해 15곳으로 늘었다. 이 가운데 광주가톨릭대·대전신학대·서남대·수원가톨릭대·신경대·영산선학대·중앙승가대·한려대·한중대 등 9곳은 2년 연속 충원율 70% 미만이다. 대부분 지방에 있는 사립대학이다. 교수들과 교직원들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그래서 매년 가을 입시철이 다가오면 수원시내 고교에는 지방대학 교수들이 학생들 모집에 나서는 광경이 자주 목격된다. 등록금 의존도가 높은 사립대는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하면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고, 또 학교가 문을 닫게 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한다. 지난 3월 열린 ‘대학 총장 긴급 좌담회’에서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현재 200개에 달하는 국내 4년제 대학 가운데 약 50개는 이미 망했다고 봐야…
요즘 수원시 행궁동에 젊은이들이 몰리고 있다. 행궁동은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이 감싸고 있는 마을로 그 중심에는 화성행궁이 자리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가 깃든 수원의 역사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지만 주민들의 삶은 결코 1번지에 걸 맞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수원의 대표적 구도심 지역이자 문화재 보존구역으로써 재산권 행사가 제한되고, 낙후지역으로 슬럼가가 되기 직전이었다. 지난 30년간 인구는 최대 대비 59.8%가 감소했을 정도로 도시 쇠퇴가 심각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지역이 거듭났다. 지난 2013년 세계 최초로 열린 ‘생태교통 수원 2013’이 계기가 됐다. 골목길과 옛길이 정비되고 전선은 지중화 됐으며 거리도 말끔하게 개선했다. 여기에 더해 지난해에 시작된 ‘수원야행(夜行)’ 축제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SNS를 통해 소문이 났다. 수원의 야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장소로 행궁동을 주목한 것이다. 이후 행궁동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급작스럽게 증가했다. 수원시가 생태교통 행사로 멍석을 깔았고 젊은이들이 SNS로 이 마을을 찾아내 홍보한 것이다. 이제 이 지역은 ‘행리단길’로 불린
올해 새롭게 맞게 될 6월 25일을 며칠 앞두고서 새삼 과거의 기억들 속에 한참을 맴돈다. 성장기인 70년대 초등교육과정에서부터 80년대 대학학부 과정에 이르기까지 투철한 반공교육 속에서 커왔고, 전쟁위협의 긴장과 불안감이 잠재의식 속에서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유년기에는 6·25기념일을 앞두고 해마다 반공포스터, 글짓기와 웅변대회 그리고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을 부르짖는 반공궐기대회에 익숙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군복과 같은 유니폼을 전교생이 입고서 다음날 지역 군사령관의 시찰과 평가를 대비해 학생회장인 연대장의 “받들어 총”을 시작으로 분열과 사열 연습이 제대로 맞추어질 때까지 퇴근시간을 잊은 당시 교련선생님의 열의에 찬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대학 학부시절에는 부를 수 없는 노래들과 읽어서 안 되는 책들이 참으로 많았다. 때문에 금지된 것에 대한 동경과 그것의 짜릿한 자극은 당시의 활활 불타오르는 젊은 혈기들이 빨아들였던 기름이 되었고, 최루탄 연기 속에서 어떤 학기에는 휴강이 더 많았던 기억만큼 사회에 반항과 저항이 격렬했던 시기가 있었다. 어느 날 불심검문에서는 책가방에서 나온…
87년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됐던 정당은 113개, 평균 존속기간은 44개월에 불과하다. 이 중 선거 때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은 40개밖에 안 된다.지금까지 살아남은 정당도 창당 당시의 당명을 갖고 있는 경우는 없다. 박근혜 정권을 창출했다며 정통 보수여당이라 자처하는 자유한국당만 하더라도 그렇다. 뿌리를 살펴보면 지난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 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이뤄진 민주자유당이 모태다. 자유한국당은 2004년 한나라당 시절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당 지도부 전원이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반성하고 자숙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그 후 8년만인 2012년에는 2011년 10·26 재보선에서 패하자 대선을 준비하기 위해 박근혜 비대위를 출범, 약 15년간 써왔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명칭뿐 아니라 당 상징색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면서 체질을 완전히 개혁하려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서였을까? 한동안 보수층을 대변하며 두 명의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러다 2017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입지가 좁아지면서 새누리당은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변경, 반성과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출발도 해보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