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경기 내륙의 곡창에서 생산되는 여주쌀을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수여선(水驪線)을 개통한 것이 1931년 12월 1일, 서해안의 소금과 수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수인선(水仁線)을 개통시킨 것은 1937년 8월 6일이었다. 두 철도는 다나카죠지로(田中常次郞)가 사장이던 경동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개설된 사철(私鐵)로 협궤 철도였다. 광궤 열차에 비해 차체가 작아 앙증맞고 달가닥 달가닥 달리는 모습이 장난감 같아 ‘꼬마 기차’라고 불렀다.
수여선과 수인선은 오전 오후 두 차례씩 하루 4번 운행했다. 수여선은 여객보다 쌀을 많이 실어날랐고, 수인선은 비릿한 소금과 수산물을 주로 실어날랐다. 차 안은 비좁았지만 나름대로 흥취가 있었고 인간의 냄새도 진했다. 수여선이 개통된지 8개월이 되던 1932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경동철도는 교통기관의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지 2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시간 연착이 부절하다.
최초에 어느 정도까지 시간의 연장이라든지 기타 불비한 점이 있는 것은 용혹무괴(容或無怪)하나 장구한 시일을 허비한 작금에는 유루(遺漏)의 탄(嘆)이 없을만치 제반 설비도 정비되었을 것이며 규칙 엄수에도 완전무결하게 진행될 줄 믿는 바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상을 본다면 연발착은 물론 휴지(休止)하는 사례까지 있으니 그 책임을 언제까지 감행할 것이냐.’ 연발착과 운휴 사태를 몹시 나무라는 내용이다. 수인선도 마찬가지였다.
야목에서 석탄과 물 공급을 받느라 발차가 늦어지기 일수이고, 어떤 때는 언덕길을 오르다 차 바퀴의 핀이 빠져 기관사와 승객이 핀을 찾는 소동도 있었다. 철도청이 적자를 이유로 수여선 먼저, 수인선을 나중에 없앴지만 썩 잘한 일 같지 않다. 참고 삼아 당시의 역명을 기록하면 이렇다. ‘수여선’. 수원, 본수원, 원천, 덕곡, 신갈, 어정, 삼가, 용인, 마평, 양지, 순일, 오천, 포교, 서산, 이천, 무촌, 죽항, 매류, 신대, 여주, ‘수인선’. 수원, 고색, 오목, 어천, 야목, 빈정, 일리, 성두, 원곡, 신길, 군자, 소래, 유지전, 논현, 남동, 연수, 문학, 송도, 인천항. 아련한 추억 그 자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