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습한 느낌의 ‘비밀계좌’는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손님이다. 특히 스위스은행의 비밀계좌는 검은 돈을 관리하려는 이들에게 필수적이다. 엄격한 비밀주의로 예금주 신분을 숨길 수 있음이 가장 큰 매력이다.
스위스은행의 비밀계좌는 최소 10만 스위스 프랑(1억여원) 이상의 고액 예금주들을 위한 번호계좌로 예금주 보호를 위해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최근 미국에 거주하는 언론인이 한국의 전직 대통령 비밀계좌라며 공개한 계좌번호도 ‘626, 965, 60D’였다.
특이한 것은 비밀계좌는 유동성예금이어서 이자가 붙지 않으며, 1980년 이전까지는 예금자가 오히려 보관료를 물었으나 익명성 보장에 따라 독재자의 정치자금, 범죄관련 불법자금 등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 불법자금이 독재자를 보호하고, 마약자금으로 쓰이는가 하면, 테러에까지 관련됐다는 비난여론이 일자 스위스은행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93년 미국의 마약업자가 예치한 2천200만 달러를 미국정부 요청에 따라 양국이 50:50으로 나눠 가졌다. 또 1998년에는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예치한 5억7천만 달러를 필리핀 정부에 반환했다.
스위스은행의 변화에 검은 돈의 은신처도 바뀌기 시작했다. 의심 많은 돈들이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라는 생소한 땅으로 몰렸다. 카리브해 조그만 섬 80여개의 집합인 ‘버진 아일랜드’는 인구가 10만에 불과하지만, 놀랍게도 수만 개의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물론 외형은 없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들이다. 영국 자치령으로 금융관련 규제가 거의 없고, 세금 또한 극히 적어 전 세계 검은 돈들이 몰리는 것이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취재한 보도에 따르면 ‘버진 아일랜드’의 5층 건물에 무려 1만8천개의 기업이 주소를 두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버진 아일랜드’가 화제다. ICIJ에 의해 세계 각국 주요 인물들이 ‘버진 아일랜드’로 도피시킨 검은 돈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명계좌가 공개된 러시아 부총리 부인은 자금을 러시아로 환원했고, 몽골 국회부의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관심은 ICIJ가 밝힌 한국인 70인의 명단이다. 국세청은 엄벌의지를 다지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