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변 은행나무가 헐렁하다. 가지치기하여 뭉툭해진 은행나무, 제 안으로만 물길을 내는지 좀처럼 새순을 꺼내지 않고 있다. 남겨진 가지 끝에 쪼글해진 은행 몇 알 매달고 있을 뿐 바람이 말을 걸고, 태양이 입질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면 명치끝이 싸해온다. 은행나무를 살림밑천으로 삼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던 일이 엊그제처럼 눈에 선하다. 첫 아이 다섯 살 때 일이니 20년도 더 지난 얘기다. 가을 태풍으로 들녘이 물바다가 되고 물이 집안까지 들어찼다. 허리를 넘긴 물 때문에 마당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움직일 정도였다.
태풍이 얼마나 거셌는지 가로수의 은행이 거의 다 쏟아졌다. 물이 빠지자 우리는 널브러진 은행을 줍기 시작했다. 한 가마니는 족히 되게 은행을 주워 씻어 말렸다. 남편은 그 은행을 심자고 했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직장을 다니면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기에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남편은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빌 것 아니냐며 본가의 밭에다 은행을 심어서 묘목으로 팔자고 했다. 가로수로 은행나무를 쓰기 때문에 잘 키우기만 하면 큰돈이 될 거라며 이번이 기회가 될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강력히 요구하여 남편 뜻에 따르기로 하고 일요일 아이를 앞세워 시댁으로 갔다.
잡풀 무성한 산 밑에 있는 밭에 심으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잘 다듬어진 텃밭에 은행을 심었다. 아침부터 시작해서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은행을 다 심었다. 은행을 심으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채마밭에 심는 것도 불편하고 언짢아하시는 부모님을 뵙기도 민망했지만 남편의 의지는 단호했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지금은 힘들어도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께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효도하면 부모님도 오히려 기뻐하실 거라며 눈물바람인 나를 위로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묘목이 잘 자랐다. 미처 풀을 뽑아주지 못하자 아버님이 고랑에 제초제를 뿌리셨고 잘 자란 묘목은 대부분 죽고 시원찮던 나무만 살아남았다. 2년을 키운 뒤 묘목을 옮겨 심었는데 동네 어른이 논두렁을 태우다 불이 번져 은행나무를 모두 태웠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정말 못 생겨 나무구실 할까 싶어 남겨놓은 것뿐이다. 그것이라도 잘 키워 보겠다고 거름을 내고 손질을 해가며 10년을 키웠다. 제법 나무답게 자랐다. 판로가 문제였다. 묘목 상으로 이리저리 알아보았지만 헐값을 제시했고 전문가가 아닌 우리로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궁리 끝에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 그루의 나무도 팔지 못하고 애물단지가 되었다.
전전긍긍하며 세월만 지났고 지난해 빌린 땅이 경매처분 되면서 우리의 꿈도 거기까지였다. 단칸방 사글세라도 벗어나 보자고 심은 나무였다. 그 나무가 몇 년 후면 아파트 하나는 안겨 줄 거라는 야무진 꿈으로 키운 나무, 많은 속앓이와 세상 살아가는 법을 일깨워준 나무이기도 하다.
매장 앞 은행나무를 보고 있으면 그때의 상황들이 스쳐가곤 한다. 아름다운 희망이 되진 못했지만 젊어 한 시절 무던히 꿈꾸던 한쪽에 은행나무가 있었고 화석의 시간이 되어 가끔은 되짚어 볼 지난날이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