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드라마 대사가 생각납니다.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온 나라가 뜻하지 않은 ‘세월호 참사’로 난리입니다. 지난해 연말 여행을 다녀온 그 선사(船社) 화물여객선이라 더 놀랍습니다. 갑판 위 여린 햇살이 바람에 너울지던 아침나절, 그 기억들이 소름으로 돋아납니다. 앞산에 진달래도, 등굣길 꽃잔디도 어김없이 피었습니다. 하지만 세월호의 그들은 우리 곁에 없습니다.
아직 피지 못한 어린 꽃들의 수학여행이 이별여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따뜻한 가족 곁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뒤안길, 추억 따라 떠난 장년의 초등학교 동창들도 있었습니다. 소풍날 행여 비가 올까 머리맡에 삶은 계란에 사이다, 과자봉지를 두고 잠을 설쳤던 그때 그 이야기를 채 나누기도 전에,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가족을 위해 육지와 바다를 오가던 화물기사의 꿈도 거짓말처럼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단했던 삶마저 차가운 납덩이가 되어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모두들 떠나고 우리 곁에는 분한 눈물만 남았습니다.
저도 세월호 참사가 있기 며칠 전 친구를 잃었습니다. 항상 먼저 전화해 안부를 묻던 놈이 두 아이와 아내를 두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아직 오십 초반 나이에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항암치료 몇 번 만에 희망의 끈을 놓고 말았습니다. 우연히도 고인이 된 친구도 선사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초등학교 친구입니다. 병문안 못가 본 핑계로 “아픈 얼굴 보지 않고 보내 다행이다”라고 자신을 속여 봅니다. 왜냐면 항상 웃는 얼굴로만 기억할 테니까요. 그래서 잠시나마 세월호에 잠긴 꽃들이 떠오르지 않았으면 하는 아둔패기 같은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사람노릇 못한 죄책감이 가슴을 억누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 ‘귀천’(歸天)의 마지막 소절입니다. 하지만 누가 가서, 이 세상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도처에 노란리본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그나마 참으로 다행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려울 때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힘은 질식할 것만 같은 우리사회에 에어포켓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나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을 마음으로 보내야 합니다.
기적을 바라기에는 이 땅의 살아있는 자들의 무책임이 너무 커 보입니다. 나침반 없는 우리사회의 불공정함이 침몰한 세월호만큼 무겁습니다. 쇠사슬보다 더 단단합니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고사하고 기본적 약속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회. 제작한 지 스무 해도 넘은 구명조끼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월호에 수장되어야할 것은 우리사회의 물비린내 나는 도덕성이 아닐까요. 진정 우리가 세월호와 함께 놓아야할 것들입니다.
산다는 게 무엇일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사 고통과 즐거움은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합니다(人生苦樂 從心而起). 그래서 힘을 냅니다. 부끄럽지만 산사람은 또 그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그들을 잊지 않는 방법이 아닐까요.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우리 연천군도 유가족과 희생자를 애도하는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습니다. 강둑을 타고 지천으로 핀 애기개똥풀보다 더 노란 리본들, 그 매듭 매듭이 줄을 잇고 있는 아침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