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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칼럼] 환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세상은 불온하다

1.

매회 챙겨보지는 않았다. 그래도 주위에서 하도 재미있다 해서 가끔 시청했다. 사필귀정, 거악응징 드라마의 쌍두마차 《빈센조》와 《모범택시》 말이다. 전자는 노골적 B급 정서를 지향하는 블랙코미디. 황당한 스토리 전개가 가관이다. 난데없이 (한국 혈통) 이태리 본토 마피아 변호사가 등장한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 양쪽에서 줄줄이 사람을 죽여도 수사기관은 하품만 하고 있다. 팩트 체크를 생각하면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수준이다.

 

후자는 요 몇 년 사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실제 사건에서 주로 모티브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모 웹하드 기업 회장의 엽기잔혹 스토리 같은. 상대적으로 좀 더 사실적인 설정인 셈이다.

두 드라마의 공통점은 인물 설정, 미장센, 대사에서 모두 노이즈가 강하다는 거다. 특히 《모범택시》는 등장인물 모두가 시작부터 끝까지 그저 빽빽 소리를 지르는 느낌이다. 늦은 밤에 보고 나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정도다. 잔인한 장면 기준으로는 《빈센조》가 한 수 위다. 특히 최종회에 등장하는 ‘참회의 창’인가 뭔가 하는 살인도구는 (끔찍을 넘어) 참신하다 싶을 정도로 임팩트가 강했다.

 

2.

사회학자 겸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어떤 대상을 상대로 복제된 물건이 원본보다 더 현실 같은 경우 그렇게 만들어진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을 대체해버린다고 말한다. 의도적으로 창조된 가공의 이미지를 사람들이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게다. 이것이 바로 시뮬라크르(Simulacres)다.

 

예를 들어 1955년부터 캘리포니아 에너하임에서 문을 연 《디즈니랜드》가 그렇다. 월트 디즈니가 창조한 이 초대형 놀이공원에서는 미키마우스와 백설공주가 입장객들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사람이 분장한 실물 크기의 캐릭터일 뿐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히 어린이들은) 그곳에서 만나는 미키마우스를 마치 살아있는 존재인 양 착각한다. 가상의 이미지가 현실 속에서 고스란히 관철되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심지어 미국이란 나라 전체를 ‘거대한 디즈니랜드’라고까지 부른다. 주류 기득권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문화적 환상(illusion)이 구조적 불평등을 대체하고 은폐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온갖 해프닝을 벌이다 재선에 실패한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내내 외쳤던 슬로건이 무엇인가. “위대한 미국”이다. 극단적 빈부격차, 인종차별, 총기문제, 의료보험 문제 등 온갖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는 미국이 과연 그렇게 위대한가?

 

3.

영화 역사상 시뮬라크르가 가장 선명하게 실현된 것은 1999년에 개봉된 《매트릭스》다. 이 영화를 제작, 감독한 워쇼스키(Wachowski) 형제가 보드리야르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받았지는 영화 그 자체가 증명한다. 스토리 전개의 초입부에 주인공 ‘네오’가 해킹된 하드디스크를 악당들에게 전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카메라가 물건을 숨겨놓은 책 표지를 비추는데, 그 책의 이름이 바로 (보들리야르가 쓴)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현실 속 인간은 그저 인공지능 기계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생체 배터리로 사육될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피사육(被飼育) 인간’의 두뇌 속에 심겨진 디지털 가상현실 즉 ‘매트릭스’를 실제 세상이라 여긴다. 기계가 창조한 환상의 세상에서 행복을 만끽하며 비루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처럼 현실을 대체하는 환상이 의도하든 않든 간에 세상의 질곡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거세시킨다고 갈파한다. 뒤통수에 전극이 꽂힌 채, 자그마한 강철 사육통 안에서 평생을 잠이 들어 살아가는 영화 속 인간들처럼.

 

4.

이 지점이야말로 2021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빈센조》와 《모범택시》 같은 히어로 드라마들이 폭발적 인기를 끄는 현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코로나19 사태가 몰고 온 미증유의 통제와 생존위기, 거기에다 언덕 아래로 바위가 구르듯 뒤숭숭한 정치상황까지. 뭔가 사람들 마음이 불안하고 꽉 막혀있기 때문이다.

 

언필칭 촛불정부가 들어서고 개혁의 나팔소리가 하늘높이 솟구쳐도 강자의 이익이 철저히 관철되는 경제법칙은 변함이 없다. 정글 같은 경쟁사회의 본질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혈로가 차단된 느낌이랄까 명치에 무지근한 덩어리가 얹힌 듯 하달까 그런 심정인 게다. 이럴 때 톡 쏘는 탄산음료 같은 가상현실이 대중들의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것이다.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도 인식한다. 저런 쾌도난마와 권선징악이 실제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어차피 저것은 만화 같은 설정이라는 것을.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환상에 끌리는 것이 대중심리다. 드라마가 상영되는 50분 간 만이라도 현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먹에는 더 큰 주먹으로 응징하고, 교활하고 악한 놈은 더 큰 교활과 폭력으로 뭉개버리는 모습에 코끝 쩌릿한 대리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분명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처럼 가상현실이 사람들의 억눌린 욕구를 해소시켜주는 사회는 불온한 사회라는 것이다. 건강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더운 여름날 탄산음료가 잠시 갈증을 없앨 수는 있어도 금방 다시 목이 말라오는 것처럼.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조금은 다른 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빈센조》나 《모범택시》 같은 환타지가 아니라 진짜 현실 속에서 초일급 악당들이 모조리 (설렁설렁 말고) 뼈 속까지 죗값 치르는 세상 말이다.

 

만인에게 공평한 법과 제도가 생생하게 작동하는 곳. 이를 통해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 그리고 그것을 배태한 구조적 거악이 무 베듯 잘려나가는 사회. 사람들은 하루빨리 그런 통쾌한 세상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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