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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칼럼] 푸릉, 인간의 물결이 와 닿는 곳

 

 

드라마를 잘 안 본다.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화제작도 대개 한 두 번 보다가 만다. 올 봄 들어 그런 히트 드라마 두 개가 비슷한 시기에 방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나는 여전히 끌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의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는 달랐다. '우리들의 블루스'.

 

스토리 전개의 구조, 주인공들 연기, 품고 있는 주제가 마치 장이 익어가는 것처럼 깊었다. 근래에 보기 드물게 드라마 전 편을 정주행한 것이 그 때문이다.

 

옴니버스 형식이다. 주제는 하나인데, 그 안에 독립된 여럿의 에피소드들이 겹쳐 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도입부 LP판에 적힌 두 개의 이름이 상징하듯) 각 스토리가 사람과 사람의 운명적 인연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된 에피소드를 세어보니 모두 일곱 개다. 색깔이 다른 그런 에피소드들이 하나로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든 것이다.

 

작가는 노희경. 그녀가 쓴 드라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들의 블루스' 하나만 놓고 보면 가히 장인에 가까운 솜씨다. 정교한 감정의 복선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이야기 전체에 심겨져있다. 주제가 선곡에서부터 흰색 크레파스로 그린 듯한 제목 모습까지 살짝 신파가 섞이기는 했다. 그런데도 쑥 들어와 마음을 흔드는 찰진 대사가 경지에 올랐다. 촬영, 편집, 음악도 수준급이다. 무심히 보다가 가슴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다들 주위에서 한번쯤 본 듯 평범한 인물들. 하지만 감추고 있는 사연들이 평범하지 않다. 노처녀 어물전사장의 첫 마음을 짓밟는 기러기 아빠, 똑 부러지게 공부는 잘 하지만 발칙한 고등학생 커플, 다운 증후군의 쌍둥이 화가 언니, 그리고 평생을 원수처럼 척지며 살아온 모자.

 

유채꽃 어우러진 제주 바닷가 풍경처럼 따뜻하고 자연스레 사연이 풀려나간다. 하지만 거기에 실린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깊고 어둡다. 어찌 보면 이 드라마는 (사람에게 받은) 그런 상처가 역으로 사람한테서 얻어지는 따뜻함으로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할 수 있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라도 행동의 까닭이 이해가 간다. 인간의 본질을 단면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여리기도 하고 모질기도 한 삶의 총체성이 포개지고 풀어지면서 일렁인다. 그러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이 드라마는 어른의 드라마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한국 드라마 최초로 제주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온전한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지금이야 명실 공히 국내 최고의 여행지다. 맛 집과 최신 유행 카페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고려시대 삼별초에서부터 해방 후 4.3 항쟁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언제나 변방의 섬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육지껏’들에게 언제나 수탈과 타자화(他者化)의 대상이었던 게다.

 

그러한 드라마 전역에 걸쳐 풍성한 제주 사투리가 흘러넘친다. 언어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졌던 제주 말이 대중매체에서 넘실넘실 향연(饗宴)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고두심이야 원래 이곳 사람이니 그렇다 치자. 에피소드 1회에서 3회까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은희수산 사장 은희(이정은 분). 그녀의 사투리는 제주 토박이들도 깜짝 놀랄 정도다. 순식간에 젊은 할아방이 되어버린 순대가게 주인장 인권(박지환 분)도 못잖다. 배우들의 집중과 노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다. 조연들까지 빠짐없이 그렇다. 드라마를 관통하는 보기 드문 몰입감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된다.

 

언뜻 보면 착한 사람들만 등장하는 판타지 드라마 같다. 하지만 그런 이질감이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은 배우들 연기가 던지는 생생한 현실감 때문이다. 세상살이의 보편성을 개별적 공감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센 것이다.

 

18회에서 마지막 20회까지는 옥동과 동석의 모자 이야기다. 배 타던 남편이 죽고 그 남편 친구의 첩 신세가 된 어머니. 어멍의 이해 못할 박대에 평생을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아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배우의 비중이나 방송 분량에서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다. 작품의 주제가 가장 진하게 담겨있는 게다.

 

그것은 ‘화해’였다. 한 많은 삶을 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어멍. 그리고 핏줄이었기에 상처를 피하지 못한 동석이 얼어붙은 서로를 품고 녹이며 마침내 그곳에 이른다. 같은 회에 고등학생 현이와 영주가 3.3킬로의 건강한 딸을 낳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소멸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작이 화해를 통해 이뤄진다는 메시지를 작가는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한라산 중턱에 아득히 흩날리는 눈발 같은, 그런 운명의 순환을 지켜보며 나는 끝내 눈물을 펑펑 흘리고 말았다.

 

산다는 게 그런 거다. 저마다 마음속엔 바다가 있고 파도가 인다. 그러니 늘 향기로운 꽃만 피는 인생이 있을런가. 우리네 삶은 제주 푸릉마을 앞 바다 물결에 가라앉기도 했다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인간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다. 마치 블루스가 흐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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