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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칼럼] 슈퍼돼지 옥자와 동물복지

 

1.

봉준호 감독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게다.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해서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 히트작을 찍었다. 드디어 2020년 ‘기생충’으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아카데미 4개 부문 영화상을 휩쓸었다. 1969년 9월생이니 50대 초반이다. 그런데도 이미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옥자(2017)’가 있다. 한국 영화 최초로 OTT 채널 넷플릭스에서 전액 투자를 받은 작품이다. 식용육 생산을 둘러싼 글로벌 자본의 일그러진 탐욕을 그린 영화다. 여기서 옥자는 ‘미란도’라는 다국적 식품회사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만든 슈퍼돼지의 이름. “환경파괴를 최소화하고 사료도 적게 먹고 배설물도 적게 싸는” 완벽한 돼지다.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가 한 식구처럼 기른 옥자는 뉴욕으로 강제 이송되어 씨받이가 된다. 그리고 갈갈이 몸이 찢겨 가공식품이 될 위기에 처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식품회사 CEO 미란도가 (영화 속 광고에서) 소비자에게 던지는 다음의 메시지다,

 

“저희 회사 변혁연구소와 미란도 동물복지센터에서 혁신적인 비밀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과학자들은 ‘미란도 돼지’들이 평온하고 좋은 꿈을 꾸는 반면 (다른 돼지 사육농장의) 저 불행한 돼지들은 밤마다 지독한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돼지들도 행복한 꿈을 꿀 권리가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의 결과물인 수백만 마리 돼지를 끔찍한 방법으로 도살해서 온갖 식품으로 탈바꿈시키는 회사다. 그럼에도 자기네 돼지들은 행복하다는 연설을 늘어놓는 게다. 풍자영화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서사의 저변을 관통하는 공장제 동물사육의 저 도저한 위선은 가히 공포감이 들 정도다.

 

2.

‘옥자’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그저께 동네를 지나가다가 영화 속 회사가 떠오르는 장면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유기농 친환경을 주장하는 식품가게다. 그 출입문에 떡하니 붙여놓은 돼지고기 판매 캐치프레이즈를 본 게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고소하고 진한 육즙이 가득한 무항생제, 동물복지 돈육”

 

무항생제는 좋다. 근데 ‘동물복지’란 말이 마음에 딱 걸린 것이다. 이 단어는 영어 animal welfare를 직역한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덜 열악하고 청결한 환경에서 가축의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면서 사육하는 걸 뜻한다. 그리고 이 같은 해당 기준을 충족시킨 경우 국가가 인증하는 마크를 부여한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아무리 그래도 동물복지 돈육이라니. 그 말인즉슨 돼지에게 한껏 복지를 제공한 다음 결국 도살해서 “고소하고 육즙 가득한” 살코기로 판다는 뜻 아닌가. 세상에 산 생명의 목숨 끊는 것보다 반 복지적인 행동이 어디 있나. 그렇게 번연히 죽여 놓고, 도살 직전까지 제공했다는 '동물복지'는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복지(福祉, welfare)란 '행복한 삶'이나 '좋은 건강, 윤택한 생활, 안락한 환경들이 어우러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할 때, 식용육 생산을 위해 대량 사육 환경에서 키우는 돼지들의 삶이 (인간의 관점에서 아무리 청결하고 스트레스가 덜한 환경이라고 해도) 과연 행복하고 윤택하고 안락한가?

 

3.

논어 편에 나오는 정명론(正名論)은 공자의 핵심 철학 중 하나다. 제자 자로(子路)가 “선생님께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면 무엇부터 하실 것이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겠다(正名)”고 답한 것이다. 사람과 사물과 사건에 대하여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는 것에서 올바른 인식과 행동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es)' 개념도 일맥상통한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복제물이 오히려 원본을 대체하는 생생한 현실감을 지니게 된 것이 시뮬라크르다. 한마디로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아진 것이다.

 

이 개념을 언어적 층위에서 확장시키면 어떻게 될까. 대상의 본질을 왜곡시킨 가짜 이름이 진짜를 대신하는 것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타락한 정치권력이 이런 행동을 즐겨했다. 예를 들어 박정희와 그의 주구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1961년의 군사쿠데타를 수 십 년 동안 ‘혁명’이란 가짜 이름으로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반정명(反正名)은 주로 자본에 의해 일어난다.

 

앞서 말한 가게 출입문에는 해당 캐치프레이즈 아래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행한 동물복지 인증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관청에서 오케이를 받았으니 생명윤리적으로도 당당하다는 자부심의 표시라고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내 생각은 다르다. 어떤 맥락, 어떤 명분으로든 살코기를 얻으려고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 행동에 ‘복지’란 단어를 붙이는 것은 적절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고 본다. 인간의 표면적 양심을 위로하고 무마하려는 기만적 레토릭이기 때문이다. 이윤창출의 탐욕을 관철하기 위해 말의 뜻을 비튼 것이다.

 

식육동물에게 덜 스트레스를 주고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사육하는 것이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마땅히 장려해야 할 행위다. 아무리 그렇다 해서 오로지 잡아먹기 위한 목표로 동물을 키우면서 ‘복지’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조금 낯 뜨겁지 않은가. 외국말 번역을 하더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기왕에 동물을 덜 고통스럽게 해 주자는 선한 의도가 전달되려면, 이 용어에 대한 새로운 고민과 대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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