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는 것들이 있다. 속으로 깊어져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다. 겨울이 그렇고, 상처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고여서 깊어지는 건 뭐든 아찔하다. 겨울이든 상처든, 사람이든 사람 아닌 것이든, 속으로 깊어져서 켜켜이 가라앉는 것들은 위험하다. 그래서 병(病)드는 줄도 모른다. 낙하를 거부하고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도 그렇다. 녀석을 가리키며 그 누가 간밤에 흩날린 눈이라고 하겠는가. 간신히 붙들고 매달린 수직의 눈물 작대기를 보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본래 같은 것들이라 단정하진 말기로 하자. 비든 눈이든 얼음이든 벗겨놓고 보면 똑같은 것이라고.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쇼윈도 속 마네킹 같은 것이라고. 쉬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섣부른 결정은 때늦은 후회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니까. 쌓이는 것들이 있다. 안으로 깊어져서 아득해지는 것들이다. 세월이 그렇고, 고독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다. 쌓여서 깊어지는 건 뭐든 애처롭다. 세월이든 고독이든, 사람이든 사람 아닌 것이든, 안으로 깊어져서 켜켜이 고립되는 것들은 위험하다. 그래서 하얗게 소멸하는 줄도 모른다. 드러내지 못하고 나무껍질 속에 똬리 튼 나이테도 그렇다. 녀석을 가리키며 그 누가 고스란히 기록된 아름드리나무의 역사라고 하겠는가. 끝끝내 살아남은 것들의 들숨과 날숨이라 하겠는가. 뜻도 소리도 없이 안으로 깊어지는 동그라미의 흔적을 보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안으로 깊어져서 쌓이는 것들을 ‘쓸모없음’으로 멸시하진 말기로 하자. 말이 없다고 해서 뜻조차 없음은 아님이니. 진정한 ‘앎’이란 ‘모름’의 벽 너머에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늘 고이고 쌓이는 것들 틈에서 산다. 도시를 배회하는 것들을 따라 밀물과 썰물처럼 출렁인다. 소비가 미덕인 세상에서 소비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밥벌이 속으로 깊어지기라도 하면 시절을 파먹는 밥벌레로 꿈틀거린다. 그렇게라도 살아야겠지. 자동차 똥구멍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바늘 끝 같은 자존심을 꿀꺽 삼키며 도시의 그늘 속으로 기우뚱 걷는다. 당신도 그러할까. 문득 궁금하다가도, 눈보라 흩날리는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면 귀를 닫고 만다. 발을 동동거리며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흩날린다. 퇴근길에 내리는 눈은 더 이상 하얀색이 아니다. 네온 불빛은 맑음을 가만 두지 않는다. 맑음을 방치하고 있을 자본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눈물조차 화려한 색깔이어야 하니까. 당신도 그러할까. 속으로 고이고 안으로 쌓이는 사람들처럼. 비명조차 간신히 삼켜내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까. 동동걸음을 반복하며 함박눈 틈에서 나부끼고 있을까. 신호대기 상태의 고드름처럼 울지 못하는 것들의 나이테를 새기고 있을까. 그리 보면, 당신도 또 다른 당신도 눈(雪)을 닮았다. 나는 눈을 닮은 당신들이 좋다.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모두 같은 게 아니다. 눈은 비처럼 소리 내서 울지 않는다. 소리 내며 흐느끼기보다 찬란히 부서짐으로 울음을 대신한다. 그래서 눈은 겨울 하늘을 골라 투신하는지 모른다. 한줌의 온기마저 상실한 당신과 나를 대신하여 울어주기 위해. 온 몸을 던져 소멸하는지 모른다. 겨울에 쏟아지는 비는 있어도 여름에 흩날리는 눈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
1. 문화인류학자 타이거와 폭스(Tiger & Fox, 1971)는 ‘보은(報恩)의 망(web of indebtedness)’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타인에게 은혜를 받으면 그것을 되갚는 사회적 태도를 말한다. 이 원칙이 노동을 분화시키고 재화와 서비스의 상호 교환을 가능케 함으로써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거다. 사냥으로 생존을 유지하던 구석기 시대가 대표적 사례다. 발 달린 사냥감이 필요한 시기에 딱 맞춰 눈앞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먹거리 획득이 부정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잡은 짐승 고기를 자기와 가족만이 독식한다 치자. 그 같은 습관을 반복하면 나중에 자신이 굶을 때 주위에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봐서 무리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게 되는 거다. 주어진 호의와 선물을 되갚는 후성유전학적 DNA가 호모..
경기도 지역에서 폐수처리장에서 발생한 폐기물(오니)을 불법 매립·보관하거나 허가 없이 폐기물 처리 영업을 한 업체들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규정을 어긴 채 폐기물을 불법으로 다루는 것은 일단 당사자들의 공공질서 의식 부재가 주원인이다. 폐기물 불법 처리 행위를 선제적으로 적발 단속할 수 있는 감시시스템이 강화돼야 한다. 이에 못지않게 환경에 대한 인식을 대폭 개선할 획기적인 대안 마련 등 입체적 대책이 절실하다. 경기도 민생특별사법경찰단(특사경)은 올해 사업장폐기물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 결과 118건의 위반을 적발해 95건은 검찰에 송치했고 나머지 23건도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송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적발된 위반 내용은 ‘불법 폐기물 소각·매립 28건’, ‘무허가 폐기물처리업 15건’, ‘폐기물 처리기준·..
지역 살리기와 지방 정부시대를 맞아 2024년부터 지역특화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11월 2일, 17개 광역 시·도, 지역 혁신기관, 우수 지역 중소기업이 함께 개최한 제1회 지역혁신대전 기념식에서 지역특화 프로젝트 ‘레전드(Region+end) 50+’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지역특화 프로젝트 레전드(Region+end)50+는 지역 현안을 해결하고 지역에 특화된 프로젝트를 지원해 국내 경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매출액 비중을 50% 이상으로 제고하기 위한 중앙과 지방 정부의 협력형 프로젝트다. 중기부는 17개 광역 시·도가 제출한 35개의 프로젝트에 대한 컨설팅과 심사를 거쳐 최종 21개의 세부 프로젝트를 선정하였다. 지역별로는 수도권 5개, 충청권 5개, 호남권 5개, 영남권 6개가 선정되었다. 중기부는 이들 17개 지역의..
총선을 앞둔 국내 정치 지형을 보면, 여전히 선거제도도 확정되지 않고, 여당인 국민의힘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모두 내부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 결코 조용하지 않다. 더욱이 이번 총선이 지난 21대 총선과 같이 준연동형으로 진행될 것을 예상해 여러 창당 움직임도 활발하다. 대의민주주의와 양당정치로 규정되는 우리 사회는 코로나19 경험과 비대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시민들의 의견 수렴 절차나 표현 방식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변화는 형식적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국민이 직접 정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성숙시킨다. 사회 발전에 의한 변화는 필연적이지만, 사회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공정한 사회, 국민 모두가 함께 가는 사회, 그리고 분열과 갈등이 적은 평화로운 사회 등은 시대나 문화를 떠나 늘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이자 정치적 지향점이다. 아쉽게도 혼란스런 정치 상황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보면, 국내 정치지형에서 무엇보다 분명한 것이 사회적 가치의 실종과 방향성 상실이다. 여당은 정치검찰의 권력 장악을 위해 기존 정치인에 대한 압박을 더욱 높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나경원, 이준석 당대표 등에 대한 과거 제재 상황은 물론, 이동규 국민의힘 후원회장 구속을 통한 압력 효과는 장제원이나 당대표 김기현의 최근 행보에서 잘 나타난다. 야당 역시 당대표 중심의 당 개혁에 저항하는 기존 주류 의원들은 물론, 심지어 당운영에 불만을 표명하며 창당을 거론하는 전 당대표마저 등장하는 상황이다. 여당은 정권 안정을 내세우고, 야당은 윤석열 정부의 심판을 내세운다. 신당이나 창당 움직임에서도 윤석열 탄핵이나 현 정부 타도가 핵심 주제로 등장한다. 예상을 초월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실정을 보면 너무도 타당한 구호지만, 한 정당의 핵심 가치나 과제가 당장의 정권 심판이라는 것은 너무 초라하다. 심지어 현 당대표의 당 운영을 비난하면서 창당을 말한다는 것은 정치를 단지 정치 타산과 이해관계로 접근함을 말해 준다. 여야 양당에서 병립형 선거제도가 다시 거론되는 것도 국내 정치 발전보다는 정당 의석수 계산에 근거한 정치공학적 접근일 뿐이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 구현과 양당제 극복을 말하면서도 정당의 최우선 핵심 가치가 단지 현 정권 심판이라면, 이는 주류정당이건 신당이건 과거 양당정치의 구태를 내면화한 것에 불과하다. 단지 다른 진영을 비난하면 차악의 선택을 통해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국민을 바보로 아는 정치문화의 재현이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국민에게 차악이 아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정당을 준비해 제시해야 한다. 상대방 비난과 심판을 넘어 희망과 발전의 정책, 전쟁위기 없는 한반도 평화 공존의 방향, 국제사회를 이끌어 갈 선진국으로서의 인도적 가치와 현실정책의 최우선 제시가 없는 정당의 난립은 결국 국민 개혁 열망의 낭비와 소진을 불러온다. 윤석열 정부 평가 및 심판의 당위성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은 21세기 국제 선진사회에 맞는 사회적 가치와 희망의 정치라는 맥락에서 거론되어야 한다. 총선이 양당을 위한 병립형 선거제 선택을 통해 현 정권 심판에 그친다면, 이는 차악 선택에 의한 사회 퇴행으로 가는 길이다. 주류정당이건 신생정당이건 표면적인 정권 심판을 넘어 보다 바람직한 가치와 희망, 현실적이자 구체적 대안 정책을 제시하는 정당 모습이 필요하다. 정치적 상상력이 없는 사회에서는 군인이나 검찰 권력이 등장한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진영을 넘어 선진국에 걸맞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그런 상상력 풍부한 꿈을 지닌 이들이 절실하다.
봄꽃이 필 정도로 포근한 날씨, 이례적으로 더운 겨울이 순식간에 살을 에는 것 같은 추위, 평년보다 강력한 한파로 바뀌었다.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을 받아 3일간 한랭하고 4일간 온화한 날씨가 된다는 삼한사온 현상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이 크다. 더구나 반팔을 꺼내입다가 내복을 껴입는 일주일 사이 기록적인 폭우까지 쏟아졌다. 사상 처음으로 호우특보와 대설특보가 동시에 발효되는 일도 일어났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해 적응하기 힘든 날. 경험과 예측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날씨다. 여행에서 날씨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측 불가의 날씨는 심혈을 기울여 짠 코스를 단숨에 뒤엎어버린다. 고민 끝에 준비한 옷과 소품도 무용지물. 단순히 휴대용 우산을 꺼내지 않을 정도면 괜찮지만 선크림, 선글라스, 민소매의 원피스와 모자, 샌들은 꺼내지도 못하고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와 회색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준비한 시간이 길고 기대가 컸던 여행일수록 실망도 커진다. 이 여행을 위해 들인 정성과 비용이 아까워 기분이 처지고 짜증만 늘어간다. 하지만 모든 계획과 준비와 꿈과 기대와 희망이 전부 무너진 순간, 반짝여야 할 여행지가 최악의 여행지로 기억될 위기 속에서도 시간만큼은 착실하게 흐른다. 찌푸리고 험한 날씨 속에서도 여행은 계속된다. 어차피 떠난 여행이니 실내관광지라도 찾아가는 사람, 안전하게 숙소에서 머무르며 푹 쉬는 사람, 번거롭더라도 비가 쏟아지거나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몰아치는 그 순간을 가장 찬란하게 만끽할 장소를 찾아 새롭게 계획하고 떠나는 사람. 저마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방식도 다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숨만 쉬고 있더라도 이미 일상에서 떠나온 이상 그 시간조차 여행이다. 여행자에 따라 내리지 않을 비가 내리거나 여행지에 따라 맑은 날에 천둥번개가 내려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날씨가 이상하더라도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이며,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현실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대한 즐길지, 여행자의 불운과 기이한 세상을 탓하며 한숨만 내쉴지는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다. 여행에 정답은 없다. 가성비를 셈하든 가심비를 헤아리든 여행하는 사람이 그 시간을 통해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얼마나 만족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결국 마음이 판단한다는 의미다. 반짝이는 햇살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 같은 풍경 속을 걷는 시간만큼 쏟아지는 빗속에서 쫄딱 젖은 서로의 모습이 우스워 깔깔 웃는 시간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수 있다. 계획을 벗어난 곳에서 만나는 우연한 즐거움은 더 깊게 기억된다. 예측 불가한 여행을 통해 힘을 빼고 즐기는 법을 익힐 수도 있다. 오늘의 여행,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 당신이 만들어 갈 여행은 어떠한가.
경기도가 19일 ‘2023 대한민국 일자리 어워드’ 행정안전부 장관상을 받는다고 밝혔다. 높은 평가를 받은 사업 중에는 베이비부머(베이비부머 일자리기회센터 운영, 이음일자리 사업 등) 등을 위한 세대 맞춤형 일자리사업도 있다. 도가 얼마 전 실시한 ‘베이비부머 실태 및 지원정책 요구조사’ 결과 전체 71.7%가 ‘계속 수입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베이비부머들은 아직 일할 수 있는 힘과 의욕이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들을 위한 정부정책은 빈약하다. 지난 7월에 열린 베이비부머 프런티어 발대식에서 김동연 지사는 “청년과 노인 대책은 많지만, 베이비부머 대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분들이 경제활동에 얼마나 참여 하는가에 따라 대한민국 경제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손일권 경기도일자리재단 서부사업본부장도 지난..
영화 '서울의 봄'이 대흥행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 정해인은 짧은 배역에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해인이 연기한 특전사 소령 오진호의 실제 인물은 김오랑 소령이다. 경남 김해 출신인 김오랑 소령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를 한 해 늦게 졸업했지만, 김해농고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당시 수재들이 모이던 부산대 공대에 합격하고도 학비가 없어 들어가지 못했다. 학비가 무료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제2보병사단 수색대 소대장으로 근무한 그는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 후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시작으로 특전사령부 작전장교와 정보장교를 지냈다. 군의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제5공수특전여단 중대장을 거쳐 1979년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79년 12월 13일 00..
어릴 적 김치를 참 싫어했다. 맛도 없었고 영양가도 없는 풀떼기를 먹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갔다. 반면 고기를 좋아했고 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 먹을 정도였다. 커서 카투사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니 미군식당은 천국과 같았다. 스테이크와 같은 다양한 고기 요리를 마음껏 원없이 먹었다. 인근 부대에서 근무하던 한동현 사촌형이 면회 와서 카투사 스낵바에서 한턱 쏘려고 했다. 나는 왜 맛없는 한식을 먹느냐며 미군식당을 고집했다. 부대 내에 불량스러운 흑인 병사들이 있었다. 신병인 나에게 김치는 변 냄새가 난다며 놀렸지만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엄청난 모욕감에도 거대한 체구의 흑인에게 주눅이 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간혹 김치를 즐기는 미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미군들은 강렬한 냄새 때문에 혐오했다. 그들은 라면도 면이 부드럽고 담백한 맛의 일본 제품을 좋아했다. 한국 라면은 면도 거칠고 너무 매워 대부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워낙 고기를 좋아해서 소련과 러시아에서 10년 유학 중에도 먹는 거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포유류 중 유독 인간만이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은 직립 보행의 치명적인 부작용 때문이다. 인간만의 특징인 직립 보행으로 과호흡, 과식, 수면 부족이라는 3대 질병 원인으로 이어진다. 한국인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날씬하다. 그리고 2030년이 되면 우리나라는 일본을 제치고 최장수 국가가 된다. 한국인이 건강한 것은 사실 미스터리이다. 한국인은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수면의 질이 매우 낮다. 빨리빨리 문화로 인한 수면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한국인’이 된 것은 단언컨대 김치 덕분이다. 야채가 몸에 좋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야채는 맛이 없다. 더구나 영양소 흡수율도 낮아 보잘것없는 풀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발효라는 선물을 주었다. 발효는 박테리아, 효모, 곰팡이 등의 미생물이 식품을 먹기 좋게 분해하고 변환시킨다. 이를 통해 식품에 독특한 맛과 향을 더한다. 김치, 사우어크라우트, 낫또, 치즈, 요구르트, 템페 등의 발효식품은 인류에게 축복이나 다름없다. 그 중에서 김치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이다. 지금 미국에서 김치 열풍이 일고 있다. 유명한 의사나 과학자들은 책, 팟캐스트, TV, 라디오, 유튜브 등을 통해 김치의 효능과 맛에 대해 찬사를 하고 있다. 지금 미국인의 건강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인구의 70%가 과체중 및 비만이고, 건강 수명이 오히려 단축되고 있다. 이에 미국은 한국인의 김치를 구세주로 여기고 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김치가 점차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으로 변하면서 본연의 영양학적 가치를 손상시키고 있다. 필자는 동치미나 물김치를 저염으로 만들어 반찬이 아닌 아예 밥처럼 먹고 있다. 세계 각지의 사우어크라우트, 낫또, 티벳버섯유산균, 템페, 쌀누룩 발효음료 등의 발효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식으로 먹는다. 네로 황제, 진시황, 일론 머스크의 식탁보다 더 훌륭한 불로장생의 진수성찬이다. 세상의 발효식품 중에서도 김치가 단연 최고인 까닭은 바로 무한한 다양성에 있다. 거의 모든 야채로 만드는 김치는 다양한 미생물로 각종 영양소, 비타민, 미네랄 등을 생성한다. 덕분에 인체의 장은 건강해질 수 있다. 장에서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은 95%, 면역세포는 70%가 생성된다. 장은 생물 중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기관이다. 생물 기관에서 가장 먼저 진화한 것이 입과 장이다. 김치로 장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인간은 행복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 지금 전 세계인이 김치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치의 세계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김치 덕분에 전 세계인이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더욱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김치를 혐오하던 흑인 병사도 지금쯤은 김치를 담가 먹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주겠다.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의 말이다.
우연찮은 기회에 지난 3~4/4분기 동안 전라북도 8개군 6개 도시를 다닌 적이 있다. 작은 극장을 순회했다. 8개 군이라 하면 부안 고창 순창 임실 장수 진안 무주 완주군을 말하고 6개 도시라면 전주 군산 익산 김제 정읍 남원시를 말한다. 전라북도는 다른 지차체에 비해 면적이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대체로 전주에 머물며 하루 일정으로 동쪽 지역의 군을 다니고 또 다른 하루 일정으로 서쪽 지역 군을 다니곤 해도 됐을 정도다. 그렇게 다니면서 뛰어난 지역 풍광(마니산 같은)이나 지역 발전의 모티프(임실 치즈 같은)때문에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충격을 받았다. 인구 때문이었다. 8개군의 평균 인구는 대체로 2만명 안팎. 거의 절멸 수준이었다. 특히 젊은 층 인구는 거의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전북 도와 각 군, 시가 의지를 가지고 40석~60석 수준의 지역 극장을 만들어 영화 문화의 확장을 꾀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음에도 불행하게도 그 선의의 역할이 거의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유일하게 극장 문화가 극장 문화답게 유지되는 곳이 무주 군으로 보였는데 그건 순전히 이곳의 무주산골영화제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나머지 극장에는 단 40석에 불과한 공간임에도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전체 인구가 2만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극장이 운영될 수가 없다. 극장은 거의 백퍼센트 유동 인구가 차고 넘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그게 전통적인 판단이다. 영화제를 초기에 기획하고 조직하는 사람들이라면 제일 처음 보는 것이 인구가 대체 얼마냐는 것부터 이다. 이들 전문가들은 최소 50만명이 있어야 영화제의 채산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지금의 전주시, 경기도의 파주시 정도가 리미트이다. 전라북도 8개군을 돌아 보면서 여기에서는 영화를 얘기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사람이 없는데 무슨 영화이겠는가. 하지만 그 반대로 극장과 영화에 대한 갈증은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장수군에 신전마을이란 곳이 있고 여기는 25가구가 사는 산골 마을인데 바로 이런 곳에서 ‘섶밭들 산골마을 영화제’ 같은 것이 열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영화가 문화로서 통용되긴 한다. 문제는 영화가 산업으로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영화가 산업이 되지 못하는 곳에서는 결국 문화로서의 영화도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전라북도 8개 군을 다니면서 마음 속 한 구석이 참담했다. 이거 이러다 오래 못가겠구나. 전라북도가 오래 못가고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오래 못가겠구나. 사람이 없고 젊은이들이 없고 아기들이 태어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영화가 잘되겠으며, 어떻게 대학이 운영되고, 어떻게 소아과와 산부인과가 살아 남겠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지금 윤석열 정부는 고민을 하고 있는가. 영부인은 이런 문제의식의 가치가 샤넬 명품백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인구를 당장 생산해 늘릴 수 없다면 인위적으로라도 늘려야 한다. 중국 베트남 아프리카 남미 등등에서 유학생들을 오게 하고 값싼 노동자들에게 장벽을 낮추고 영주권도 잘 주고 그들의 자녀에게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줘야 한다. 문호를 열어야 한다. 그럴려면 마인드를 열어야 하고 이데올로기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공산주의권 출신이어서 싫고, 피부색이 달라서 싫고, 동성애자여서 싫고 등등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결국 남는 게 없다. 우리 자신이 소멸한다. 총 41 가구에 불과한 불가리아 국경 마을의 우체부인 노인은 매일 자신의 집 주변을 흘러 가는 집시와 그의 아이들을 보면서 저들이 자신의 마을에 들어 와서 살면 마을에 아기들의 웃음과 울음 소리가 넘쳐 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여자 시장이 반대하는데다 빨간 운동복을 입고 다니는 동네 불량배 또한 집시는 에이즈 환자들이라며 반대한다. 그래서 우체부 노인은 자신이 직접 시장을 하겠다며 선거에 나간다. 핀란드 영화 ‘굿 포스트 맨’의 줄거리이다. 우리도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 마음과 생각의 국경, 장벽을 열 것이냐 닫을 것이냐. 낮출 것이냐 높일 것이냐를 놓고 다시 한번 현명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뭐 이미 선거는 잘못 해 본 경험들이 있으니만큼 다음엔 잘들 할 것이다. 행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