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코로나19 거리두기 해제에도 불구하고 골목상권이 회복되기는커녕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연이은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등의 악재 속에 자영업자의 3분의 1이 폐업을 고려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산업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자영업의 기반붕괴는 결코 허술히 다룰 문제가 아니다. 빈사 상태에 빠진 자영업을 구출하기 위한 강력한 ‘산소호흡기’가 시급하다. 나아가 자영업 생태계 전반에 대한 새로운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모노리서치와 자영업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자영업자 2022년 실적 및 2023년 전망 설문조사’ 결과, 68.6%가 올해 매출이 지난해보다 감소했다고 답변했다. 특히 올해 순익이 작년 대비 감소했다는 응답이 69.6%로 나타나 ‘백약이 무효’인 상태에 빠진 자영업계의 처절한 현실을 대변..
한 소녀가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렸다. 자살이었다.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아이는 식물인간이 되었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산 게 아닌 어정쩡한 몸이 되어버린 그와 남겨진 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목격했다.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삶의 끝에 이르고자 했겠지만 그 선택은 모두가 불행해지는 결과를 가져 왔다. 대학을 자퇴하고 꽃동네에서 자원봉사자로 지낸 적이 있다. 노숙인, 노인, 버려진 아기, 정신병동과 호스피스 병동이었는데 특히 호스피스 경험은 혹독했다.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끔찍했다. 새벽녘 개들이 늑대처럼 일제히 울부짖으면 이불 속에서 귀를 틀어막고 또 어떤 분이 돌아가신 걸까 두려움에 떨었다. 개들이 짖은 날이면 어김없이 병상에서 누군가 사라졌다. 어느 날 일용직 노동자가 입원했는데 공사판에서 발이 못에 찔렸다 했다. 대수롭잖다며 겸연쩍게 웃던 그 아저씨는 다음날 파상풍으로 사망했다. 가난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죽음을 알리는 소식-부음(訃音)을 들을 때마다 나는 고인이 된 이에게 당신의 죽음은 어떠했는지 부질없이 묻곤 한다. 천수를 누리다 기력이 쇠하여 돌아가신 분, 창창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은 분, 병고 끝에 돌아가신 분,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분들. 죽음도 가지각색이다.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기별은 피할 순 없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인 ‘죽음’을 돌아보고 내 삶을 성찰하게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의 저자 브로니 웨어는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질문에 시한부 환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이 기대하는 삶을 산 것, 변화를 받아들이기 두려워한 것, 감정표현을 솔직하게 하지 않은 것, 소중한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것,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바꾸어 말하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감정표현을 솔직하게 하며,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죽는 순간 후회는 덜할 것이라는 역설에 이른다. 제대로 산 삶이 제대로 된 죽음을 만든다. 어떤 이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변화하는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죽음에 대해서 죽은 사람은 말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은 설명할 수 없으니 그 실체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 슬픔은 그 알 수 없음에서 비롯한다. 해서 나는 죽는 순간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을 미루지 말기, 마음 가는 대로 살기, 최선을 다해 행복하기. 남겨진 자들에게 비통함을 남기지 않기.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내 죽음에 대한 애도는 삶을 완주한 것에 대한 축복이길 희망한다. 당신의 죽음은 어떠한가.
경기도가 각종 재난으로부터 도민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10·29 참사와 같은 사회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대규모 합동훈련실시에 이어 도민 중심 안전정책 마련에 도움을 줄 안전분야 정책 자문조직인 도민안전혁신단을 구성해 운영에 들어갔다. 토목·건설 위주의 공약과 정책에 함몰돼 정작 중요한 시민안전 정책을 백안시해온 정치영역의 소중한 변화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이다. 전시행정이 아닌 진정성 있는 정책추진을 기대한다. 경기도는 지난 8일 수원시 권선구 롯데몰에서 경기도소방재난본부·경찰·한전· KT·인근 병원 등 32개 기관 관계자 500여 명이 참여한 재난대응 합동훈련을 시행했다. 헬기·구급차·소방차 등 장비 85대까지 동원된 이 날 훈련은 도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김동연 지사의 약..
겨울에 시작하여 또다른 겨울에도 종전되지 않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정보심리전 측면에서 크나큰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현대의 고도화된 디지털 정보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 비무력적 군사활동인 정보심리전이 현대 전면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보심리전은 적국에 대한 정보 우위를 달성하고, 의사결정에 혼선을 유발하며, 적국의 사기를 약화시키면서 전세를 주도하려는 전쟁의 중요한 수단이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국제적 여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방위 선전전을 펼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프로파간다로서, 특이한 것은 익명의 해커, IT기업, 일반 시민 등 다양한 비국가행위자들까지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터넷 서비스 제공방식을 변화시키거나 사이버 공격을 취했고, 혹은 전쟁여론에 영향을 끼치는 등 전세 변화를 도모하는 준군사적 활동까지 수행했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정보심리전 이해를 위해서는 전과 다른 시각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단순히 전쟁 당사자 간의 대결을 넘어 세계여론을 의식한 다양한 내러티브 경쟁, 정보를 수집하고 확산시키는 디지털 기술과 플랫폼 간의 대결, 그리고 다양한 층위의 민간 행위자가 가세하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고도로 첨단화된 정보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 정보심리전은 세 가지 차원- ▲ 정보와 내러티브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발신, ▲ 정보커뮤니케이션 채널에 대한 접근성, ▲ 작전 수행 주체의 규모 등에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기능과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적국의 개인정보 및 공간정보 인프라, 그리고 소셜미디어 계정 데이터 접근 여부는 성공적인 정보심리전 전개를 위한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러시아 침공 후 일주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CIA의 판단을 비웃듯이 우크라이나가 버티고 있는 것은 정보심리전에서 러시아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 등 서방측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긴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의 정보심리전을 눈여겨 보는 까닭은 “우리의 정보심리전이 형해화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문 정부 시절 정보심리전 부서 등을 초토화시킨 덕택(?)에 어느 누구도 특히 김정은 정권에 대한 정보심리전 업무를 선뜻하지 않으려 한다. 빈대 잡자고 초가 삼간을 확실히 태운 셈이다. 심리전 기법과 능력 있는 요원 육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김정은 정권은 암호화폐 해킹을 통해 조단위로 불법자금을 조성, 미사일 개발 등에 투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심리전에서 해커가 활약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해커들이 언제든 심리전에 투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윤 정부의 국가기관은 어떤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평시에도 허위조작정보 유포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므로 우크라이나 전쟁 심리전 양상을 교훈 삼아 하루빨리 심리전 태세를 재정비해야 할 때다. 특히 범부처가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위기대응체제 구축과 위기 복원력 강화가 시급하다.
연말, 이맘때쯤이면 해마다 언론 미디어에서는 올해의 사건 사고 등을 간추려 한해를 정리하는 기사가 나온다. 그중에는 올해의 단어, 신조어, 사자성어(四字成語)를 통해 한해를 되돌아 본다. 직장과 사회, 국제 관계에서 지난 한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해를 반추하는 MZ세대들의 말을 한번 살펴보자. 중꺽마 “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을 세 글자로 줄여서 말한 것이다. 중꺽마,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알쏭달쏭 감이 오지 않았다. 그 뜻을 알고 나니 아하 느끼는 순간, ‘올해의 단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말줄임 언어생활이 보편화되었다. 소셜미디어 사용이 확산하고 대중화하면서 짧게 줄여서 말하는 언어 습관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결과다. 우리 대한민국팀은 카타르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태극전사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좋은 경기를 축구 팬들과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다. 2골만 잃어도 사기가 꺽일 만하고, 전반전에서는 무려 네 골을 내준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포기하고 소극적일 수 있는데, 우리 선수들은 그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니까. 졌잘싸 “졌지만 정말로 잘 싸웠다”는 말이다. 이기고 지는 스포츠 경기에서 우리 팀이 이기기를 응원한다. 그런데 결과는 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경기에 임하는 태도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겨야 한다는 결과 성과주의의 강박관념에서 내용과 과정을 중시하는 요즘 세대들의 가치관 이동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팬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맨십이 그러한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정말로 ‘졌잘싸’였다. 알빠임 “내가 알 바 아니다”라는 말을 역시 줄였다. 월드컵에서 통산 다섯 번의 우승을 한 브라질팀이 최강팀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선수들과 축구 팬들에게 그건 ‘알빠임’이었다. 이른바 스펙 전쟁의 시대이다. 취업전선에서 지원자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 조건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학점, 외국어 특히 영어, 국내외 인턴·봉사 경력, 비교과 활동 등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스펙 준비의 부담이 상당한 편이다. 취업은 어려워지고 국내외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런 사정에 처해있는 ‘N포세대’들의 알빠임 태도는 긍정적이다. 상황이 얼마나 어렵든,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나는 그가 얼마나 강하든 상황이 악조건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최선을 다한다’는 태도는 응원할만하다. 언어는 한 개인과 집단의 정신과 가치관을 드러낸다. 언론 언어에서 줄임말을 쓰고 장려할 일은 아니다. 중꺽마, 알빠임, 졌잘싸. 한해를 보내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중꺽마를 응원한다.
지난 8일 소속 정당이 다른 수원·용인·성남·화성시 등 경기 남부권 4개 지방정부 시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상일 용인시장과 신상진 성남시장은 국민의힘 소속이고, 이재준 수원시장과 정명근 화성시장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날 이들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장 추진을 위해 공동 협력키로 합의했다. 당적을 떠나 협치와 상생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전에도 성남·수원·용인 3개시는 제5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포함하는 것을 목표로 3호선 연장을 위해 사전 타당성 공동용역을 실시하고 실무협의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차량기지 부지 확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사업 추진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사업이 난관에 부딪히자 용인시는 공동 협력이 어렵다고 판단, 계획안에 대한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경우 처인구 원삼 일대에 차량기지를 마련..
경기도 일산에 있는 한 종합병원에는 이런 서예 글귀가 써 있는 큰 액자가 병동 복도 여기저기에 걸려 있다. 누가 쓴 것인지 낙관은 없으나 다소 발칙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병든 사람들의 마음에 꽂히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써 있다. “세상 모든 근심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는 없지만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하리라.”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병원의 간호 서비스는 나름 친절하고 세심한 편이다. 서러운 마음을 어루만지라고 평소에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병들어 아프면 흔히들 인생 뭐 별거 없다느니, 이제 모든 걸 다 내려놓으라느니, 앞으로는 몸만 생각하고 건강만 염려하며 살라느니, 일은 다 그만두라느니 하는 소리를 한다. 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그게 다 빈 말이라는 것을. 영어로 얘기하면 ‘bullshit’, 한 마디로 개소리라는 것을. 자본주의에서는 아프다는 것도 매우 계급적인 것이다. 돈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플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일에서 은퇴해서, 건강만 생각하며 말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아플 시간이 없다. 노동을 멈출 수가 없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 가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지신이 밥벌이를 위해 일을 나가야 한다. 아프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들 하지만 그 ‘아프면 소용없는 일’이 진정으로 ‘소용없어지려면’ 바로 돈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아플 자격이 없다. 병에 걸려서는 안된다. 일산에 있는 병원의 저 글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적인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한국은 비교적 의료서비스, 건강보험이 잘 돼있는 나라이고 그래서 늘 병원에서 퇴원을 하거나 진료를 받고 나올 때마다 진료비, 입원비의 총액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우파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종종 MRI나 초음파의 건강보험 급여 체계를 조정한다느니 해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 같고 아니면 아예 공공 병원의 민영화 여부를 놓고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의 여론은 지금의 건강보험 서비스를 보다 더 확대하는 게 맞는 것이 아니냐는 쪽일 것이다. 한번 앞으로 간 것을 뒤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고스톱 용어로 ‘낙장불입’, 윷놀이 용어로 ‘빽도 불가’이다. 그러다가 망한 나라가 대처 시절의 영국이다. 오죽했으면 대처가 죽었을 때 영국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와 환호성을 질렀을까. 지금의 윤석열 정부가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없애 주지는 못해도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이라도 달래 줄 수 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서러운 마음을 달래 주기는커녕 세상 근심을 더욱더 많고 크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최근 벌어진 화물연대 파업 사태와 대통령과 정부의 업무 복귀 명령, 그에 따른 파업 철회에도 불구하고 핵심 주동자에 대한 엄정한 법 적용 원칙을 천명하는 모양새를 보면서 아 이 사람들은 정치를 하려 하지 않는구나, 오로지 통치를 하겠다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만든다. 다소 간교한 한 우파 평론가는 윤석열 정부의 법과 공정의 정신을 보여 준 사례여서 지지율이 올랐다고 자평했지만, 그 원한의 함성이 언젠가 부메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힘으로 누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좌에서 우로 전향했다고 내세우고 다니는 한 의원도 방송에 나와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에 대처처럼 대처를 잘했다며 낄낄댄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서러운 마음이 더욱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어쩌려고 다들 이렇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간의 얼굴을 잃어 갈 때 그 사회에서는 파국이 벌어지는 법이다.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가 이런 문제를 더욱 노골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전장연은 지하철 정거장 지연 점거 농성을 이어 갈 것이고 서울시는 그런 구역은 무정차 통과를 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시민들의 불편이 이어질 것이다. 서울시나 정부가 머리를 싸매고 해결할 생각보다는, 장애인과 시민의 대립으로 프레임을 짜려고 하는 얄팍한 정치적 술수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노-노 갈등을 유발시키는 셈이다. 전장연의 시위는 결국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이고 이에 대한 예산 문제이니만큼 해결의 실마리는 있을 것이다. 정부 권력을 쥔 자들이 ‘내 밑으로 다 숙이고 들어 오라’는 식의 태도를 일관해서는 민란을 유도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는다. 정치가 이렇게 돼서는 안될 일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영화 중에 ‘와즈다’란 작품이 있다. 2012년 영화이다. 10살 된 어린 소녀가 동네 친구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엄마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하자 엄마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고 아이를 그러지 못하게 하려는 내용의 영화다. 10년 전 사우디에서는 여성들이 이동권이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가 됐든 자전거가 됐든 직접 이동의 물체를 운전할 수가 없다. 남자가 해주는 것을 타야 했다. 강고한 회교 율법인 ‘와하비즘’때문이었다. 지금의 한국이 10년 전 와하비즘의 나라인가. 이동권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가.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은 것은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통치가 아니라. 통치는 김정일의 북한이나 시진핑의 중국, 푸틴의 러시아 같은 곳에서 쓰여지는 단어다.
분수가 흐르고 계단 위에 한 사람이 정갈히 손을 포개고 앉아 있다. 우리의 소녀상을 흡사 닮았다. 단지 이 주인공은 콧수염을 가진 사나이다. 슈바이처 박사.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주가 그를 기리기 위해 생 토마 광장에 만든 청동상이다. 알베르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행동하는 인간이자 인도적 지원의 파이오니아였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다 끝내 그곳에 묻혔다. 그는 ‘생명에 대한 외경(Respect de la vie)’을 중시했고 이 윤리를 잊으면 인류문화는 안녕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이를 높이 평가한 스톡홀름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거룩한 휴머니스트는 1875년 1월 프랑스 동부 카이제르베르(Kaysersberg)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6개월 된 그를 안고 발령지인 뮌스테르의 귄스바흐(Gunsbach)로 갔다. 거기서 세 명의 누나, 그리고 남동생과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이 선물을 슈바이처는 자연스런 권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스러워했다. 조숙하고 사려 깊었던 꼬맹이 슈바이처. 또래 아이들과 많이 달랐다. 그의 감성은 남과 다른 특별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자연은 그의 우주였고 이는 그의 전 인생을 지배했다. 그의 소심함과 단호함은 어머니를 닮았고 활기 넘침은 아버지를 닮았다. 슈바이처의 꿈은 음악가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의사를 꿈꾸지 않았다.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는 피아노와 오르간을 가르쳤다. 어느 날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사고로 부재하자 그가 대타로 연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슈바이처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그가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을 정식으로 교육받은 건 열네 살 때. 외젠 뮌흐(Eugène Munch)의 사사를 받으면서부터다. 2년 후 그는 스승을 대신해 종교행사의 연주자가 됐고 열일곱 살 때는 첫 콘서트를 열어 브람스의 레퀴엠을 연주했다. 슈바이처가 음악을 사랑하고 낙천적 비전을 갖는데 큰 영향을 미친 건 그의 삼촌 루이와 숙모 소피, 스승 뮌흐였다. 그는 성장하면서 의심의 여지없이 음악, 신학, 철학을 함께 병행하기로 결심했다. 알자스 지방인 귄스바흐와 밀루즈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이러한 꿈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러던 중 잠시 집을 떠나 외지인 파리에 갔다. 거기서 그는 진정한 음악세계를 발견했다. 스트라스부르로 다시 돌아와 그는 목가적인 음악을 공부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알자스-로렌은 리히치 독일로 합병됐다. 슈바이처는 프랑스어가 아닌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프랑스 고전 책들을 소장한 방대한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슈바이처는 열심히 책을 읽고 독일과 프랑스 양쪽 문화를 모두 익혔다. 그 덕분에 그는 스물네 살 때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가 됐고, 곧이어 신학박사까지 됐다. 생 니콜라(St Nicolas)를 설파하는 신학자로 활동하면서 오르가니스트이자 바흐 작품을 전문으로 연주하고 가르치는 매우 존경받는 음악학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거의 완벽한 삶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문했다. 서른 살에 인생의 반전을 맞은 슈바이처 분명 그는 다른 삶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제 목숨을 바치고자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되뇌었다. 어느 날 집에 도착한 그는 탁자위에서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아프리카 가봉에 의사로 갈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눈이 뻔쩍 뜨였다. 인생의 미션을 바야흐로 찾게 된 것이다. 서른 살인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인턴과정을 마치고 열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와 베를린에서 몇 개월간 머물렀다. 이때 가봉에 병원을 만들기 위해 5000달러를 모금했다. 이 돈은 아프리카에서 2년간 병원활동을 하기에 충분했다. 함께 떠나기 위해 엘렌느 브레슬로(Hélène Bresslau)와 결혼도 했다. 1913년 성금요일, 서른여덟 살의 슈바이처는 귄스바흐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보르도로 떠나 가봉행 배를 탔다. 오고우에(Ogooué) 강을 타고 마침내 랑바레네(Lambaréné)에 도착한 그는 부랴부랴 병원을 짓고 수많은 나병환자를 치료했다. 생명에 대한 외경을 손수 실천하였고 결국 그곳에서 병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슈바이처가 1952년 노벨평화상을 받자 그의 유년의 고향 귄스바흐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프랑스 알자스 오랭(Haut-Rhin: 라인강 위쪽) 지역에 있는 이 작은 마을은 1278년 탄생했다. ‘귄스바흐’의 의미는 명확치 않다. 늪지의 개울 혹은 귀노(Guno)라는 사람의 개울이라는 설이 있다. 13세기 프픽스부르(Pflixbourg) 성이 있는 왕국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95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뮌스테르 계곡에 펼쳐져 조용하고 평화롭고 녹색의 자연 경치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콜마르(colmar) 마을 역시 너무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즐겨 온다. 슈바이처가 태어난 카이제르베르 역시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도의 문화예술 고장으로 2017년 프랑스 최고의 도시로 선정됐다. 슈바이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뮌스테르와 귄스바흐를 방문하고 이곳 일대를 돌아보면 환상의 여행코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귄스바흐. 슈바이처 마을답게 그를 추억케 하는 것이 수없이 많다. 슈바이처 메종과 기념관, 슈바이처 오솔길, 아프리카 박물관, 물의 산책 등등. 슈바이처가 유년에 살았던 집은 지금 대중에게 오픈되고 있고, 그 옆에 슈바이처의 부모님과 그의 동생이 잠들어 있다.
세계사의 3대 거짓말을 꼽으라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빵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죠!’, ‘노예해방을 위해 시작한 미국 남북전쟁’이라는 말을 들고 싶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창작물에 나온 부분이지 갈릴레이가 실제 한 말이 아니며, ‘빵 없으면 케이크를.....’도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나온 글로 앙트와네트의 무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 지어 퍼뜨린 말이다. 미 남북전쟁은 미 연방을 탈퇴한 남부에 대한 응징에서 시작된, ‘미연방수호’가 목적이었던 전쟁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남부를 이기기 위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노예제도를 뒤흔들기 위한 것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론자이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전 생애의 주제는 아니었다. ‘노예 해방’을 위해 생을 던진 이는 따로 있다. 미 육군 대령이었던 존 브라운( John Brown 1800-1859)이 대표적이다. 1856년, 브라운은 캔자스 동부의 포타와타미에의 고립된 오두막에서 다섯 명의 노예제도 찬성론자를 살해해 지명수배자가 된다.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공공연히 ‘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인들과의 평화적 협상은 불가능하다. 노예제도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폭력혁명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노예해방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투신하게 된 브라운은 자식들도 투사로 만들었다. 두 번 결혼해 스무 명의 자식들을 두었는데(첫 번째 부인으로부터 7명, 둘째 부인으로부터 13명) 아들들 대부분이 아버지를 따랐다. 포타와타미에 오두막 살인사건으로 지명 수배를 받던 브라운은 본격적인 노예해방 운동을 결심한다. 노예 등 지지자, 약 5000명을 무장투쟁전사로 만들기로 결심, 이에 필요한 무기를 연방정부의 하퍼스 페이 무기고에서 탈취하려한다. 그러나 1859년 10월 결행된 그의 거사는 곧바로 달려온 지역 농장주들과 민병대, 연방군에 의해 좌초된다. 그 자리에서 생포된 브라운은 버지니아 주정부에서 반역죄, 포타와타미 오두막에서의 살인죄, 노예반란 선동죄 등으로 재판받은 끝에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미국인들은 존 브라운의 노예해방운동과 처형이, 1861년에 일어나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 남북전쟁의 단초였다고 생각한다. 남북 전쟁 중 북군의 진군가로 불리웠던 노래가 있다. 제목하여 ‘ 존 브라운의 시체(John Brown’s body)’ 존 브라운의 몸은 무덤에 누워 썩어가지만/ 그의 영은 진군하고 있다네/ 하늘의 별들은 따뜻하게 죽어간 존 브라운의 무덤을 비추고 있네/ 영광 영광 헬레루야.....후략...... 들어보면, 아, 이 노래! 하며 단박에 알 것이다. 학교 교가로, 찬송가로 익히 귀에 익은 리듬이다. 이 진군가는 전쟁 후, 가사가 바뀌어 미국 개신교의 찬성가로 불렸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이 세운 학교의 교가로 쓰면서 퍼져나갔다. 대의와 타인의 존엄을 위해 생을 바친 존 브라운의 삶을 떠올리면서, 존 바에즈와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어보시길.
빼돌린 정보로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리들은 탈세에도 능하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고액·상습체납자는 56,085명으로 총 체납액수는 51조1천억 원에 달한다. 2019년을 기준한 자료인 만큼, 상습체납자의 실제 규모와 체납액은 훨씬 많을 것이다. 지난 3월, 국세청은 암호화폐에 재산을 은닉한 상습 고액체납자 2,416명을 적발하고 체납세금 366억 원을 징수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고의로 세금을 체납한 사람들에 대해 국세청이 강제 징수한 것일 뿐, 들키지 않고 자행되는 불법탈세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여전하다. 페이퍼컴퍼니, 해외재산은닉, 역외탈세, 편법증여, 차명계좌, 다운계약서 등 수법 또한 다양한데, 최근에는 죽은 사람과 거래한 것처럼 속여 돈을 빼돌리는 신종수법까지 등장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의 세금은 근로소득을 통해 원천징수한다. 그런 만큼..